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번의 투옥에도 항일투쟁 포기 않았던 시인 이육사

[컬처]by 직썰

베이징의 이육사 순국처. 이 벽돌 건물에 일본총영사관의 감옥이 있었다. ⓒ김태빈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한 조선 청년이 눈을 감았다. 그는 ‘겨울’을 봄을 예비하고 있는 ‘강철로 된 무지개’로 여겼던 사람, ‘청포도’와 ‘광야’를 노래했던 시인 이육사(1904~1944)였다. 향년 40세.


1943년 4월에 베이징으로 온 육사는 충칭과 옌안을 오가면서 국내에 무기를 반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7월에 모친과 맏형의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늦가을에 일경에 체포된 뒤 베이징으로 압송돼 새해를 맞은 지 16일 만에 육사는 마침내 쉼 없는 투쟁의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육사, 일본총영사관 지하감옥에서 지다

육사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항일 노동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던 육사의 먼 친척인 이병희(1918~2012) 여사였다. 육사와 같이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막 출옥했던 그는 일제로부터 육사의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이병희의 전갈을 받고 베이징으로 온 육사의 동생 원창에게 전해진 유골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1960년대에 고향인 원촌 뒷산으로 이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이육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육사와 이병희 여사가 갇혀 있었던 동창호동 28호. 당시 여기에 헌병대의 지하 감옥이 있었다. ⓒ김태빈

식민지 체제 아래서 일제에 맞섰던 육사의 삶은 열일곱 차례에 걸친 투옥과 구금으로 점철됐다. 그러나 일상적 탄압과 고문 속에서도 전선을 떠나지 않았던 육사의 항일투쟁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관련 기사: ‘광야’, 목 놓아 부를 수 없는 노래)

안동시 도산면 원촌, 이육사문학관 뒷산에 있는 육사의 묘소. 부인 안일양 여사와 합장돼 있다.

육사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인 ‘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형 원기, 두 동생과 함께 구속된 것은 1927년이었다. 장진홍(1895~1930)은 오사카로 몸을 피했고, 다급해진 일경이 육사를 비롯한 청년들을 범인으로 엮으려 한 것이었다.


육사는 미결수로 복역하다 장진홍이 검거된 뒤, 1929년 5월에야 출옥하는데 그의 복역 기간은 무려 19개월이었다. 장진홍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대구 감옥에서 자결 순국했다. 엉뚱하게 범인으로 몰렸던 육사에게 같은 식민지 청년으로서 장진홍 의사의 죽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수인번호가 ‘264’번이었고, 이후 그가 ‘이육사’라는 필명을 쓰게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1930년에 그는 ‘대구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정치평론을 발표했고, 이활 명의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육사의 형제들은 모두 여섯이었다. 이들이 태어난 생가를 ‘육우당’ 이라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31년 대구격문 사건으로 두 번째 구속됐다 풀려난 그는 석정 윤세주(1901~1942)의 권유로 이듬해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으로 입교했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이 무렵 약산 김원봉(1898~1958)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군사 간부학교를 설립한 것이었다.

대구 조양회관. 일본, 중국을 다녀온 후 육사는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해 일경에게 요주의 인물이 됐다.

의열단은 이미 1926년부터 독립운동에서 퍼져나가고 있던 사회주의 이론을 점차 수용해가기 시작했다. 1928년 이후에는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 중심에 김원봉이 있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바로 ‘조선혁명당 조직에 필요한 전위투사의 양성’과 ‘개인폭력 중심노선에서 전투적 협동전선으로 전환’이라는 방침으로 설립됐다. 군사 간부학교에 입교하기로 했을 때 이미 육사도 사회주의 노선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산과 공산주의 조직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던 육사는 공산주의에 대한 원칙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약산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고 있다면서 ‘사상이 비계급적’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난징 근교에 설립됐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는 지금 폐허로 남았다. 2015년 1월

이러한 그의 태도는 육사의 창작희곡 <지하실>과 졸업을 앞두고 가진 김원봉과의 면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1933년 6개월의 과정을 수료하고 군사 간부학교를 졸업하던 날 밤, 그의 희곡 작품 <지하실>이 여흥 무대에서 상연됐다.


