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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이발만 60년 이남열 “아직도 통달을 못해 오늘도 배웁니다”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95년 된 서울 最古 이발소

성우이용원이 지켜온 것

‘나’는 피대(皮帶)다. 요즘 사람들은 알는지. 면도날을 세울 때 바로 나, 말가죽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 집은 마포에서 서울역으로 넘어가는 만리재 골목에 있다.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이발소, 95년 된 성우이용원. 이곳의 두 번째 주인 고(故) 이성순이 1950년대 주한미군 PX에 걸려 있던 나를 들였다. 그의 아들 이남열(74)의 손에 대물려 이 집에서만 70년을 살았다. 그동안 복숭아 나무와 호박, 송이버섯이 지천이던 만리재 골목에는 아스팔트 길이 깔렸다. 고물이라고? 이곳에선 청춘이다. 90년 된 드라이기, 제조연도 ‘1934년’이 새겨진 면도칼도 현역이다.


요즘에는 오래된 이발소들도 일회용을 쓴다지만, 이곳 주인은 오늘도 독일제 ‘쌍둥이표’ 면도칼을 숫돌에 갈고 내 몸에 문질러 가지런히 고른다. 150살 먹은 면도칼의 상아 손잡이는 세월에 누렇게 바랬지만 칼날만큼은 새것처럼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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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공덕동 '성우이용원'의 이남열 이발사가 40년 단골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다. 이 이발사는 "가위 날을 제대로 갈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튀지 않고 밑으로 뚝뚝 떨어진다"며 "연장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것이 이발사의 기본 자세"라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3대(代)째 만리재 이발소


“1928년 1월에 외할아버지가 여기 만리재에 들어왔어요. 일본인한테 이발을 배워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이용사 면허증을 땄대요. 함자가 서재덕이에요. 이 건물, 당시 초가집을 사서 이발소를 열었죠. 우리 아버지는 이발소 직원이었는데 성실하고 기술 좋으니까 외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어서 사위로 맞은 거예요. 그러고 이발소를 물려준 거예요. 아버지는 이름 이성순에서 ‘성’자를 따서 ‘성우이발관’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성우이용원 3대 주인인 이남열 이발사는 1949년 칠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면도칼과 가위 가는 법을 가르쳐주고는 매일 벼리도록 했다. 3년을 지루한 연장 갈이만 시키니, 두 형은 진작에 나가떨어졌다. 혼자 3년을 버티자 중학교 2학년부터는 손님 머리를 깎게 했다. 그때 이발 가격이 80원이었다.


이남열은 중학교를 졸업한 1965년부터 이발소를 맡았다. 형들을 제치고 가업을 물려받았지만 일할수록 기쁘기보다 “징글징글했다”고 했다. 가위가 아니라 총대를 쥔 것 같았다. 뼈 빠지게 일해서 형들 장가, 누이들 시집 보내고 두 동생 대학도 보냈다. 이러다간 아홉 식구와 처가까지 먹여 살린다고 평생 좁은 이발소에서 남들 머리만 깎은 아버지처럼 살게 될 것 같았다. “무지무지 싫었어요. 여기만 있으면 답답하고 낙이 없잖아. 평생 이것만 하다 죽겠더라니까.”


그길로 뛰쳐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서 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양은솥, 자동차 엔진을 만들었다. 타일을 붙이고 재봉틀 돌리고 건축 현장에서 등짐도 지면서 “이발 빼고도 열다섯 가지 일을 해봤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위험하거나 고되어 평생 삼고 싶은 업이 없었다.


일주일에 닷새는 밖으로 나돌고 이틀은 돌아와 머리를 깎았다. 이윽고 이발소는 직원들에게 맡겨 놓고 아예 전국을 떠돌면서 세상 구경을 했다.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산골과 바닷마을을 다니며 어르신들 머리를 잘라주고 밥을 얻어먹었다. “전국 팔도 어디에도 나만큼 기술 좋은 이발사가 없더란 말이야. 사람들 머리 깎아주는 게 살길이구나 깨달았지 뭐.”


