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에만 서면 한없이 커지는 그녀

[연예]by 아시아경제

눈썹 세 번 밀고...주사바늘 꽂고...'우상' 천우희의 집념

제작진 실수로 발가락에 주사바늘 꽂혀도 이 악물고 버텨 "우희는 너무 몰입해서 탈"

'한공주' 이수진 감독 재회…실제와 상반된 배역에 부담 커도 자부심

믿었던 선배 김주혁 사망에 상실감…온라인 개인채널 운영하며 조금씩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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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비 오는 밤, 낮은 흐느낌이 그늘을 타고 들려온다. 바람막이 점퍼와 도트 무늬 치마를 입은 여인. 눈과 허리, 다리를 청테이프로 꽁꽁 묶여 꼼짝도 못한다. "살려주오. 아부지세요? 구남씨 잃어버리고 여태 찾았어요. 너 누구야? 누구야?" "쉿." 영문도 모른 채 문초를 받는다. 주사기 침이 엄지발톱과 살갗 사이를 파고든다. 그녀는 발악한다. "살려주오. 악!"


영화 '우상'에서 구명회(한석규)가 최련화(천우희)를 고문하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천우희(32)의 어깨너머로 한석규(55)의 얼굴을 포착한다. 전율이 스쳐간다. 연기와 실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제작진의 실수로 일반 주사기가 사용됐다. 바늘이 플라스틱 통 안으로 밀리지 않고 맨살에 꽂혔다. 천우희는 몸부림치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고통을 참아가며 연기를 이어갔다. 한석규의 연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아팠지만 '그만'이라고 외칠 수 없었어요. 한석규 선배의 연기가 너무 좋았거든요. 저 때문에 모든 걸 망치고 싶지 않았죠. (잠시 말을 멈추다가) 속상하죠. 일어나면 안 되는 사고니까요. 그런데 그 순간에는 아프다는 생각보다 촬영이 먼저였어요. 카메라에 불이 켜지면 그렇게 되는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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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는 속앓이 하는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우희는 너무 몰입해서 탈이에요. 불꽃이 계속 활활 타오를 필요는 없거든요. 때로는 가물거리지만 않아도 충분하죠." 최련화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배역이다.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쳐온 중국 연변 출신의 조선족. 안마방 등을 전전하면서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고 발버둥 친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나타나면 가차 없이 죽인다. "그거 아오? 칼로 긁은 상처는 치료가 되지마는, 입은 아이대오."


천우희는 강렬한 인상을 보이려고 눈썹을 세 번 밀었다. 산속에서 달리는 뒷모습을 찍을 때는 뜀박질을 쉰 차례나 했다. 고문 신 촬영 때는 청테이프를 10시간가량 붙이고 연기했다. "눈가가 빨갛게 짓물렀어요. 의자에 계속 묶여있어서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죠. 영하 15도의 추위 속에서 비에 젖은 채 연기하다보니 나중에는 공황 장애가 오더라고요. 이것만 끝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틴 듯해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는 마음이었죠."


그녀는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는 법이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인내하려고 하죠. 나름 기준은 있어요. 불편한 일은 감수하지만, 부당한 일은 참지 않죠.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 강한가 봐요. 우상을 촬영하면서 느낄 수 있었어요. '한공주(2013년)'의 이수진(42)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잖아요. 그때보다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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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공주는 천우희의 출세작이지만, 이미지가 굳어지는 부작용도 낳았다. 주로 어둡고 비극적인 배역을 맡았다. '손님(2015년)'에서 마을의 비극을 암시하는 미숙과 '해어화(2015년)'에서 단짝을 잃고 추락하는 서연희, '곡성(2016년)'에서 외롭게 마을을 지키는 무명 등이다. 멜로물인 '어느날(2016년)'에서도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미소를 그렸다. 하나같이 그늘진 얼굴 속에 아픔이 숨어 있다. 그래서 그녀는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는 해 같다. 불투명한 눈동자로 속마음을 은밀하게 감춘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 연출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에 어울린다고 보시는 듯해요. 제가 인식하지 못한 면까지 찾아내 주시더라고요. 저의 취향도 어느 정도 반영됐다고 생각해요. 실제와 상반된 성격의 배역에 자주 매료되거든요. 부담이 크지만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려고 하죠."


우상은 그간 행보의 정점이라 해도 무방하다. 냉혹하고 집요한 상심이 독기처럼 서려 있다. 동물적인 방어 본능을 드러내면서 한꺼번에 분출한다. 그런데 솟구치는 에너지는 설움 같은 감정의 밀물도 함께 차오르는 착각을 준다. 천우희가 촬영 당시 크나큰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믿고 의지하던 배우 김주혁이 세상을 떠났다. 우상을 촬영하기 전까지 드라마 '아르곤'에서 매일 호흡을 맞추던 선배. 그녀가 속한 매니지먼트의 기둥 같은 존재여서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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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연기할 의욕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영혼을 불태우며 연기하는 순간들이 부질없게 느껴졌어요. 무언가에 매달리는 스스로도 하찮게 보였고요. 혼자 있을 때마다 상념에 젖어든 것 같아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제 촬영 분량이 없는 날에도 제작 현장을 찾아갔어요."


천우희는 촬영을 마치고 7개월가량 쉬었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도 거절했다. 새로운 작품에 참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프랑스 등을 여행하며 연기 세계와 거리를 뒀다. 일상에서 그녀는 내성적이고 조용하다. 수줍음이 많아서 낯선 사람에게 인사도 잘 못한다. 그런데 정서적 안정을 도모한 뒤로는 훨씬 외향적으로 바뀌었다. 매니지먼트사의 제안으로 개설한 유튜브 개인 채널에서 씩씩하고 활달한 얼굴을 보이며 호감을 산다. 애상이 말끔히 치유된 것은 아니지만, 절망의 늪에서 일어나 새로운 꿈을 준비한다. 때로는 김주혁의 묘소를 찾아가 안부를 묻는다.


"주혁 선배님. 며칠 전 선배님 꿈을 꿨어요. 한 5~6일 전에도 꿈에 또 나오셔서 '찾아가 인사할 때가 됐나 보다' 하면서도 시간이 너무 빨라서 서글펐어요. 꿈 속 선배님은 멀끔하고 멋진 모습으로 환하게 웃어주셨어요. 그 모습처럼 언제나 평안하세요. 또 올게요(2018년 10월30일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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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유하며 웃음을 되찾은 까닭일까. 천우희는 오랜만에 밝은 배역으로 시청자를 만난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주연한다. 서른 살 여자 친구들의 고민과 연애, 일상을 다룬 코미디. '극한직업'으로 유명해진 이병헌(39) 감독이 연출한다. 그녀는 웃음이 가득한 세계에 빠질 기대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동안 보여주지 못한 밝은 얼굴이 일상에서 지친 시청자들이 기대는 안식처가 되길 고대한다.


"많은 분들의 도움 덕에 원기와 자신감을 회복했어요.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좋은 연기를 보여드려야죠. 열심히 노력하면 서로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2019.03.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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