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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밴드부의 원형은 ‘군악대’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있었다!

by예스24 채널예스

밴드부의 기원

일제 강점기를 거친 노인들은 대부분 행진곡을 좋아한다. 아주 모순된 감정이다. 한편으로는 유년기의 아름다운 추억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시절의 쓰라린 기억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내가 교토에서 그림 공부를 할 때 아버지가 방문하셨다. 교토 외곽 아라시야마(嵐山)로 단풍 구경을 갔다. 단풍철이 되면 일본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내가 다녔던 미술 대학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단풍 명소로 이름만 듣던 곳을 실제로 와본다며 아버지는 매우 즐거워하셨다. 일본 사람들과 일어로 대화하면, 이북에서 지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하셨다. 식민지 시절의 아픈 기억과 유년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이 동시에 떠오른다는 것은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정신분열적 상태와 같다. 그러나 이런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우리 아버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 교련복을 입고 월요일 조회 때마다 군대식 제식 동작을 취하며, 군대식 사열과 분열을 해야 했던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의 즐거운 추억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연관되어 있다. ‘교련’이라는 이름의 군사 훈련도 그중 하나다. 어쩌면 가장 강력했던 기억일 것이다.

 

십 대 소년들에게 교련복을 입히고 군사 훈련을 시키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 일제 군국주의의 잔재가 해방 후에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제식훈련은 단순한 ‘단체 훈련’이 아니다.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의 내면화’다. 한번 교육받은 집단적 규율에 대한 맹목적 순종은 평생토록 지속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비웃는 ‘대한민국 개저씨들’의 구체적 내용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와 관련된다는 것이 내 문화심리학적 가설이다.

 

인켈 오디오가 처음 집에 들어온 날, 내 아버지는 행진곡을 트셨다. 그 후로도 기분이 좋으시면 행진곡을 자주 트시곤 했다. 아흔이 가까운 지금도 여전히 그러신다. 내 또래 사내들도 행진곡에 아주 익숙하다. 고교 시절 조회 시간에는 항상 ‘밴드부’가 행진곡을 연주했다. 그 당시 밴드부는 아주 특별한 조직이었다. 학교 행사뿐 아니라 온갖 지역 행사에 동원되었다. 수업 시간 열외는 당연했다. 누군가 스포츠 경기에서 메달을 따거나 콩쿠르에서 상을 타면 서울 시내에서는 카퍼레이드가 열렸고, 각 학교의 밴드부는 빠짐없이 그곳에 동원되었다. 내 고등학교 시절에는 말죽거리 은광여고 밴드부가 특히 유명했다. 서울 시내 거의 모든 공식 행사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70년대 고등학교 밴드부의 행진 모습. 60~70년대 거의 모든 고등학교에는 밴드부가 있었다. 한국의 아저씨들에게 밴드부의 ‘행진곡’과 교련복의 ‘제식훈련’에 대한 기억에는 반드시 ‘폭력’의 경험이 동반된다. 아주 독특한 한국적 형태의 ‘비자발적 기억(involuntary memory)’이다. 밴드부가 한결같이 폭력적이었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제식훈련 자체가 제도화된 폭력이기 때문이다.

밴드부의 폭력성은 유명했다. 거의 모든 고등학교가 그랬다. 선배들의 ‘군기(軍紀) 잡기’가 특별히 엄격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들에게 군기라는 용어가 도대체 어떻게 당연하게 여겨지게 된 것일까? 밴드부의 원형이 ‘군악대’이기 때문이다. 군대의 군악대에서 시작한 밴드부이니 군기라는 용어 사용도 맥락에서 그리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서양의 관악기는 군악대를 통해 한반도에 도입되었다. 군악대나 밴드부는 주로 관악기를 연주한다. 클라리넷, 트럼본, 섹소폰과 같은 관악기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악기다. ‘바람’을 불어넣기에 영어로는 ‘wind instrument’라고 하고, 독어로는 ‘불어넣다’는 뜻의 ‘blasen’이 들어가 ‘Blasinstrument’라고 한다.