그맘때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호통을 쳤단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얼른 집으로 올라가라고. 묘한 기분이 들어 돌아왔더니 이발소에 손님이 없어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한다. 서른일곱, 직원 셋을 모두 정리하고 혼자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 사촌동생 소개로 강화도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아홉 살 연하의 아내를 만나 늦장가를 들고 외동아들을 낳았다.


이발은 비눗물을 머리에 바르는 일로 시작된다. 분무기로 칙칙 뿌리지 않고 부드러운 토끼털 붓으로 살살 둥글리며 바른다. 한 사람 머리를 자를 때 한 시간쯤 걸린다. 최소 3~4개의 가위와 빗을 대고, 감자 전분을 톡톡 칠해 튀어나온 머리를 한 올 한 올 다듬는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파란 물뿌리개와 식초물로 머리를 감긴다. 외할아버지부터 이어온 이발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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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이용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위기의 이발소, 그래도 지조를 지켰다


“고종의 단발령 이후 호황을 누리던 이발소가 울상이 된 것이다. 장발 풍조로 손님이 줄자 먹고 살기 위해 값을 올려야 했고, 그 방법으로 칸막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변태를 벌이다, 사회 문제로 지탄을 받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청소년들 머리 자유화로 손님은 더 줄고 남학생의 미장원 출입이 잦아졌다. 구태여 퇴폐라는 곳에, 비싼 곳에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1983년 7월 20일 자 조선일보 만물상은 이발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당시 보건사회부 조사 결과 이용업소 40%가 퇴폐 행위를 한다는 통계도 있다.


퇴폐 이발소 이야기를 꺼내자 이남열 이발사는 넌더리를 냈다. 교도소에서 이발 기술을 배우고 나온 출소자들이 면허를 따서 우후죽순처럼 이발소를 차렸다고 했다. 정도(正道)로는 장사가 안 되니 커튼이나 칸막이로 밀실을 설치해 놓고 여자 종업원을 고용해 성매매를 하는 곳들이 판쳤다.


“말도 마요. 내가 퇴폐 이발소 때문에 제때 장가를 못 들었다고. 삼색등을 달아놓고 그짓들을 하잖아. 이발사라고 하면 이미지가 아주 더러웠지. 나는 돌아오고부터 남자든 여자든 종업원을 한 명도 안 썼어요. 그렇다고 ‘모범 이발관’이라고 유세도 안 떨었어요.”


조용히 지조를 지켰더니 볕이 들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가 터지고 많은 이발소가 문을 닫았지만 성우이용원에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을 쏟아 보통 이발소보다 2~3배 시간이 걸리는 그의 손에 ‘돈깨나 벌던 양반’들이 머리를 맡겼다고 했다.


“그때 노났지. 저 청파초(이발소에서 300m쯤 떨어져 있다)까지 줄을 섰다고. 한 사람 깎아서 4000원 받을 때인데 한 달에 500만원씩 벌었어. 그렇게 2년 정도 버니까 연립주택이 떨어지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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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내부. 이발 의자에 피대가 걸려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이발사의 기쁨과 슬픔


좋은 이발이란 무얼까. “깎은 티가 나면 그건 나쁜 이발이에요. 가위나 기계(바리캉) 댄 흔적이 없이 길이만 짧게 하는 것. 머리가 난 방향대로, 원래 그런 것처럼 자연스러워야지. 석 달이 지나도 지저분하지 않고 그저 깎아내면서 그 형태를 유지하게끔 하는 게 기술이에요.”


손님의 콤플렉스를 포착해 슬쩍 보완해 주는 것이 ‘플러스 알파’다. 주걱턱, 넙데데한 광대, 납작한 뒤통수 같은 단점을 머리 스타일로 가려주면 100% 웃돈(팁)이 나온다고 했다. 이발사의 보람을 묻자 이남열 이발사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봐도 기가 막히게 깎아놨는데 손님이 팁까지 얹어 주면, 그게 최고로 만족했다는 거야. 손님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 내 일이오. 오죽하면 옛말에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고 했겠어요.”


