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과 미래 사이

[푸드]by 김정훈

우리에게 남아있는 미래라 여겼던 건,

그저 내게 남은 미련일 뿐이었다. 

'몇 번째 데이트에서 사귀자는 얘길 할까요' 라는 상담이 많다. 이건 '얼마나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게 좋을까요' 라는 것만큼이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연애에는 정해진 룰이 없다. 그러니 왕도도 없고 정답도 없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므로, 타인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본인 마음이 내킬 때 언제든 시작하면 된다.


굳이 요즘연애의 평균추세를 대답해야 한다면, 세 번째 만남에서 시작하는 연인들이 많다고 얘기할 순 있겠다. 이들은 첫 번째 만남에서 상대방의 현재를, 두 번째 만남에선 서로의 과거를 엿본 후 세 번째 만남에서 함께할 미래를 점친다. 물론 세 번은 너무 이른 거 아니냐는 신중파들도 많고, 나와 미진이처럼 두 번째 만남에서 곧장 연애를 시작해버리는 급진파 역시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러니 ‘사귀기 전 올바른 만남의 횟수’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욘 없지 않을까 싶다. 넓은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깊은 골짜기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는 마음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사랑은 언제든지 시작된다. 그리고 마음의 이어짐은 서로의 과거, 그러니까 내가 몰랐던 곳에서 그동안 살아온 상대의 인생을 확인하는 시간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대화가 벌어지는 장소도 중요하다. 이 곳 연남동의 작은 오뎅바에서, 나는 첫눈에 반했던 그녀에게 더욱 완전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

미련과 미래 사이

오랜만에 온 연남동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공사 중이던 경의선 숲길은 완벽히 조성됐고, 삼삼오오 야외술판을 벌이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에 따라 새로운 레스토랑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오뎅바 근처에도 공사가 한창인 건물들이 있었다. 언젠가 미진이와 이 근방을 걸으며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이 세상엔 수많은 맛집들이 있고 그런 맛집들은 계속해서 생겨나지 않겠냐고. 그러니 그 모든 음식점들을 적어도 한 번씩은 꼭 함께 둘러보자고. 그럼 우린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을 수 있지 않겠냐고.

미련과 미래 사이

나만 알고 있던 단골가게 문을 열고 함께 들어 갈 땐, 서로 다르게 살아온 과거 사이의 간극이 한 번에 좁혀지는 그런 기분이 든다.

연애를 시작하는 건 새 건물, 혹은 도시, 국가, 행성 등과 같이 새로운 세계를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과 같다. 내가 사귀자는 얘길 꺼냈을 때, 그녀는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함께 내어 걸어가자.’고 대답했다. 이때의 우린 확실히 낭만적이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즐겁게 또 열심히 길을 내었다. 그리고 2년 만에 지쳐버렸다. 2년 후의 우린 꽤 현실적인 커플이 돼있었다. 길의 방향성으로 인해 잦은 다툼을 했고, 함께 길을 내어가는 작업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이 길 끝에 놓인 풍경이 결코 아름답지 않을지라도 상관없을 것 같던 낭만, 함께하는 시간만으로 행복할거라던 기대는 짜증과 한숨에 섞여 대부분 증발돼 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우린 서로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단 걸 알게 됐다.

미련과 미래 사이

“와! 여긴 물 떡도 있네? 가래떡꼬치.”

“여기 부산스타일 오뎅바로 유명하거든. 부산에선 이거 안 파는 곳이 거의 없어.”

“맞아! 나 부산 놀러갔을 때 이게 제일 맛있었는데.”

