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여 안녕, 은하철도 999

[컬처]by 인문잡지 글월
소년이여 안녕, 은하철도 999

고등학교를 다닐 때 저녁을 먹으러 잠시 집에 오면 TV에서는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를 하고 있었다. 명작 애니메이션으로 이름이 자자하고 철이와 메텔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에 자주 보곤 했지만, 마지막에 철이와 메텔이 헤어지는 것 말고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러다 거의 20년이 흘러서 우연히 은하철도 999 더빙판이 아닌 무삭제 자막판 은하철도 999 DVD를 발견하고 별 생각없이 질렀다. 가격이 몇 만원도 안했다. 받아보니 커다란 박스세트에 케이스 등도 상당히 신경써서 만든 티가 났다. 총 113화. 시간 날 때 천천히 보자는 생각에 첫 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편을 다 볼 때까지 1년이 넘게 걸렸다.


은하철도 999는 분명 TV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찬양할 마음은 없다. 장대한 스케일에 상당히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년물이라 유치한 점도 많고, 무엇보다 1978년 작품으로 지금 눈으로 보기에는 작화가 촌스럽다. 70년대 상식으로 생각해도 도저히 말도 안되는 설정이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데츠로(철이)와 메텔과 함께 여행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봤다.


줄거리를 아주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지구에서 엄마와 가난하게 살던 호시노 테츠로(철이)는 기계몸을 공짜로 준다는 행성 이야기를 듣고 은하철도를 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기계 백작의 인간 사냥에 걸려들어 엄마는 죽고 만다. 메텔이라는 신비로운 여인에게 구조된 테츠로는 메텔을 따라 은하철도 999를 타고 기계몸을 얻기 위해 떠난다. 테츠로는 은하철도 999가 역에 정차할 때 마다 새로운 사람들과 다양한 세상을 접하고, 차차 기계몸이 주는 무한한 생명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도착한 종착역에서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메텔은 또다른 소년을 데리고 은하철도 777을 타고, 테츠로는 지구로 향하면서 두 사람은 각자의 여행길에 오른다.


‘은하철도 999’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영원한 생명이다. 정차하는 행성마다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대립하는데 기계 인간이 보통 인간을 억압하거나, 부자가 가난한 자를 억압하거나,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억압하는 등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특히 기계 인간은 대부분 무한한 생명을 믿고 무슨 일이든 나중에 한다는 생각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남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주로 가난하고, 때로는 몸이 약한 젊은이들은 음악을 하거나 만화를 그리거나,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등 주로 예술 계통으로 자기 꿈을 꾸는 소년, 소녀의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테츠로는 그들을 보며 자신도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다지면서, 동시에 자신을 위해 희생한 엄마를 떠올린다. 데츠로는 꿈을 쫓아 살기 원하면서도, 엄마 몫까지 오래오래 살기 위해 기계몸을 얻고자 하는 목표도 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목표가 사실은 대립한다는 것을 여행을 하면서 깨닫게 된다. 꿈과 열정은 오직 유한한 생명을 지니고 따뜻한 피와 마음을 지닌 인간 만의 전유물이다. 영원히 살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아무런 제한이 없는 기계 인간의 삶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공허한 삶이다. 그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 쓸때 없는 전쟁을 벌이고, 살인을 하고, 타인을 억압하고, 자살까지 하는 기계 인간들이 있다. 다시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기계 인간의 영원한 후회는 어린 테츠로의 마음을 끊임 없이 흔들어 놓았다.


엄마 잃은 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애니메이션으로 영원한 삶이란 상당히 무거운 주제지만, 은하철도 999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연 메텔이라는 신비한 존재다. 러시아 사람이 쓸 법한 긴 모자와 온통 검은 외투, 허리까지 오는 금발과 긴 속눈썹, 큰 키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메텔은 미모와 지성, 마음씨까지 이 우주에 저런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만큼 매력적이다.


메텔과 테츠로의 관계는 여행이 지속될 수록 서서히 변한다. 초반부의 메텔은 완전한 테츠로의 보호자다. 그녀는 죽은 테츠로의 어머니를 대신하는 존재다. 테츠로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고, 위기에 빠진 테츠로를 번번히 구해준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테츠로에게 화를 내는 법도 없다.