‘가위손 인생’을 후회한 적도 있을까. 연장 서랍 밑을 뒤적이더니 메모 뭉치를 꺼내 보여준다. 비오는 오후 손님을 기다리며, 혹은 ‘진상’ 고객이 다녀간 밤에 이따금 적어 내려간 일기다.


“이발사의 업. 성도 이름도 모른다. 단 얼굴만 기억할 뿐이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로 시작이 된다. 사각사각 헤어스타일이 마무리된다. 아쉬움과 함께 ‘안녕히 가십시오’로 끝난다. 왜 이발일이란 통성명이 필요 없을까? 요구하면 거리가 멀어지며 끊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 하루도 아닌 반세기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어떤 때는 서글프기만 하다. 서로가 믿음은 있되 친밀감이 없는 사이일 뿐이다. 왜 그럴까? 서비스업의 생태일까? 안쓰럽고 측은하며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이다. 나에게 아직 종교는 없다마는 이럴 때 ‘오~ 신이시여 굽어 살피소서’라는 말을 하고 싶다. 좋은 직업일까? 묻고 싶다.”


그림을 그려 이만큼 벌어 먹고 살 수 있었다면 그는 화가가 됐을 거라고 했다. 어디서 배운 적은 없지만 예순 넘어 크로키를 하기 시작했다. 이발소 곳곳에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 ‘낭만논객’ 고 김동길 박사,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 초상화를 찾을 수 있다. 그가 그린 얼굴들은 입매와 눈빛에 힘이 있다. “내가 봤을 때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 비범한 사람을 주로 그린다”고 했다.


보람있고도 서글픈 이발사의 길을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단골 손님 사이에서도 ‘성우이용원 4대 이발사’가 나올지는 초미의 관심사다.


“(아들이) 얼마 전엔 이발 배우려면 몇 년 걸리냐고 물어보더라고. 관심이 생긴 모양이야. 지금 유통 회사에서 팀장을 하고 있으니 사람 대하는 법은 얼추 배웠어요. 이발사 기술의 절반은 사람 다루는 일이야. 이발 기술은 지가 평생 배워가면 되는 거지.” 그러고선 소매를 걷어 올려 딴딴한 삼두 알통을 뽐내며 말했다. “일단 100년까지는 내가 거뜬히 할 거라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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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이용원의 현재 외관. 오랫동안 옛 모습을 간직했던 성우이용원은 2019년 태풍으로 건물 일부가 무너지자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조립식 건물로 리모델링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이건희 회장 머리도 깎았다


이발쟁이라고 무시하는 이들은 있지만 이발은 전쟁통에도 외환위기 때도 꼭 필요했다. 그것은 곧 남자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고 이남열 이발사는 믿는다. “어떤 손님들은 나더러 이발사가 아니라 조각가라고 하더라고. 깎는 게 아니라 빚는다고.”


최고의 기술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머리는 이른바 ‘중령 머리’다. 소령도 대령도 아닌 중령 머리는 대관절 뭔가. 그에 따르면 ‘옆머리를 너무 바짝 깎아 피부색이 드러나면 안 되고, 발라 넘기면 깔끔하게 이마가 드러나면서도 적당한 볼륨감이 있어 점잖은 인상을 주는 머리’라고 했다.


중령 머리를 잘해선지 이발소에는 경찰이나 군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기억에 남는 단골 손님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호원. 1980년대부터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될 때까지 30년 넘게 다녔다고 했다.


“해병대 대령 출신이었어요. 그 경호원이 나더러 ‘각하 머리를 깎아드리게 해야 하는데 청와대 못 데리고 들어가서 미안하다’고 늘 그랬어요. 우리 외숙부가 납북됐거든. 거기서 살려니까 충성을 한 거예요. 북에서 국가보위부 차장까지 했으니까 연좌제로 내가 청와대는 못 들어가지.”


이건희 회장도 몇 차례 찾아왔다. 첫 방문은 2011년 2월 7일, 오후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와 ‘저녁에 이발을 할 수 있겠냐’고 했다. 해가 지고 새까만 고급 승용차가 가게 앞에 서더니 이 회장이 혼자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이발사는 단박에 알아봤지만 놀란 체는 안 했다. 이 회장은 조용히 이발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맡기곤, 한마디만 남기고 갔다. “전통 이발 잘 하고 갑니다.”


