자본주의는 언제나 5%의 피를 원한다, 빅쇼트(The Big Short)

[컬처]by 인문잡지 글월
자본주의는 언제나 5%의 피를 원한다

오늘은 꽤나 건조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말하려는 영화부터가 건조해서 그렇다. <빅쇼트(The Big Short)>. 배급사의 광고문구를 보면 마치 <오션스11> 같이 반전과 기지가 번뜩이는 영화 같지만, 실제로는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화씨911>이나 <식코>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이 또한 꽤 흥미롭게 볼 수 있다. 물론 저런 영화들보다는 훨씬 건조하고, 냉정하다.

 

아프리카의 사바나 평원을 생각해보자. 얼룩말들이 있다. 그리고 사자가 있다. 사자는 얼룩말을 잡아먹고 산다. 하지만 얼룩말들은 살아남으려고 한다. 1:1로 한다면 얼룩말은 사자를 당해내기 어렵다. 그래서 얼룩말들은 무리를 짓는다. 물론 무리를 짓는다 하여 ‘모든’ 얼룩말이 살아남을 수는 없다. 사자들이 닥쳐들면, 얼룩말들은 떼로 도망가고, 그 중에 어리거나 늙었거나 다쳐서 뒤쳐지는 말은 먹이가 된다. 한 마리를 먹이로 내던짐으로써 나머지 무리 전체가 안전해진다. 그것이 얼룩말들의 생존방식이다.

 

자본주의라는 체계는 이런 사바나 평원의 질서를 닮았다. 얼룩말은 인간이다. 그리고 사자는 자본이다. 자본은 인간을 자신의 뱃속에 집어삼키려 한다. 인간은 자본에게 포섭당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자가증식과 팽창을 기본 섭리로 삼는 자본으로부터 모든 인간이 안전해지는 길이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무리 즉 ‘사회’에서 가장 약하다고 생각하는 5%를 떼어내서 자본의 먹이로 던져준다. 자본주의가 자신의 체계를 유지해온 방식이란 이렇다.

 

이 영화의 무대가 된 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이런 자본주의의 생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모기지란 mortgage, 즉 ‘주택담보대출’을 말한다. 주택이라는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형태다. 어떤 대출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원래 모기지는 대출금에 대한 지불 능력이 확실한, 즉 고정적인 수입원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정상이다. 이런 채무자를 ‘프라임(Prime)’이라고 부른다. 모기지가 프라임을 상대로 하는 동안에는 파탄날 우려가 극히 적다. 자기가 살 집에 대한 대출금을 갚지 않으려는 채무자는 적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프라임’에는 한도가 있다는 것. 2003년 무렵이 되자 대부분의 프라임은 이미 모기지에 가입했거나, 혹은 추가적인 모기지가 불필요한 상태에 이른다.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금융자본은 다른 돌파구를 찾아낸다. 그게 바로 ‘서브프라임(Sub-Prime)’, 즉 채무상환능력이 불확실한 이들까지 모기지의 대상으로 확장함으로써 포화상태에 이른 모기지 시장을 뒤엎어버린 것이다.

 

영화에도 언급된 바지만, 서브프라임에 대한 모기지 현황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은행에서 저금리로 돈을 빌려줄테니 그 돈으로 집을 장만하라는 달콤한 속삭임에 손을 내밀지 않을 서브프라임은 많지 않다. 은행도 ‘주택자산불패론’에 기대어 안정적인 모기지 상품을 투자자들에게 계속 팔아치울 수 있으니 이득이다. 얼핏 보기에는 윈-윈처럼 보이는 이 상황이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결국 서브프라임 붕괴라는 거대한 폭탄을 터뜨리게 했다. 그것이 바로 2008년 가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이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뉴스퀘어: 서브프라임알못을 위한 안내서)

 

얼핏 보면 월 가와 서브프라임&투자자 양쪽 모두 긍정적인 측면만 바라보다가 다같이 함정에 빠져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함정에 빠져서 피를 내쏟은 것은 서브프라임&투자자뿐이다. 특히 자신의 종잣돈을 투자금으로 선택한 소규모 투자자들이 이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금융자본은 처음부터 탈출구가 명확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사회의 5%를, 하위 5%를 먹잇감으로 잡고 시작하면 된다. 채무자가 지불 능력이 0에 가까운 하층 이민자든, 하나의 담보로 이중-삼중의 채무를 진 불량 채무자든 상관없다. 지불 능력이 없는 채무자와 자신의 평생 노후자금까지 닥닥 긁어모아 “안전하고 수익이 보장되는” 모기지에 집어넣는 소액 투자자만 희생시키면 금융자본은 일정한 수익을 떼어먹고 살아남을 수 있다. 자본주의란 그런 구조다.

 

우리는 모두 얼룩말이다. 차이는 그 5%에 들어가느냐 마느냐, 즉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한 마리가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얼룩말을 연민하며 괴로워할 수도 있다. 반대로 잡아먹힐 정도로 약한 게 잘못이라며 냉소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이치’ 자체를 거스르지는 못한다. 적어도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현 사회의 기초질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닌 한은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손쉽게 자본주의를 부정하거나 그 질서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들도 아니다. 그 질서 하에서 태어나 그 질서 아래에서 자라나며 그 질서로부터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고 그 질서 아래에서 죽어갈,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온/살아갈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얼마나 빠르게 달리느냐 혹은 느리게 달리느냐의 차이일 뿐, 당신 역시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뛰고 있는 얼룩말이라는 점은 차이가 없다. 등 뒤를 돌아보며 호기롭게 “사자를 무찌르자!”라고 외친다고 해봐야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혹은 “왜 모든 얼룩말들은 단결하여 사자를 무찌르지 않느냐?”라며 반문을 던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그 5%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얼룩말들일 뿐이다. 변혁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 변혁이 부도심의 어느 좁은 전셋방 스터디룸에서 먹물 냄새 풍기우는 단어 몇 개 입에 주워섬긴다고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빅쇼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철저하게 ‘비관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앞으로의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약자를 짓밟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게 자본의 욕심을 적당히 채워주면서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IMF와 서브프라임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10년 주기였다. 현재의 정부 여당이 이주노동자 및 그 가족에 대해 감싸안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괜한 이유가 아니다. 이들만큼 좋은 ‘서브프라임’도 또 없으므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 괜히 약자에 대한 혐오가 불거진 게 아니다. 이 약자들을 최대한 ‘바깥으로 내몰아야’ 자기가 5% 안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는 절박함과 안도감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들을 ‘서브프라임’으로 유도하고, 매번 경제위기가 올 때마다 이 ‘서브프라임’을 사태의 원흉으로 몰고감으로써 자본의 질서는 훌륭하게 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제국주의 질서를 희생으로써 지탱해온 이들이 ‘서벌턴’이었다면, 21세기의 자본주의 질서를 희생으로써 지탱할 이들은 바로 ‘서브프라임’이라고 불러도 좋지 싶다.

 

글 박성호

 

* 편집자 덧붙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원작은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의 논픽션 <빅숏(Big Short)>이다. 마이클 루이스는 경제/경영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한 스포츠까지 굉장히 흥미롭게 풀어내는 논픽션의 대가다. 그는 소설보다도 흥미롭게 사실을 재구성한다. 이미 스탯과 확률에 근거해 구단을 운영하는 <머니볼(Moneyball)>과 감동적인 미식축구 선수 이야기인 <블라인드 사이드(The Blind Side)>를 통해서 책을 영화화 했을때도 끝내주는 작품이 된다는 성공사례를 남겼다. 

2016.02.0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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