 

관악기가 제대로 구색을 갖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01년이다.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가 52대의 관악기와 타악기를 들고 한반도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러시아 군사 교관들을 통해 일부 관악기가 소개되고, 제한적이나마 음악 교육이 이뤄졌으나 악단 편성을 위한 관악기가 들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한스 알렉산더 크나이더, 『프란츠 에케르트』 , 연암서가).

 

프로이센 해군 군악대 출신의 프란츠 에케르트는 1900년 12월에 설치된 대한제국 군악대의 지휘관으로 초빙 받았다. 고종 황제는 프로이센식 군악대를 원했다. 조선보다 훨씬 앞서 설치된 일본의 군악대가 프로이센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당시 조선은 앞서 진행된 일본의 서구화를 참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종 황제는 프로이센 군악대의 위용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1899년 프로이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왕자(Albert Wilhelm Heinrich, 1862~1929)가 독일 기함 도이칠란트(Deutschland) 호를 타고 제물포에 왔다. 하인리히 왕자는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의 조카이자,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황제인 빌헬름 2세의 동생이다. 하인리히 왕자 일행은 해군 군악대를 동반하고 한성으로 올라와 고종 황제를 알현했다. 이때 시범 공연한 독일 해군 군악대는 고종을 비롯한 궁정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종은 이듬해에 대한제국 군악대를 창설하고, 독일 영사관에 이 군악대를 지도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독일 영사관은 이미 일본에서 20년가량 머물렀던 경험이 있는 프란츠 에케르트를 추천했다. 이렇게 프란츠 에케르트는 한반도에 오게 된 것이다.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프로이센 해군 군악대 출신의 프란츠 에케르트는 1901년 52대의 관악기와 타악기를 가지고 한반도에 들어왔다. 에케르트는 일본의 기미가요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애국가도 작곡했다.

흥미롭게도 일본의 군악대를 프로이센식으로 만든 사람도 바로 프란츠 에케르트다. 일본은 1884년 육군사관학교에 군악대를 설치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일본 육군은 초기 프랑스식 제도를 따랐다. 군악대도 프랑스인이 지도했다. 그러나 1890년부터는 프란츠 에케르트가 일본 군악대를 맡게 된다. 에케르트는 이미 1879년부터 일본 해군 군악대를 맡고 있었다. 초기의 일본 해군 군악대는 영국 군악대를 모방했으나 에케르트가 맡으면서 프로이센식으로 바뀌었다. 일본 해군과 육군의 군악대를 모두 에케르트가 지도하게 된 것이다.

 

일본 군악대가 프로이센을 모방한 까닭은 1884년 오야마 육군경 일행이 독일 제국 군대의 훈련을 참관한 이후의 일이다. 일본군 참관단 일행은 독일군 참모본부의 전략, 전술뿐만 아니라 독일군의 절도 있는 동작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독일군의 일사불란한 동작에 동반되는 군악대의 연주 또한 일본군 참관단에게는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다. 야콥 멕켈이 제식훈련과 더불어 프로이센식 참모본부 제도를 일본에 이식했다면, 프란츠 에케르트는 프로이센식 군악대를 일본에 도입했던 것이다. 군악대와 관련하여 모방의 대상을 영국과 프랑스에서 독일로 바꾸게 된 것은 서양 고전음악의 전통이 독일에 있다는 생각이 일본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프란츠 에케르트가 ‘대한제국 애국가(大韓帝國 愛國歌)’는 물론, 일본의 ‘기미가요(君が代)’를 작곡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기미가요는 1870년 처음 만들어졌다. 가사는 오야마 이와오가 일본들에게 익숙한 단가(短歌)에서 가져왔다. 이 단가는 ‘기미가요와(君が代は)’로 시작한다. 오야마 아와오는 후에 육군경이 되어 독일 군대의 훈련을 참관하게 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처음 작곡은 에케르트에 앞서 일본 해군 군악대를 지도하고 있었던 존 윌리엄 펜턴(John William Fenton, 1828~1890)이 했으나 일본 관료들은 탐탁지 않아 했다. 펜턴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에케르트가 임명되자 그에게 기미가요를 다시 작곡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 결과 1888년 일본 전통 멜로디에 기초한 에케르트의 기미가요가 발표된다.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프란츠 에케르트가 일본 전통 멜로디에 기초해 1888년 작곡한 일본 국가 기미가요의 표지. 기미가요의 가사는 프로이센의 참모제도를 일본에 도입했던 오야마 이와오(大山巖)가 일본인 모두에게 익숙한 단가를 변형해서 만들었다.