<지하실>은 공장 지하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조선 혁명의 성공’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제도가 실현’돼 토지가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완전한 노동자·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또 육사는 김원봉과의 면담에서 “도회지의 노동자층을 파고들어서 공산주의를 선전해 노동자를 의식적으로 지도 교양하고 학교에서 배운 중한 합작의 혁명공작을 실천에 옮겨 목적을 관철한다”고 털어놓았다.

교과서에 ‘사회주의자’ 이육사는 없다

이처럼 육사는 사회주의자로서 원칙을 저버리지 않았지만, 우리 교과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짐짓 눈을 감고 있다. 교과서에 실린 어떠한 기록에서도 그를 사회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민족 시인으로 기려지는 이 시인이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은 그의 명예에 누가 되는 것일까.


그러나 국내로 잠입한 육사는 1934년 군사 간부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면서 이들의 국내 투쟁 교두보 확보 계획은 무산된다. 육사뿐만 아니라 1, 2기생 스물한 명이 자수하거나 체포됐기 때문이다.


이 무렵, 그의 사상적 경향은 일경의 동향보고에도 드러나 있는 바와 같이 ‘민족 공산주의(정치·경제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 민족주의의 제약을 받는 경향)로 전환’하고 있었다.


육사의 ‘국내 투쟁’은 이를 계기로 더욱 현실적인 노선으로 선회했다. 석방 후 그는 다시 시사평론을 중심으로 한 왕성한 글쓰기 활동을 벌였다. 1935년부터는 신석초 시인을 만나 교유하면서 잡지 <신조선> 편집에 참여하고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식민지의 인력과 물자를 강제동원해 전력화한 전시 동원 시기였던 1940년대에 들면서 일본의 제국주의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1943년, 일제는 의무 병역으로서 징병제를 시행해 적령기에 이른 한국 청년들을 징집하여 전선으로 보냈고, 이듬해에는 학병제를 실시하여 대학생들도 강제 소집하기 시작했다.

왕모산 갈선대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갈선대는 시 ‘절정’의 시상이 잉태된 곳이라고 한다.

1943년, 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떠났다. 시 “절정”에 드러난 절박한 현실 인식이 그를 움직인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그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 마지막 여행이었다. 그는 일제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됐고, 이듬해 1월 벽두에 일제의 감옥에서 순혈의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극한적 시대 상황 속에서 그 초극 의지를 다루고 있는 “절정”의 시상은 고향 원촌 인근의 왕모산 갈선대에서 잉태됐다고 한다. ‘절정’에 그려지는 북방과 고원이라는 극한 상황은 식민지 말기를 견뎌내야 했던 조국과 민중의 현실을 은유한 것이었다.

대구의 개인 문학관 ‘264 작은 문학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마지막 시행이 담고 있는 역설은 일제라는 거대한 강적 앞에서 불굴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육사의 삶과 태도를 압축한다. 그는 일제 치하의 현실에서 쉽사리 스러지지 않는(강철) 희망(무지개)를 노래하고 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고, 겨울이 오면 봄이 머지않은 것이었다.

대구 북성로 공구 골목에 문을 연 264 작은 문학관. 개인이 꾸리고 있는 문학관이다.

탄신 100주년과 순국 60주기인 2004년, 경상북도에서는 육사문학관을 건립 개관하고, 생가 복원 등의 사업을 벌이며 육사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2017년 무렵 서울 교사들의 답사에 동행해 육사문학관을 찾았을 때 이육사문학관은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264 작은 문학관을 개관한 경북대 박현수 교수가 문학관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태빈

2016년 5월에는 박현수 경북대 교수의 노력으로 ‘264 작은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대구시 중구 북성로 공구 골목의 작은 2층 목조 건물에 깃들인 이 문학관은 카페와 기획전시실, 육사가 동료와 주고받던 편지와 친필 시, 사진 등 50여 점과 시집 10여 권이 전시돼 있다.


이육사문학관은 그의 고향 안동에 세워졌지만, 그의 문학은 협소한 지역의 틀 안에서 이해될 일은 아니다. 그가 활동했던 대구에 세워진 264 작은 문학관이 개설자의 희망대로 ‘개인 문학관의 한 모델’이 돼 육사 문학의 저변을 두터이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직썰 필진 낮달

2020.02.0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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