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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맛의 최전선' 스페인을 가다

발라봐? 먹어봐!

by조선일보

'전위 요리의 선봉장' 스페인… 미쉐린 셰프들은 왜 립스틱을 식탁 위에 올렸나

 

'맛의 최전선' 스페인을 가다

 

과학에 감성을 더하다

음식 R&D센터서 추출한 오래된 책 냄새 '에센스'… 음식에 뿌려 추억 불러내

 

혁신의 기반은 '전통'

요리 기본인 '숯불 구이' 아이스크림·치즈에도 적용… 전혀 다른 풍미 만들어

 

맛과 코스 구성

요리 하나하나의 맛과 조화로운 코스 구성… 창조성·혁신만큼 중요

 

재미와 유머

'충격 주의' 택배상자 속 산산조각 난 우유 비스킷… 잊지 못할 시각적 경험

 

장장 3시간 동안 이어진 15코스 저녁식사의 대미를 장식할 디저트를 맛볼 차례였다. 난데없이 립스틱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이걸 먹으란 말씀이렷다. 속는 셈치고 립스틱을 깨물었다. 새콤달콤한 라즈베리 소르베(셔벗)였다.

 

이곳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박(ABaC). 프랑스의 세계적 레스토랑 가이드 미쉐린에서 별 2개(최고 3개)를 획득하며 스페인을 대표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떠오른 신성(新星)답게 기발한 재미와 유머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발라봐? 먹어봐!

바르셀로나에 있는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아박’의 디저트. 영락없이 립스팁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새콤달콤 사각사각한 라즈베리 소르베(셔벗)다. /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세계 최고 수준 식당을 영어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fine dining restaurant)'이라고 부른다. 왜 '고급' '비싼' '명품'이 아닌 '파인 다이닝'이라고 수식할까. 영어로 '파인 아트(fine art)'는 순수예술을 뜻한다. 도예, 디자인, 건축 등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 분야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예술 그 자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장르다.

 

이걸 음식에 대입해보면 파인 다이닝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단순히 배를 채우거나 일상 활동에 필요한 영양 공급이란 실용성을 뛰어넘어 미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 파인 다이닝이다. 그 최전선이 바로 스페인이다.

 

2007년 독일 카셀에서 열린 제12회 '카셀 도쿠멘타'(세계적 권위의 현대미술축제)에선 스페인 레스토랑 '엘 불리' 오너셰프 페란 아드리아(Adria)가 초청 작가 명단에 포함됐다. 요리사가 '예술가' 자격으로 초청된 데다, 서양요리 종주국으로 꼽히는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 요리사가 초청된 것이었다. '예술'의 차원에서 세계 요리의 발전을 주도하는 국가가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이라는 것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사실 21세기에 접어든 이후로 세계 요리의 주도권은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이 줄곧 잡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003년 '스페인 요리가 자만에 빠진 프랑스를 넘어뜨렸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발라봐? 먹어봐!

세계 최고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스페인 '엘 세예르 데 칸 로카'의 조안 로카 셰프가 손님에게 낼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아드리아를 좌장으로 하는 야심 찬 스페인 요리사들은 전통에 첨단 과학을 접목해 새로운 미각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리를 '코시나 방과르디아(Cocina Vanguardia)', 즉 '전위 요리(Avant-garde Cuisine)'라 명명했다. 아드리아는 2008년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엘 불리를 접었지만, 여전히 스페인 요리사들은 미각적 실험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이 창조하는 새로운 맛을 체험하기 위해 세계 미식가들이 스페인으로 몰려든다. 이 가운데는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감지하기 위해 미술관 대신 레스토랑으로 발길 돌리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의미에선 미술(美術)보다 미식(美食)이 더 빨리 세상 흐름을 반영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각의 최전선에 있는 스페인의 미쉐린 레스토랑을 돌며 새 트렌드를 찾아봤다.

마들렌 향의 '책 디저트' 먹는 순간… 입안에 '프루스트의 소설'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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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엘 세예르 데 칸 로카’의 디저트 ‘오래된 책(Old Book)’. 바삭한 과자에 100년 된 책에서 추출한 에센스를 뿌렸다. 찢어진 책장처럼 보이는 부분은 쌀로 만든 식용 종이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일부분을 식용 잉크로 인쇄한 것이다. / 김성윤 기자

세계 미각을 선도하는 스페인 셰프들은 요리라는 감각적 경험을 위해 과학을 활용한다. 이들의 요리는 흔히 ‘분자 요리(molecular cuisine)’로 알려졌다. 분자 단위 수준으로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연구·분석해 요리로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2008년 문 닫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꼽히던 ‘엘 불리’가 분자 요리 선두 주자였다.

