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자신의 직속 근위대를 보냈던 아프리카 황제

[이슈]by 유용원의 군사세계

대한민국에 지상군을 보낸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

1950년 6월 25일, 출처 : 위키미디어

2020년 현재, 출처 : 서울특별시

한강의 기적 (漢江의 奇跡 / Miracle on the Han River)

전쟁을 겪은 최빈민국가에서 반세기 만에 국민 소득 2만 달러를 달성한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일컫는 상징적 용어

6·25 전쟁 발발 70주년

출처 : 위키미디어

1950년 전쟁으로 황폐화됐던 대한민국... 2020년, 70년이 흐른 지금의 대한민국은 천지개벽이라도 한 듯 달라졌다.

출처 : 위키미디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결사적으로 함께 싸워준 미군과 유엔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출처 : 국가보훈처

6·25 전쟁 파병국 중에는 황제 직속 호위부대를 보냈던 아프리카 국가가 있었다. 바로 '에티오피아'다.

'칵뉴(Kangnew) 부대'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다" 출처 : 위키미디어

칵뉴란 '초전박살'이라는 뜻으로 황제를 지키는 친위대이자 최정예 부대였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명에 따라 6·25 전쟁에 참전한 칵뉴부대는 강원도 춘천, 철원 등 중·동부 전선에서 총 253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출처 : 위키미디어

6·25 전쟁에 참전한 국가들 대부분은 미국과의 관계, 소련의 위협,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이해관계로 파병을 결정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자유 수호'라는 단순한 일념으로 6·25 전쟁 파병을 결정한 국가다. 1935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 침략당한 경험이 있다. 국민 27만 명이 희생되고 수도가 함락된 에티오피아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무시당한 바 있다.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에티오피아 황제, 출처 : 위키미디어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받지 못하는 약소국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고 "자신만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 다짐한다. 에티오피아는 나라를 잃은 설움을 잘 아는 국가였다. 유엔의 6·25 전쟁 파병 요청에 내부 반대가 있었지만 셀라시에 황제는 "부당하게 침략받은 나라가 있다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며 즉시 파병을 결정한다.

출처 : 위키미디어

칵뉴부대는 최정예 부대답게 25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고, 단 한 명도 포로가 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사는 있어도 포로는 없다" 이들은 전사할지언정 포로가 되는 걸 수치로 여겼다. 총 6,037명의 에티오피아 젊은이들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다.

출처 : 위키미디어

용맹하게 싸운 에티오피아 칵뉴부대 용사들은 전쟁이 끝난 뒤 바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에티오피아군은 평화유지와 재건이라는 목적으로 한국에 남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자신들의 월급으로 경기도 동두천에 보화(Bowha) 보육원을 설립했고 1956년까지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출처 : 월드비전

대한민국에 지상군을 보낸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 '에티오피아'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위키미디어

가거라!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전부 거기에 가서 모두 맹렬하게 싸워서 전사하거라!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저들의 손에 꼭 안겨주거라! -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구성 및 제작 / 디지틀조선일보

2020.05.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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