그렇지만 뒤로 갈 수록 둘은 동반자가 되어 간다. 많은 일을 겪은 테츠로는 차차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시작하고, 자신의 주장을 편다. 위기에 빠진 메텔을 테츠로가 구하기도 하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언제나 나서서 도와주면서 메텔의 죄책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사실 메텔은 테츠로를 기계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목적을 가지고 처음부터 테츠로에게 접근했다. 그렇지만 갈수록 테츠로의 용기와 따뜻한 사랑 앞에 그를 기계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괴로워한다. 보호자로 시작해, 동반자로 변해가는 둘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게 아닌가 의심할만한 장면도 조금 나올 만큼 발전한다.


사실 메텔에게는 거대한 비밀이 있다. 메텔은 안드로메다 프로메슘 여왕의 외동딸이다. 프로메슘 여왕은 전 우주를 기계 생명으로 바꿔 모두가 영원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상에 사로잡혀, 메텔을 이용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할 소년들을 모아 기계인간으로 바꾸고 있었다. 테츠로는 그런 소년 중 하나였던 것이다. 테츠로는 그 중에서도 가장 특출난 소년이었다. 메텔이 입고 있는 검은 옷은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 자신에 의해 희생된 수 많은 생명을 기리고 잊지 않기 위한 수의인 셈이다. 메텔은 하록, 에스메랄다 등 우주 제일의 해적들과 뜻을 같이 해 어머니에게 반기를 들려 했지만 실패한 채 수많은 소년을 데리고 끝없는 여행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테츠로의 도움으로 프로메슘 여왕을 죽이고 안드로메다를 파괴했지만 메텔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위해 또다시 소년을 데리고 은하철도 777을 타고 떠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의지로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 테츠로에게 메텔이 더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테츠로는 이제 소년에서 어엿한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메텔의 마지막 키스는 자신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돌보아주었던 어머니이자,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메텔의 마지막 인사이자, 데츠로의 소년 시절을 마감하는 인사였다. 온 우주를 여행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는 법을 아름다운 메텔의 보호아래 경험한 테츠로는 이제 어른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메텔이 제시한 은하철도의 레일을 따라 여행할 수밖에 없었던 테츠로는 이제 자신의 의지로 지구로 돌아간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테츠로는 아마 소년기의 뜨거운 가슴을 간직한 어른이 될 것이다. 좁은 지구가 아니라 드넓은 우주 곳곳을 여행하고 죽을 위기를 수차례 겪으면서도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이고,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수많은 불의에 저항했기 때문이고, 꿈과 사랑을 품고 사는 다른 이의 고통에 함께 울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만 그 여행을 함께 해 준 메텔이 떠난 것 뿐이다. 그 이별이 다른 무엇보다 가슴이 아프지만 이별 역시 성장의 한 부분이다.


메텔은 아마 은하철도 999를 보며 우주에 대한 꿈을 키웠던 모든 소년들의 어머니요, 친구요, 연인이었을 것이다. 그 때의 소년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인간은 모두 행복을 쫓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은하철도 999의 노래처럼 자기만의 파랑새를 찾았을까. 이 세상은 과연 은하철도 999의 세상처럼 온갖 불의와 억압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저 숨죽이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까.


테츠로는 세상을 깨닫고 자기 의지로 서게 되었을 때 소년 시절과 이별했다. 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세상을 깨닫고 자기 의지로 서기 위해 소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일본 경제가 한창 호황을 달리던 70년대, 80년대 우주를 꿈꾸고 영원한 생명을 꿈꾸던 때는 저물었고, 이제는 저성장 시대에 하루하루 삶을 위해 다투어야 하는 21세기이기 때문이다. 우주와 더 한층 가까워진 시대건만 우리의 마음은 우주와 한층 더 멀어지고 있다. 은하철도 999는 시대의 아이러니와 묘하게 공명하고 있지 않은가.


글 박성표

2016.07.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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