20년 동안 일본 군악대를 지휘하며 일본에 서양 음악을 소개한 에케르트는 1899년 독일로 돌아간다. 그러나 1901년 이제 막 시작하는 대한제국 군악대를 지도하기 위해 에케르트는 동아시아로 다시 돌아온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군악대의 지도와 더불어 대한제국의 국가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일본에서처럼 에케르트는 한국 전통민요의 멜로디를 따와 ‘대한제국 애국가(大韓帝國 愛國歌)’를 만든다. 1902년 그의 애국가는 독일에서 인쇄되어 다른 나라에 배포된다. 에케르트의 애국가는 1910년 한일합병이 될 때까지 대한제국의 공식 국가로 사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대한민국 국가가 되었다. 지금도 유튜브에 ‘에케르트’와 ‘애국가’를 함께 검색하면 그가 작곡한 애국가를 들을 수 있다.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1902년,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 표지. 유튜브에 들어가 ‘에케르트’, ‘애국가’로 검색하면 그가 작곡한 애국가를 들어볼 수 있다.

1900년에 세워진 대한제국의 ‘황실군악대’는 다양한 활동을 하며 서양 음악을 한반도에 소개했다. 사람들은 관악기와 타악기로 연주되는 서양 음악에 열광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군대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에케르트가 이끄는 황실군악대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황실군악대는 ‘제실군악대(帝室軍樂隊)’로 축소되었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로 개명되었다. ‘이왕직(李王職)’이란 ‘이씨(李氏)’ 왕가 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기구를 뜻한다. 대한제국이 사라지고, 황제의 직위는 ‘왕(王)’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이왕직(李王職)은 일본 황실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성(宮內省)’에 소속된 기관이었다.

 

이왕직양악대의 운명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무엇보다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에케르트의 위치가 불안해졌다. 그의 독일 국적 때문이었다. 일본이 연합국 진영에 서면서 독일과 일본은 적대국이 되었다. 에케르트에 대한 공식적 지원이 불가능해지면서 이왕직양악대는 1915년 공식 해산된다. 그러나 몇몇 단원들은 이왕직양악대 이름으로 그 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활동했다. 1919년 이후, 악대 단원들은 악단 이름을 ‘경성악대(京城樂隊)’라고 바꾸고 민간 악단의 형태로 1930년까지 활동한다. 에케르트와 더불어 이 모든 변화 과정을 주도한 한국인은 백우용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도 서양 음악과 한국 전통음악의 접점을 찾는 노력을 계속한다.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1900년대 초반, 파고다 공원에서 기념 촬영한 에케르트와 양악대원들. 가운데 모자를 쓴 양복 차림의 사람이 에케르트다. 그의 곁에 서 있는 이는 1930년대까지 양악대의 명맥을 이어간 백우용이다.

일본의 경우, 군국주의가 득세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프로이센식 군복을 입히고, 군대식 제식동작을 교육하기 시작한다. 이때 군악대와 같은 학생들의 악단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제식훈련에 행진곡과 같은 음악이 동반되면 군인들, 혹은 학생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까닭이다.