그 후로 이 회장은 예닐곱 번 더 찾아왔다. 손님은 어떻게 해달라는 말도 없이 자리에 앉고, 이발사는 어떻게 해드리냐 묻지 않고 가위질을 했다. 2만5000원을 꼭 맞춰 준비해 와서 주고 갔다.


이건희 회장 얘기에 머리 깎는 손님도, 기다리던 손님도 한마디씩 하며 이발소가 술렁술렁해졌다. 머리숱은 많았느냐, 성격은 어땠느냐 질문에 “이발사와 손님 간의 신뢰”라며 말을 아꼈다.


순서를 기다리던 용산구 정씨가 대신 우스갯말을 한다. “그 양반, 하늘나라 가서 정주영 회장이랑 만났다면서요. 그런데 둘이 막걸리 한잔을 못 했다는 거 아녜요.” 왜냐고 묻자 답하기를, “둘 다 돈을 한 푼도 안 가져갔잖어!”


머리 깎던 김씨가 피식한다. “그렇긴 하네.” 95년 한자리를 지키는 이발소는 어떤 날은 동네 사랑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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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열 이발사가 면도칼을 말가죽 피대에 긁어 날을 세우고 있다. 피대는 아버지가 1950년대 미군 PX에서 구입해서 쓰다가 물려준 것이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켜온 것과 바꿔가는 것


“아버지한테 배운 기술은 지금 다 없어졌어요. 내가 새로 익히고 바꾼 거예요. 이 터, 그리고 정신적인 것만 남았어요.”


대를 이은 정신은 첫째, 도구를 완벽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팻날을 잘 가는 목수가 마름질도 잘하지. 이발도 연장 잘 가는 사람이 기술도 좋아요. 연장 갈 줄 모르는 사람한테 머리를 깎지 말라는 얘기야.” 빗 하나도 질긴 종이에 빗살을 다듬어 쓴다.


누가 시키지도 않지만 유니폼처럼 매일 흰 옷을 입고 출근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원래 이발사는 흰 옷을 입어야 돼. 면도칼 하나도 피부에 닿는 거니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관리해야지 않겠어요? 위생을 다루는 일이야. 그러니 이발사는 흰 옷이 가운이고 제복이지.”


그리고 하루의 맨 처음과 마지막 손님에게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첫 손님은 마수걸이니 하루 장사가 잘 되려면 당연히 흡족하게 깎아야 한다. 더 어려운 것이 마지막 손님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 ‘이것만 하고 들어가 쉬어야지’ 하는 마음을 접어두고 손님이 끝 순서인 것을 모르게 하는 것이 외할아버지부터 아버지를 건너 물려받은 원칙이다.


그는 “지킬 것과 바꿀 것이 각각 있는 것”이라고 했다. 면도칼과 가위는 제 손에 맞는 것으로 새로 사서 길들였다. 이곳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150살 난 면도칼은 1966년에 퇴직하는 일본인 이발사에게 1200원 주고 산 것. 날 가는 법은 일본 이발사에게 다시 배웠다. 아버지는 끝내 익히지 못했던 전동 바리캉도 아들은 혼자서 배워 능숙하게 다룬다.


“숱가위가 옛날에는 15발짜리밖에 없었어요. 그걸로는 숱밖에 못 쳤지.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25발, 27발, 30발짜리도 나오더라고. 내가 지금 제일 많이 쓰는 건 40발짜리예요. 저걸 갖고 어느 정도 깎아 놓고 민짜 가위로 다듬어 보니 멋있는 머리가 나오더라는 거야. 이렇게 기술은 한이 없어요. 몇 년 했다고 유세 떠는 건 순 가짜들이야. 스스로 개발하지 않으면 100년을 한대도 이름값을 못 하거든.”


일흔넷 이발사는 아직도 통달을 못해 오늘도 배운다고 했다. 95년 된 이발소에서 70년 된 피대로 면도날을 세우고 60년째 가위를 쥐고도.


[김은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