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카뮈

[컬처]by 인문잡지 글월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불멸의 신념으로 산다는 것

페스트, 카뮈

주님의 날이 마치 밤 중의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태평세월을 노래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해산할 여자에게 닥치는 진통과 같아서 결코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 <데살로니카 전서 5장 2절~3절>

비극의 시작은 사실 거대하지 않다. [페스트]에서도 그 비극의 시작은 단순히 진료실 앞 계단참 한복판에 죽어있던 쥐를 발견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시작이 어찌 되었던 비극은 곧 거대한 힘을 얻게 되고, 그 힘으로 운명의 목줄기를 휘어잡아 끌고 가기 시작한다.

 

사실 그 비극의 근원은 단순하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간명한 문장, 누구나 다 알고 있듯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사실 죽음의 방식과 시기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즉 사실 질병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주는 의미는 그렇게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작품 내에서 오랑 시민들은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미쳐간다. 사실 그 이유는 자신이 어떻게 죽을 지에 대한 문제보다는, 자신과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그 체제 자체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갑작스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그 ‘죽음’ 앞에서 새삼 그 관계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먼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설령 페스트가 죽음이든 죽음이 아니든 환자와 비 환자를 영원히 갈라놓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들은 차라리 페스트 옆에서 생활하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 자신 혹은 타인의 죽음으로 인해 관계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며, 이러한 비극이 사실 기존의 체제를 대신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오랑 시를 지배한다. 처음에는 전염병이 곧 끝날 것이라는 생각 하에 과거를 추억했지만, 그 미래조차 질병에게 저당 잡힌 이후에는 그들은 그 ‘기억력’조차 상실해버린 채 ‘페스트의 질서’ 속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들은 설령 아직은 체념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그 질서에 잠정적으로 동의를 해버린 것이다.

 

사실 ‘Pre-페스트 체제’가 그러했듯이, 이 ‘페스트’ 체제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처음에는 저항했으되 그 체제가 어느 정도 지속되고 공고해졌다고 믿자 체제에 저항하는 것을 점차 포기하게 된다. 체제에 순응한 이들에게 ‘준비되어야 할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고, 미치거나 돈을 펑펑 쓰는 등의 모습만을 보이게 된다.

 

오랑 시민의 대부분은 그러하되, [페스트] 속 주요 인물들의 모습은 일반 사람들과는 조금씩 다르다. 그들에게도 [페스트]는 다른 시민과 마찬가지로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 나름의 신념, 혹은 사랑을 관철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게 된다.

리유: 결국 패배할지라도 현재와 거기에서 이어지는 미래를 보고자 하는 자

의사인 리유는 소설의 주인공이자 서술자로, 해당 사건의 처음부터 끝을 모두 다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경험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그저 단순한 이유 – 인류를 구원하겠다라는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닌 – 인 가난으로 인해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했지만,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일개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겸손’을 배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거대한 ‘진실’ 앞에서 그는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그는 일시적인 승리는 가능할지언정 영구적인 승리는 불가능한 방식을 택한다. 그들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대신, 죽음과 ‘투쟁’하는 방식을 택한다. 즉 의사의 소임을 다함으로써 그는 죽음에 끊임없이 ‘반항’한다. 결코 결정적인 승리는 거둘 수 없을지언정, 설령 신이 있더라도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죽음에 맞서 투쟁하기를’ 더 바랄지도 모른다는 신념을 가지고 활동한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곧 타루의 ‘신이 없는 시대의 성인’ 이야기로도 이어진다. 신이 없는 시대의 성인이 되고자 하는 타루의 이상은, 곧 리유의 ‘인간이 되는 것’과 동일하다고 정리된다. 만약 이러한 것이 동일하게 된다면, 신념을 관철하는 이들은 타루의 관점에서는 ‘성인’이되 리유에게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 되어 버린다. 즉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리유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불멸의 신념을 가지고 이를 관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든 신념을 가지고 이를 관철하고자 하면 ‘성인’이자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파늘루: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인간과 세상마저 저버린 자

사실 작품 내에서 신념을 가지고 이를 관철했던 이로는 파늘루 신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신에 대한 강렬한 신앙을 가진 것은 물론, 그 신앙만큼이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도 ‘페스트’는 단순한 시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특히 어린아이의 죽음은 그의 신념을 크게 휘저은 사건이기도 했다.

