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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직장인의 점심산책] (4) 고궁의 봄 알리는 ‘창덕궁 홍매화’

by29STREET

팬데믹 상황에서도 봄은 어김없이 돌아와 우리 모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특히 매화는 벚꽃보다 한 발 먼저 찾아와 봄을 알리는 전령같은 꽃. 서울 도심에서 가장 운치 있게 꽃구경 할 수 있는 곳 중 하나인 창덕궁에도 홍매화가 활짝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3월 23일 화요일 오후, 1시간 남짓 되는 점심시간 안에 회사(충정로)에서 창덕궁까지 다녀오기 미션이 시작됐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기에 버스로 약 20분 만에 창덕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복하는 시간을 40분 잡으면 실제로 창덕궁 홍매화를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은 20분, 여유 있게 잡아 봤자 30분이다. 다행히 창덕궁 입구(돈화문)에서 홍매화가 있는 후원 입구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면 충분하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돈화문이 보인다. 돈화문 옆으로 매표소가 있지만 굳이 표를 사지 않고도 빠르게 입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거다(갑자기 느껴지는 K자부심!). 전염병 감염 예방과 관람객 편의향상을 위해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다는데 참 편리하다. 검표하시는 분 옆에 카드 전용 입구가 있으니 버스 탈 때처럼 찍고 들어가자. 입장료는 3000원.

금천교 수양버들과 오래된 느티나무 고목.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돈화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름드리 튼튼한 나무들이 반겨준다.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현재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1411년 건설)인 금천교가 보인다. 길이가 12.9m인 금천교는 임금님 행차 때 편하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폭을 12.5m로 넓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다리 위에서 보면 돌다리가 아니라 널찍한 길을 걷는 것 같다. 금천교 옆에 버티고 선 수양버들은 벌써 연둣빛 여린 잎을 틔워 올리고 있다. 그 옆에 있는 거대한 고목은 600년 넘은 느티나무다.

숙장문 너머로 분홍빛 홍매화가 보인다. 관람객이 꽤 있지만 공간이 워낙 넓어 밀집도는 낮다. 홍매화 근처에는 사람이 많으므로 주의하자.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을 통과하면 탁 트인 돌길이 저 멀리 숙장문까지 이어진다.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에는 왕들이 즉위식을 올렸던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도 있지만 오늘은 시간도 한정돼 있고 홍매화를 보는 게 목적이니 얼른 발걸음을 옮겨 본다(인정전, 선정전 등 전각들을 고루 다 관람하려면 1시간 정도 걸린다). 숙장문 저 멀리 어른거리는 분홍빛이 오늘의 목적지인 홍매화다.

성정각 옆 '성정매'.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승화루 앞 홍매화.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창덕궁 홍매화는 총 두 그루로, 한 그루는 세자들이 공부하던 성정각 옆 자시문 담 안쪽에 있는 ‘성정매’이고 또 한 그루는 후원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승화루 앞 홍매화다. 두 그루 모두 400년 넘은 고목으로, 선조 때 명나라에서 선물받은 만첩홍매라고 한다. 담벼락 안쪽에 있는 성정매는 처음 심었던 줄기는 시들어 죽고, 뿌리에서 새로운 줄기가 돋아나 지금처럼 크게 자라난 것이라고.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승화루 앞 홍매화다. 탁 트이고 볕도 잘 드는 공간에서 마음껏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매화나무 뒤로 보이는 멋진 건물은 세자를 위한 도서관으로 쓰였던 ‘승화루’다. 일제강점기 때는 왕실 탄압을 목적으로 ‘창덕궁 경찰서’로 사용되며 일본인들이 승화루에 마음대로 드나들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멋지게 서 있다.

매화 옆 산수유도 아름답다. 세자 전용 도서관이었던 승화루와 산수유 노란 빛깔이 잘 어울린다.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열정적인 관람객들이 매화와 승화루를 사진에 담고 있다. 여기저기서 ‘와!’, ‘예쁘다!’라며 감탄사가 끊이지 않는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출입통제선과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팻말이 곳곳에 있다. 꽃을 더 잘 담고 싶어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노신사가 자기도 모르게 잔디밭에 한 발짝 들어가더니 곧 ‘아차’하는 표정으로 되돌아 나오신다. 꽃도 사람도 흐뭇한 광경이다.


홍매화가 마음껏 뽐내는 ‘분홍분홍’한 기운을 즐긴 다음, 언덕 아래 낙선재를 잠시 둘러보고 돌아가기로 한다. 낙선재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가 말년을 보냈고 영친왕 부부도 기거한 곳으로 유명하다. 헌종13년(1847년) 지어진 낙선재는 궁궐 내 다른 건물들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나무 색을 그대로 살려 지었다.

단청 없이 소박하게 지은 낙선재.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낙선재 옆 공터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건물은 단아하고 소박하지만 주변의 수양벚꽃, 매화 등 아름다운 꽃나무들과 어울려 남다른 아름다움을 품었다. 낙선재 앞에는 청아한 매력의 청매화(하얀 매화)나무가 있다. 홍매화보다 개화가 빨라 이미 반쯤 진 상태였지만 동그랗고 하얀 꽃잎은 여전히 귀엽고, 봄날 풀내음과 어우러져 맑은 향기를 풍기고 있다.


낙선재까지 구경한 뒤 발걸음을 돌릴 시간.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크고 작은 전각이 어울려 있는 창덕궁의 풍경이 더 푸근하게 느껴진다. 웅장한 경복궁도 좋지만 소박한 창덕궁을 유달리 더 사랑했다는 조선 역대 왕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지형과 산세를 그대로 살려 자연의 품에 안기듯 지어진 형상에서 조상들의 세계관이 느껴지는 듯하다. 꽃 피는 봄날의 창덕궁은 따스하고 향기로웠다.


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