 

일본에서 학생들의 악단은 활동 영역에 따라 ‘브라스밴도(ブラスバンド)’, ‘마칭 밴도(marching band)’, ‘취주악대(吹奏?隊)’, ‘고적대(鼓笛隊)’와 같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게 된다. 대학교나 고등학교의 스포츠 경기에 응원단으로 참여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 영역이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학교에도 이 같은 군악대의 일본식 응용은 그대로 접목되어 한국 중년 사내들의 뇌리에 ‘밴드부’라는 기억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행진곡의 기원

군악대의 주된 업무는 제식훈련에 동반되는 군대 음악, 즉 행진곡 연주였다. 물론 집단적 행동의 흥을 돋우는 음악 형식인 행진곡은 고대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군악대가 연주하는 행진곡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6~17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유럽 기독교국가들 사이에 있었던 전쟁부터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군대는 유럽 군대와는 달리 ‘메흐테르(Mehter)’라는 군악대를 가지고 있었다. 메흐테르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보병 상비군인 ‘야니차렌(Janitscharen, 영어로는 예니체리(Janissary)라고 한다)’에 소속된 군악대였다. 야니차렌은 ‘새로운 군대’를 뜻한다. 유목민들의 집합체였던 초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군대는 주로 말을 타고 전쟁하는 기병(騎兵)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보병이 없는 군대는 고지에 깃발을 꽂을 수 없다. 들판에서 말 달리며 전쟁을 하기에는 매우 유리하지만, 성벽을 타고 올라가 성을 점령하는 전쟁은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보병들로 이뤄진 군대를 ‘새로운 군대’, 즉 ‘야니차렌’이라 불렀던 것이다. 보병 부대 야니차렌은 활을 주 무기로 하고, 칼과 도끼로도 무장했다. 승리가 계속되면서 야니차렌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정예부대로 인정받았고,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악마의 부대’라는 악명도 얻게 된다.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오스만투르크 보병 부대 야니차렌(Janitscharen)의 군악대 메흐테르(Mehter). 오스만투르크 군대는 유럽 군대와는 달리 메흐테르(Mehter)라는 군악대를 가지고 있었다. 보병 부대는 절도 있게 행진하고, 과감하게 공격해야 한다. 군악대는 보병 부대의 사기진작에 필수적이다.

야니차렌이 유럽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야니차렌에서 운영했던 군악대 메흐테르 때문이다. 공격이나 퇴각의 신호로만 악기를 사용했던 유럽 군대들과는 달리 야니차렌의 메흐테르는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악기를 연주했다. 멜로디를 연주하는 관악기, 북과 심벌즈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타악기로 구성된 메흐테르는 술탄의 의전행사나 병사들의 행진에서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도 연주했다. ‘돌격 행진곡’과 같은 음악이다. 야니차렌의 용맹함에 질린 적군들에게 야니차렌의 행진곡은 공포의 심리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음악을 무기로 삼았던 메흐테르를 ‘최초의 군악대’로 간주하는 것이다. 지금도 터키의 관광지에서는 야니차렌의 행진곡을 수시로 들을 수 있다.

 

야니차렌은 당시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야니차렌무지크(Janitscharenmusik)’이다. 야니차렌무지크의 특징은 ‘빠른 템포’다.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던 야니차렌의 관악기, 타악기가 야니차렌무지크란 이름으로 유럽의 주류 음악이 된 것이다. 야니차렌무지크는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을 가장 험하게 경험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오스트리아 빈의 많은 음악가들이 오스만투르크의 음악을 차용해 작곡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음악들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유튜브 등에서 검색해 들어보면 바로 ‘아, 이거!’ 하게 된다. 이렇게 ‘군대 음악’은 ‘근대 음악’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다).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도피(Die Entfuhrung aus dem Serail)>나 흔히 <터키행진곡(Alla Turca)>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11번(Klaviersonate Nr. 11)> 3악장이 대표적이다. <터키협주곡>이라고도 불리는 모차르트의 <바이올린협주곡 제5번(Violinkonzerts Nr. 5)> 또한 전형적인 야니차렌무지크로 여겨진다. 이름 자체가 <군대교향곡(Militarsinfonie)>인 하이든의 <교향곡 100번(Sinfonie Nr. 100)>은 터키 음악을 중간중간 삽입해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이든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 음악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음악에 수용했다. 베토벤은 <아테네의 폐허(Die Ruinen von Athen)>라는 연극의 ‘부수음악(附隨音樂, Inzidentalmusik)’으로 터키행진곡 주제를 썼다. 아울러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Variationen fur Klavier)>에도 터키행진곡 주제가 들어간다.