 

그의 처음 주장대로 페스트가 ‘신벌’이라면, 아직 무구한 어린이는 왜 그 벌을 받아야 하며, 왜 그 렇게 비참하게 죽었어야 했나? 페스트가 던진 질문에 신부는 고뇌한다. 이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 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지요.” 라며 신의 섭리를 옹호한다.

 

이러한 옹호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파늘루 신부는 “기독교인은 신의 뜻이라면 이해할 수 없더라도 자신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해하지만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라고는 할 수 없다.”며 절대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주장하기 시작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의 치료를 거부한다. 한때는 함께 일했던 친구 리유가 곁을 지키겠다고 했음에도, “성직자에게는 친구가 없다”라며 십자가를 쥐고 최후를 맞이한다.

코타르: 자신의 과거와 즐겁게 이별하고자 했던 이

이 작품에서 코타르는 가장 기묘한 인물 중 하나이다. 모두가 즐거워하던 Pre-페스트 시대에는 죄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다가, 페스트 시대에는 그 누구보다도 활발하고 즐겁게 생활하더니, Post-페스트 시대가 다가오자 절망에 빠져 결국 총격전을 벌인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철저한 현실 쾌락주의자로 보인다. “저들의 이야기가 들리시지요? 페스트가 끝나면 나는 이런 걸 할거라든지, 페스트가 지나면 나는 저런 걸 할거라든지 말입니다. 그들은 잠자코 있지 못하고 인생을 망치고 있어요. 게다가 가지고 있는 특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체포되고 나면 나는 이런 걸 할거야.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체포는 하나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고요.”라는 말에서 이러한 뜻이 엿보인다. 실제 페스트 시기에서 그는 공포에 질린 이들 가운데서 현실을 즐기려는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관철 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사실 코타르야말로 무엇보다 시대에 가장 쉽게 휩쓸린 인물 중 하나였다. 그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는 잘 나와있지 않지만, 그는 결국 페스트 시대, 즉 법률이 멈추고 페스트라는 신질서가 자리잡은 시대에서만 허락 받은 이였다. 그에게 페스트는 현실이라기보다는 ‘꿈’에 더 가까운 시기였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페스트 강점 시기의 끝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시기에도 그는 그 시대의 종료를 두려워했고, 실제 그 시대의 종말이 다가오자 누구보다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리고 결국 페스트 시대가 끝나자,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결국 저항 끝에 체포되고 만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서 과거를 잊고 잘살아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이를 위한 행동보다는 쾌락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결국 스스로를 몰락시키고 말았다. 실제 그가 과거를 정말로 씻고 싶었다면 막대한 권력이 있던 그 페스트 시대에 다른 곳으로 탈출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다.

 

사실 그 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하고, 오랑 시민들 또한 소설 속에 등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랑 시민은 결국 체제의 흐름 속에 만족하다가, 당황하고, 소중한 것을 깨닫고, 하지만 결국 체제의 억압에 이기지 못한 채 그 소중함을 다시 잃어버리고, 다시 적응하고 만족해버린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물러간 페스트 체제에 대해 의심하면서도 다시 기뻐한다. 그러나 어떤 체제든 영원하지는 않다. 기쁨의 시대는 언제 또 다시 절망의 시대로 돌변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리유는 “인간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라는 생각을 마지막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이를 관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리유가 그랬고 파늘루 신부가 다른 의미로 그랬으며 코타르는 기회를 놓친 이유처럼,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지 않고 생활하는 이들에게 다가오는 미래는 결국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암흑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그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 

– <데살로니카 전서 5장 4절~6절>

글 AC

편집 박성표 

2017.01.0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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