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덥다 더워!” 아빠의 첫 마디. 기다림의 노심초사 끝에 아빠가 탄자니아 땅에 도착했다. 아빠의 첫 아프리카 땅, 첫 경유 비행기. 한국에서 탄자니아까지 총 비행시간은 무려 약 26시간. 아빠랑 함께 한 여행은 이것으로 4번째다. 부모가 자식 키우는 기분은 이런 것일까?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되지 않는 것이 없다. 어쨌든 무사히 아빠는 이곳에 왔다. 내가 좋아하는 시루떡을 들고, 거기에 내 건강 챙긴다고 홍삼도 바리바리 싸오셨다. 아빠 평생에 아프리카 땅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어때 아빠 여기 너무 좋지?” 탄자니아는
포르투갈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안고 리스본에 왔던 탓에 꽤나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분전환을 위해 리스본 시내를 벗어나 좀 더 먼 곳에 가기로 했다. 리스본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올리베(올리바이스)Olivais 지역에 가기 위해서는 알라메다Alameda역에서 전철역으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오리엔트Oriente역에 내리면 된다. 오리엔트역에 내리는 순간, 선명하고 푸르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피부로 느껴졌다. 출근과 등교로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순간 우울도 단숨
신혼여행은 남국으로 가는 루트가 정석인 모양이었다. 나는 남국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사시사철 기온이 30도를 웃돌고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볼거리가 많지는 않으며 석양이 아주 길게 지는 곳이 아닐까 싶을 뿐이다. 아, 무엇보다 바다, 바다가 보이는 곳. 그런 곳을 신혼여행지로 선택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수개월의 결혼 준비부터 그 절정인 결혼식까지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알리는 세리모니를 진행하는 덴 적잖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객이 떠나고 마지막으로 양가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
열차는 정시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랐다는 흥분에 3만 원짜리 삼등실마저도 마냥 낭만적이기만 했다. 하지만 2층 침대의 실체는 거의 입관 체험 수준. 코에서 천장까지 세 뼘 남짓 할까. 앉아서 물도 마실 수 없었다. 침대에 눕기 위해서는 아래층 침대 모서리를 밟고 올라 포복하듯 미끄러져 들어가 홱 돌아누워야 했다. 계산이 틀리면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이다. 그래봐야 14시간짜리 밤기차일 뿐. 자고 일어나면 그만이다. 바닥도 깨끗하고, 화장실도 꽤 넓었으며, 침대마다 콘센트도 있고, 무엇보다 빳빳한 새
신혼여행지를 고민하다 라일레이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특별한 곳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우리’가 즐거울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어울리는 곳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라고 하긴 이상하지만 여하튼 막연히 ‘맥주가 있는 해변’ 어디쯤을 검색하던 나는 이리저리로 흘러다니다가 그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에는 조그만 해변 바(Bar)가 담겨 있었다. 바라고는 하지만, 바텐더가 음료를 내어주는 좁은 나무 선반이 가게의 전부였고, 모래사장 위로 펼쳐진 돗자리 몇 개가 테이블을 대신하고 있었다.
결혼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틈에 시간이 흘러 이제 8년이 되어간다. 당시로써도 다소 나이 든 총각이던 나는 흰 머리가 조금씩 보이고 약간의 노안 증세가 나타나는 40대 중반의 아재가 되었고 신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린 신부였던, ‘그래도 아직은 20대’이던 마누라도 30대 후반으로 향해 가고 있다. 나이를 먹는 만큼 빨라지는 시간의 흐름에 비애를 느낄 틈조차도 없다는 게 인생의 진정한 비극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부부로 지내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아도 두 남녀가 모두 건강하며,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직까
뭔가 대단하고 매일매일 색다른 일상이 펼쳐져 있을 줄 알았다. 2010년 4월. 만 5년간의 세금납부 실적과 무범죄 증명, 그리고 주거 서류승인이 통과되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EU영주권을 받았다. 외계에서 온 바이러스처럼 ‘유럽 영주권’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던 것은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그리고 그 끝은 2010년 4월의 어느 날까지였고, 그 순간 나를 이 낯선 유럽 땅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그 놈의 바이러스는 이내 무심하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영주권을 받아 무언가 큰일을 해냈다는 뿌듯함도 한 순간.
스위스의 청정도시 체르마트Zermatt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로이커바트Leukerbad에 도착했다. 기차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간식 먹는 데 정신이 팔려 하마터면 내릴 역을 지나칠 뻔 했지만, 역시 행운은 나의 편이었던 것. 무사히 로이커바트 행 버스에 탑승, 만원의 버스 안에서도 당당히 자리를 꿰찼다. 버스가 오르막길을 내달리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페루의 마추픽추가 아닌가, 화려한 산세와 웅장한 스케일이 펼쳐졌다. 그 풍경에 졸리던 눈이 번쩍 뜨였다. 사람 마음 모두 똑같은 건 어딜 가나 같은 이치, 버스 안 승객들이
모처럼의 일이었다. 여행하는 열흘 내내 매일 비가 왔다. 거짓말처럼 비가 퍼부었다. 잠시 잠깐 빗방울이 멈추면 그 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지금껏 20여 년 여행을 했지만, 이토록 지독히도 끈질기게 비를 맞으며 여행한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그래도 믿었다. 그간 늘 운이 좋았던 것처럼, 행운의 여신이 손짓하여 아름다운 포르투갈의 햇살을 마주할 거라고. 그런데 3일 차가 지나가면서 조금씩 고개가 갸우뚱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결국 우산 없인 다닐 수 없는 여행이 되었던 그때. 지금
커피를 사랑한다. 커피에 대한 대단한 지식은 없지만 모닝커피는 끊을 수 없는 중독이고, 입맛에 맞지 않는 커피를 마시면 화가 난다. 필자와 같은 커피 중독자들이 많을 거라 믿는다. 하루의 기분을 좌우하고 그날의 컨디션을 조절해주는 중요한 친구, 커피. 지금껏 여행하면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많이 만났던 도시 세 곳을 소개해볼까 한다. 이른바 커피의 성지를 찾아 떠난 여행. 미국 포틀랜드에 갔을 때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말 걸어주는 현지인들이 많아 놀랐다. 그만큼 외지인보다는 로컬들이 중심이었던 도시. 콜롬비아 계곡의 물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