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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뷰티와 패션 사이,
욕망의 카테고리 ‘향수’

by예스24 채널예스

뷰티와 패션 사이, 욕망의 카테고리

끌로에 플레르드퍼퓸

“나는 파리에 향수공무원이 사는 줄 알았어요!”

 

오래 전 남성복 브랜드 카루소의 장광효 디자이너와의 인터뷰 때 들었던 말이다. 1970년대, 20대 패션학도였던 그에게 파리의 첫인상은 바로 샤넬 No.5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와서 만난 샹제리제 거리에 세련된 향기가 온통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있었더라는 것. 아마도 공항에 도착하자 맡은 향, 상점에서 나는 향이 거리에서도 계속 지속된다는 착각이었으리라.

 

당시 시각적으로도 별로 훌륭하게 생각되지 않던 서울의 거리를 떠올리면 여러 가지 빈곤한 냄새가 연상되었을 때였다. 그는 ‘오, 파리는 굴뚝청소부나, 환경미화원처럼 모두가 잠든 밤에 공무원이 나와서 거리에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구나.’ 하는 착각까지 했었다고 한다. 여행 경비가 넉넉하지 않았던 패션학도는 쁘렝땅백화점 1층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샤넬 향수를 샀다. 가슴에 꼭 품고 서울까지 돌아와서 파리가 그리울 때면 향을 맡으며 다양한 영감을 받았고 그 후 파리컬렉션에도 진출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결말이다. 마치 산타처럼, 모두가 잠든 밤에 거리에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그림자노동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렇다. 향수는 한때 사치품이었다. 90년대 중반, 한 여대 앞에 '채러티'라는 향수매장이 있었다. 정품을 팔기도 했지만 10ml 단위의 작은 휴대용기에 덜어서 팔기 때문에 향수 한 병을 살만큼 목돈(?)이 없거나, 막 입문하는 뷰티 새내기들의 오아시스이자 참새방앗간이었다. 그때 나에게 퍼스트 향수로 다가온 것이 친구가 채러티에서 생일선물로 사준 랄프로렌의 ‘로렌’이다. 후에 출시된 경쾌하고 캐주얼한 느낌의 ‘랄프’보다 훨씬 우아하고 은은한 향으로 기억한다.

 

누군가의 출장 길에 선물로 건넨 향수 중 하나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절, 자신이 좋아하는 향수를 사서 쓴다는 것이 럭셔리함의 표상이 되었고, 이것은 트렌드가 되었다. 랑콤의 트레졸, 캘빈클라인의 이터니티, 겐조키의 로빠겐조, 디올의 뿌와종 등이 국민향수로 급부상하면서 뷰티 브랜드의 향수들이 꽤 많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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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랑 라 쁘띠 로브 느와르 오 드 뚜왈렛

"향초? 무슨 양초가 이렇게 비싸? 제사 때 쓰는 양초 값의 거의 100배네!"

 

2008년 국내 론칭한 대표적인 니치 향수 브랜드 딥티크 매장 오픈 첫날 방문한 고객들의 투덜거림이었다. 유명 디자인학교인 에꼴 드 보자르의 동창 세 명이 1961년 론칭한 딥티크는 자연의 싱싱함과 순수함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고급 향수와 향초로 유명하다. 고급 향 에센셜(농축액)과 깔끔한 흰색 포장, 클래식하면서도 감각적인 로고로 국내에서 금세 큰 인기를 끌었고, 센스 있는 선물아이템으로 급부상했다. 여기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끈 '조말론런던'이 국내에 들어오고, '천재 조향사'라 불리는 프란시스 커정의 '메종 프란시스 커정',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자신의 이름을 따 론칭한 '세르주 루텐 파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향사 프레데릭 말이 12명의 조향사와 '향수를 만들어내는 출판사'라는 의미를 담아 론칭한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 용기에 이름을 새겨주는 인그레이빙 서비스로 유명한 '아틀리에 코롱', 스톡홀름 출신의 디자이너 벤고헴이 론칭한 '바이레도' 등이 줄줄이 인기를 끌어 니치 향수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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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 1803 매장

수많은 국가대표 급 니치 향수 브랜드 속에서 요즘 인스타그램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브랜드는 바로 프랑스에서 온 불리 1803. ‘불리매장에 가면 영혼이 먼저 털리고, 그 다음 지갑이 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불리 1803은 19세기에 프랑스 귀족들에게 인기 있었던 약국 '장 뱅상 불리 파머시'의 화장품 레시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론칭한 브랜드다. 파리의 고급 앤티크숍을 연상케 하는 청담동 매장에 들어서면 “시향을 도와드릴까요?” 라는 말과 함께 환상의 시간이 시작된다. 야생 이끼의 향을 담은 ‘불리 1803’의 대표적인 향인 ‘리켄 데코스’를 비롯해 총 8가지 향수와 바디 제품이 함께 구성되어 있는 오트리쁠 라인을 차례로 시향하다 보면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시향했다고 반드시 구매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더욱 그 시간이 기쁠 뿐! 최근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도 매장을 오픈했다니 꼭 한번 들러볼 만하다.

 

이제, 향수는 뷰티의 한 영역이 아닌 패션과 뷰티의 경계에 묘하게 겹치는 카테고리로 자리 잡았다. SNS에 패션 아이템만큼이나 볼거리로 등장하고, 소장한 것으로 뿌듯함을 준다는 점에서 향수는 패션아이템과 일맥상통한다. 드레스의 허리띠나 쁘띠스카프를 연상케 하는, 손으로 무심하게 묶은 듯한 리본이 일품인 끌로에 퍼퓸 시리즈, 이름처럼 블랙 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겔랑의 ‘라 쁘띠 로브 느와르’ 는 용기만 봐도 향을 예측하고 가슴이 설레는 여자들의 심리를 그대로 겨냥하고 있으니 말이다. 패션의 완성은 가방이라는 사람도 있고, 얼굴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나만의 이미지와 체취를 완성해준다는 점에서 내 스타일의 화룡점정은 단연코, 향수다!

 

글 | 이화정(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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