 

군악대에서 연주하는 행진곡은 크게 ‘보병용 행진곡’과 ‘기병용 행진곡’으로 구분된다. 보병용 행진곡은 대부분 4/4박자다. 한국 군대의 대표적 군가인 <진짜 사나이>도 4/4박자다. 행군의 보폭과 리듬에 가장 적당한 박자이기 때문이다. 3/4박자는 주로 왈츠와 같은 춤곡에 쓰인다. 마지막 박자가 딱 끊어지지 않고, 슬그머니 말려들어가기 때문이다. 군가가 3/4박자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말의 동작에 맞춰야 하는 기병용 행진곡은 주로 6/8박자였다. 인간에 비해 네 발로 걷는 말의 보폭과 리듬은 훨씬 리드미컬하기 때문이다. 기병대가 사라진 요즘에는 6/8박자의 기병용 행진곡은 거의 듣기 어렵다.

 

행진곡은 프로이센이 작은 영주국가에서 유럽 동북부의 강력한 군사국가로 발전하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Be)’이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 1712~1786) 때부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프랑스에 나폴레옹이 있다면, 독일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있다고 독일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만큼 독일 역사에서 중요한 왕이다.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Sanssouci) 궁전이 그의 여름 궁전이다.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helm I. , 1688~1740)는 ‘군인 왕(Soldatenkonig)’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히 호전적이었다. 왕궁의 정원을 연병장으로 바꾸고, 병사들의 제식훈련을 지켜보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을 정도로 ‘열병 마니아’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도 강한 군인으로 키우려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섬세하고 심약했다. 프로이센의 건조한 군대풍의 문화를 싫어해서 주로 프랑스 옷을 입고, 프랑스 소설을 읽었다. 플루트를 즐겨 연주하는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이런 아들이 몹시 못마땅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을 구타하기도 하고, 연병장에 사열한 군인들 앞으로 아들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다니기도 했다. 아버지의 엄한 교육을 견디지 못한 프리드리히 2세는 친구 한스 헤르만 폰 카테(Hans Hermann von Katte, 1704~1730)와 프랑스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카테는 프리드리히 2세보다 8살이나 많았으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는 친구였다. 그러나 탈출은 실패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아들의 눈앞에서 친구 카테의 목을 칼로 쳤다. 이 사건은 프리드리히 2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의 성격과 태도는 급변한다. 누구보다도 강한 군인으로 변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평생 전쟁광으로 살았다. 여자도 멀리했다. 형식적인 결혼은 했지만 자식은 없었다. 동성애자라는 설도 있고, 성적으로 불구였다는 설도 있다.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였다. 자비로운 군주가 되려고도 애썼다. 오늘날 독일인들이 감자를 주식으로 먹게 된 것도 바로 프리드리히 2세의 공이다. 당시 굶주림에 시달리던 독일인들에게 프리드리히 2세는 감자를 심을 것을 명령했다. 구황작물로서 감자가 지닌 효과를 먼저 알았던 것이다.

 

음악은 평생토록 좋아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바흐의 둘째 아들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를 궁정악단 연주자로 채용했다. 라이프치히에 살던 아버지 바흐는 아들을 보기 위해 두 차례 베를린을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에서 바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제시한 주제를 가지고 즉흥적 푸가 연주를 했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바흐는 그 푸가 연주를 다듬어 『음악의 헌정(Musicalisches Opfer)』이란 제목으로 출판했다.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Be)으로 불리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절도와 규율로 훈련되고,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는 ‘독일 병정’의 이미지는 프리드리히 2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제식훈련과 행진곡의 기막힌 조화도 이때부터다.

