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쾌감의 법칙

[라이프]by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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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스토리 대부분은 복수를 다룬다. 신화뿐 아니라 드라마도 대개 연인을 빼앗아간 자에 대한 복수, 친구나 가족의 뜻하지 않은 죽음에 대한 앙갚음, 훼손된 명예를 되찾기 위한 보복, 사랑과 신의를 배신한 자에 대한 처벌이 주요 모티브다.


때로는 개인적인 복수가 집단이나 계급 간의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그만큼 복수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복수의 역설

원한을 품었다고 복수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악인이 벌을 받는 것은 영화 혹은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 악인이 처벌받는 일은 드물고 악인의 미래가 불행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악인이 선량한 사람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악인의 말로가 불행할 것이라는 환상은 복수를 실행하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위안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아무리 억울해도 사회는 개인적인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국가가 나서 복수를 대신해준다. 사실 사적인 복수는 성공한다 해도 아무 이득이 없다. 국가는 나에게 폭력 행사 죄를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영화는 악인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스토리가 마무리된다. 그러나 악인에게도 가족과 지지자가 있다. 내가 복수를 끝내는 순간 그들은 나에 대한 복수를 꿈꿀 것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담보로 벌이는 생존게임에서 복수는 꽤 위험한 전략이다. 복수에 성공한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자가 계속 따라붙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보복의 악순환이 상호보복의 연쇄를 끊을 수 있다. 복수 실행자는 먼 훗날 자신에게 칼을 겨눌 여러 후보자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두렵다면 복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복수에 대한 두려움이 복수의 악순환을 끊게 만드는 것이다.


복수심은 인간의 결함이 아니다. 우리에게 복수심이 없었다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무던히 참고 견디는 사람과 반드시 보복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보복하는 사람이 생존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당한 대로 갚는 사람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면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복수하겠다는 위협만으로도 악당들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다. 따라서 복수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악을 응징한다는 것은 복수를 감행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복수할 용기나 힘이 없었던 사람들은 늘 착취 대상으로 후손을 남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복수심은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자기 권리를 방어하며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해왔다. 복수심은 악인에게 유리하게 돼 있는 도덕적 대차대조표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복수는 쾌감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복수는 선으로 인식된다. 부당한 행위에 앙갚음할 수 없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악인을 처벌할 수 없는 사회는 악한 사회다.


정의로운 사회는 국가가 개인의 복수를 공정하게 대신해준다. 복수를 위해 개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칼 아닌 고발장이다. 그러나 어떤 정부도 완전하게 공정할 수는 없다. 내가 잃은 것을 완벽하게 복원시켜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복수심을 불태운다.


왜 사람들은 자기가 입게 될 불이익에도 복수를 감행하는 걸까. 놀랍게도 그것은 복수가 가져다주는 즐거움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게임에서 사람들이 복수할 때 쾌감을 갖게 된다.


게임 진행 방식은 이렇다. 참가자들이 돈을 기부하면 진행자는 기부금을 두 배로 불려 돌려준다. 그런데 한 명이라도 돈을 내지 않으면 한 푼도 돌려주지 않는다. 가장 좋은 일은 참가자들이 모든 돈을 기부하고 배로 돌려받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 거듭될수록 기부액은 점차 준다. 서로 눈치 보며 돈을 덜 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적게 기부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 제도까지 도입했다. 그러자 참가자들은 자기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적게 내는 사람에게 보복했다. 2004년 스위스의 한 연구진은 사람들이 복수할 때 뇌에서 쾌감을 관장하는 영역이 활성화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들은 무시당할 때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2016년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체스터가 이끄는 미국 켄터키대학 연구진은 자기를 소외시킨 자들에게 복수하리라 상상만 해도 쾌감이 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시당할 때 뇌에서 고통과 관련된 배측(등쪽)전대상피질(dACC)과 뇌섬엽(anterior insula)이 활성화하지만 이내 복수를 상상하면 쾌감중추인 측좌핵(nucleus accumbens)이 활성화한 것이다.


연구진은 후속 연구에서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참가자들에게 쾌감 억제 효과가 있다며 위약(僞藥)을 먹이자 갑자기 복수심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복수가 오로지 쾌감을 얻기 위해 행해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복수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쾌감을 갖게 된다. 그것 때문에 복수를 감행한다. 복수심은 복수를 해야 사라지는 감정인 것이다.

이타적 처벌자

다행히 모든 사람이 복수를 감행하진 않는다. 지금까지 이어진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복수를 결심하거나 상상할 때, 그리고 복수를 실행할 때와 복수가 이뤄졌을 때 즐거워한다. 그 중에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큰 쾌감을 갖게 된다.


우리는 쾌감을 얻기 위해 복수하지만 쾌감이 오래 지속되진 않는다. 9ㆍ11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된 뒤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한 실험에 돌입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빈 라덴의 사망 뉴스에 접한 뒤 쾌감을 갖게 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분은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복수의 즐거움은 순간적인 것이다. 그래서 복수극 상당수가 비극으로 끝난다. 복수가 끝난 뒤 관객은 쾌감을 갖게 되지만 당사자에게 남는 것은 허무뿐이다.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마이클 매컬러프는 복수의 역할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다음 피해를 방지해준다. 둘째, 잠재적 가해자들로 하여금 공격을 포기하게 만든다. 셋째, 협력하지 않는 구성원들을 처벌함으로써 공동선에 기여하도록 만든다.


복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신뢰는 싹트지 않고 협력이 이뤄지지 않는다. '눈에는 눈' 원칙을 고수하면 세상에는 시각장애인만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폭력 대신 선거 같은 합법적인 제도를 이용한다.


우리는 몇 년마다 시행되는 선거를 통해 권력자에게 복수한다. 정치는 이익을 달리하는 집단의 대리전쟁이다. 선거는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이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라 할 수 있다. 투표를 통한 복수는 사회를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기주의자 처벌로 쾌감을 갖는 존재다. 인간이 신비로운 것은 나쁜 인간을 처벌하지 않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분노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뿐 아니라 이를 방관하는 사람까지 처벌한다. 이것이 이기적인 인간끼리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열쇠다.


대규모 협력이 가능하려면 협력하지 않는 이기주의자를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이기주의자에 대한 처벌을 '이타적 처벌(Altruistic punishment)'이라고 부른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이기주의자 처벌로 기쁨을 느낀다. 이는 처벌받는 쪽보다 처벌하는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안도감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타적 처벌이 없었다면 집단 내 협력은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기주의자 처벌은 그가 공동체에 손실을 끼치면서 얻은 이익에 대한 복수다. 사람들은 반사회적 행위자에 대한 처벌로 심리적 기쁨을 얻는다. 이런 본능은 생물학적으로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복수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진화적으로 선택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조건적 협력자인 동시에 이타적 처벌자이며 복수하는 자이기도 하다.

2020.07.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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