애초에 서로 다른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나는 10여년의 유년기를 부산에서 보냈지만 그녀가 부산에 머물렀던 시간은 30년 인생을 통틀어 겨우 5일이었다. 그녀는 고추냉이를 간장에 완전히 풀어 어묵을 찍어 먹었고, 나는 조금씩 덜어낸 고추냉이를 어묵에 묻혀 따로 간장에 찍어 먹는 게 좋았다. 그녀는 곤약의 식감을 즐겼고, 나는 곤약의 심심한 맛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우린 반숙계란과 설익은 라면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녀는 명이나물과 두꺼운 삼겹살이 찰떡궁합이라는 나의 지론을 맘에 들어 했고, 나는 회에 소주를 먹지 못하는 남자는 매력없다는 그녀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만화책에 탐닉했던 시절이 서로에게 있었음에 공감을 했고, 함께 하루 종일 만화방 데이트를 하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 그렇게 그날의 우린 서로 다른 과거에 숨겨진 몇 가지 이음새를 발견했고, 마침내 미래를 약속했다. 완전히 같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미래를 함께 이어나가기 위한 작업의 재료가 되기에 충분해 보였으므로 행복하리라 믿었다. 서로 다른 사람임에도, 같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으니 상관없었으리라.

미련과 미래 사이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삶의 경험치를 공유하는 즐거움. 그렇게 함께 완전해 지고 싶은 마음.

하지만 이제 그날의 우리가 함께 계획했던 미래는 없다. 지금 내게 남아있는 건 미래가 아닌 미련이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나갈 미래 대신, 한 사람이 처리해야 할 미련이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가 만들던 길은 분명히 끝났다. 도중에 끝나버린 작업에 미련이 남아서, 미완성을 완성으로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서 서성일 필욘 없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게 있다. 이 길은 미완성이 아니다. 그냥 여기까지가 우리가 함께 작업해온 길의 끝,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완전한 종착지다. 마치 이 곳 오뎅바의 노출 콘크리트 마감재처럼, 그냥 미완성의 형태 그 자체가 완성인 거다. 

미련과 미래 사이

몇발자국 뒤에 존재할 행복을 설득시킬 필요 없다. 그 몇발자국을 내딛을 의지가 사라져 버리는 게 이별이니까.

그 길이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생각에, 떠난 사람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다시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거란 기대는 하지말자. 만약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만약이 일어난다면, 지금껏 내어온 그 길을 다시 이어가려 애쓰면 안 된다. 명심하자. 이별로 끝이나버린 지난 길은 그대로 내버려둬야 한다. 그 시간과 노력이 대단히 아쉽다 해도, 실패로 완성된 형태를 인정하는 게 어렵다고 해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다시,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서로를 더 꼼꼼히 알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당시엔 보이지 않던 단점까지 이미 알고있단 걸 오히려 감사히 여기면서. 그래야 다시 두근거릴 수 있다. 미련을 견디기 힘들단 이유로 익숙함에 기댄 재결합을 한다면, 반드시 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돼 있다.

미련과 미래 사이

헤어진 지금,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무궁무진하다. 새로운 사람과의 시작이 훨씬 쉽다. 그래도 어려움을 택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사진을 지웠다. 거리를 두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지웠고, 볼이 맞붙을 정도로 가까이서 찍었던 사진도 지웠다. 그날의 풋풋함이, 그녀의 볼에서 풍기던 익숙한 살내음이 떠올랐다. 지운 사진을 복구하고싶단 생각이 문득 들려던 그때, 한 커플이 가게로 들어오며 행복하게 웃는 게 보였다. 그래. 미련을 정리해야 비로소 미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 떠나버린 그 사람 없인 본인 미래의 행복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온전하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이별을 완벽하게 소화시킨 후의 미래에서 말이다. 

이별소화레시피

사랑과 집착의 경계를 모르는 것만큼 무서운 것. 그건 바로 미련을 미래로 착각하는 일이다. 혹자는 이런 미련역시 사랑의 일종이며 이별 역시 사랑의 과정이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건 꽤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설령 그것이 사랑이라고 해도, 연애기간 동안 상대와 함께 만들어온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란 걸 인정해야 한다. 본인이 혼자서 만들어낸 그 새로운 사랑을 이미 다른 현실 속을 살아가는 상대에게 강요해선 안된다. 혼자서 처리하지 못하는 미련을, 상대와 함께 나누려는 건 그저 나약한 행동일 뿐이라는 걸 명심하자. 그만한 각오도 없다면 이별의 말을 쉽게 꺼내선 안 된다. 책임감이란 시작보다 끝에서 더 무거워야하는 법이니까. 

맛집정보 : 연남동 오뎅집 /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261. 02-3144-664

2016.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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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보단 불안을 즐깁니다. 요즘남자요즘연애 [소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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