프리드리히 2세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독일의 다른 제후국으로부터 무시당하던 변방의 작은 프로이센을 북부 유럽의 중심국가로 키워나갔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엄한 규율로 훈련시켰다. 아버지의 군대보다도 더욱 절도 있는 행진을 하도록 병사들을 단련시켰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조직적 움직임에 잘 훈련된 그의 군대는 빠르고 확실하게 이동했다. 적의 약점을 기습 공격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네덜란드 마우리츠가 개발한 제식훈련이 이렇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 이르러 제대로 활용되어 꽃피우게 된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연전연승했다. 프로이센의 영토는 급격히 넓어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은 훗날 독일 군국주의의 토대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프리드리히 2세의 공세적 프로이센 군대는 ‘독일 병정’의 전형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독일인들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무모하게 일으킨 것은 프리드리히 2세의 전설에 도취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독일에서 군악대가 자리 잡은 것은 바로 이 프리드리히 2세 때부터다.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는 절도 있고 통일적인 집단행동을 위해 제식훈련을 반복했다. 군악대의 음악은 아주 훌륭한 동반자였다. 병사들이 동일한 보폭을 유지하며 행진할 수 있도록 타악기를 이용한 행진곡이 다양한 형태로 개발되었다. 유럽에서 큰북, 작은북, 트라이앵글, 심벌즈, 금관악기, 목관악기, 등이 군악대의 정식 악기로 포함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군악대의 프로이센식 적용이라 할 수 있다.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1891년 당시의 독일제국 보병의 군악대. 일본의 오야마 육군경 일행이 그토록 감동한 독일제국 군대의 위용은 보병들의 절도 있는 행진에 있었다. 일본 육군은 프로이센 군대의 참모제도와 제식 동작, 그리고 군악대를 곧바로 적용한다. 60~70년대 한국의 교련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시작한 제식훈련과 행진곡의 교집합은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으로 완성된다. 1884년에 독일제국 군대의 훈련에 참관한 오야마 육군경 일행이 그토록 감동했던 것은 바로 이 제식훈련과 행진곡이 함께할 때 작용하는 강렬한 ‘군대 효과’였다. 이 군대 효과가 오늘날 한국 중년 사내들의 고교 시절, 교련복과 밴드부의 추억에 여전히 내재해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사회에서는 나치독일이 가능했던 이유에 관해 다양한 영역에서 처절한 반성을 했다. 그중 하나가 ‘집단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에 대한 반성이다. 배타적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나치의 가장 강력한 전략이 군사 퍼레이드와 같은 통일된 집단행동이었다. 수십 만의 인파가 광장에 모여 ‘하일 히틀러(Heil Hitler)’를 외치며 ‘히틀러경례(HitlergruB)’를 하는 모습은 독일 나치즘을 말할 때 누구나 떠올리는 장면이다. 이 같은 집단행동에 참여하면, 각 개인은 그 어떠한 반성적 능력도 상실하게 된다. 이때 행진곡과 같은 음악의 작용은 결정적이다. 그 어떤 마취제나 마약보다 더 치명적이다.

한때 고등학교에는 죄다 ‘밴드부’가

‘히틀러경례(Hitlergru?)’. 나치독일은 군대에서만 사용하던 제식훈련과 행진곡을 일반 국민들에게 아주 적절하게 응용했다. 히틀러경례와 더불어 진행되는 군대식 사열과 행진은 마취제처럼 작용했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라는 집단의식 앞에 모든 비판의식은 마비되었다. 모든 종류의 집단행동은 합리적 사유의 경계선을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언제나 그렇다.

전후 독일에서는 집단적 행위에 대한 알레르기와 같은 반응이 생겨난다. 모든 종류의 집단행동을 젊은이들이 거부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졸업식 같은 행사도 대부분의 대학에서 사라진다. 집단적으로 모여 총장의 축사와 시장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의 격려사를 듣고, 노래를 부르는 행사는 언제든 위험한 ‘집단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공식행사에서 함께 노래하는 제창도 사라진다. 나치 시대의 제창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제창 대신 리코더 합주와 같은 ‘착한 음악’이 추천되었다.

 

오늘날 독일에서 금관악기로 연주하는 민속음악은 그래도 살아남아 있다. 진보적 성향의 북부 독일과는 달리 보수적인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와 같은 축제에서 사람들이 함께 노래하는 이른바 ‘떼창’도 자주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모든 종류의 집단행동은 합리적 사유의 경계선을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글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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