 

정작 분자 요리 레스토랑으로 알려진 스페인 레스토랑들은 “우리는 분자 요리를 안 한다”고 주장한다. 궁극의 미각 체험을 위해 과학을 활용할 뿐이며, 과학 외에도 다양한 ‘도구’를 활용한다는 것. 이들은 ‘전위 요리(Cocina Vanguardia)’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다. 현재 스페인을 대표하는 미쉐린 레스토랑을 직접 둘러보며 전위 요리의 특징을 키워드 4가지로 분석했다.

발라봐? 먹어봐!

‘엘 세예르 데 칸 로카’ 주방에서 요리사들이 손님에게 나갈 음식을 마무리하고 있다. / 게티이미지 코리아

키워드 1: 과학+감성=첨단 요리

 

종업원이 ‘종이’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책에서 찢어낸 것 같은 종이 여러 장이 종잇장처럼 얇은 과자 사이사이 끼워져 있었다. 이어 종업원은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정체불명 액체를 종이에 똑똑 떨어뜨리더니 말했다. “이 디저트의 이름은 ‘오래된 책(old book)’입니다. 맛있게 즐기십시오.”

 

책을 먹으라고? 얇은 과자부터 집어 깨물어봤다. 향긋한 레몬향과 함께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 마들렌의 전형적인 맛과 향이었다. 이번엔 종이를 입에 넣었다. 놀랍게도 오래된 책 냄새가 코로 올라왔다. 둘이 합쳐지자 오래된 책을 펼쳐 넘길 때 누렇게 바랜 종이가 손끝에서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연상됐다. 진짜로 책을 씹어 먹는 기분이었다.

 

“어떠셨습니까? 저희 셰프가 ‘책을 먹으면 어떤 맛일까’ 궁금해하다가 창조한 디저트입니다.” 종이처럼 보인 건 쌀로 만든 식용 종이. 여기에 식용 잉크로 인쇄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 즉 작가가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자 유년기로 되돌아가는 경험을 묘사한 부분을 인쇄했다.

 

투명 액체는 100년 전 출간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실제 속지를 기름에 넣어 향을 추출한 에센스이다. “다이닝(dining)이란 음식에 대한 ‘기억’이며, 우리는 손님들의 ‘감각’을 고양하기 위한 요리를 창조한다”는 이 레스토랑의 주인, 로카(Roca) 삼형제의 철학에 걸맞은 디저트였다.

 

바르셀로나 인근 작은 도시 히로나에 있는 ‘엘 세예르 데 칸 로카’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꼽힌다. 프랑스 레스토랑 가이드 미쉐린의 최고 등급인 별 셋을 받은 건 기본. 전 세계 음식 전문가들이 선정하는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2013· 2015년 1위, 2011·2012·2014·2016년 2위에 올랐다. 맏형 조안(Joan) 로카가 전채부터 메인까지를, 소믈리에인 둘째 조셉(Josep)이 와인을, 막내 조르디(Jordi)가 디저트를 맡고 있다.

 

로카 형제가 손님들의 미각을 자극하고 놀라게 하기 위해 활용하는 무기는 과학이다. 이들은 음식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진행하는 R&D센터 ‘라 마시아(La Masia)’를 레스토랑 옆 별도 건물에 운영하고 있다. 라 마시아는 스페인어로 ‘농장’을 의미한다. 책임자 엘로이스 빌라세카는 “우리는 창의성(creativity)을 경작한다”며 웃었다.

엘 세예르 데 칸 로카: 코스 170·200유로, 홈페이지 cellercanroca.com

키워드 2: 오래된 전통? 최고의 혁신!

발라봐? 먹어봐!

①‘아사도르 에체바리’에서 바삭하게 만든 다시마로 감싼 거미게(spider crab). ②바르셀로나 ‘아박’의 라임과 테킬라로 만든 애피타이저 ‘선인장’. ③‘엘 세예르 데 칸 로카’ 올리브 아이스크림. 올리브나무 분재에 매달았다. ④‘칸 로카’의 송로버섯(트러플)을 곁들인 브리오슈. ⑤‘마르틴 베라사테기’의 네 가지 맛 버터. ⑥‘아박’의 디저트. 작은 택배상자를 열면 산산조각 난 비스킷이 나타난다. 손님을 즐겁게 하기 위한 깜짝쇼다. / 김성윤 기자

첨단 과학을 활용하지만 스페인 전위 요리는 전통에 확실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전통에 파격이 더해졌을 때 진정한 혁신이 가능하다는 것. 스페인 북서부 바스크 지역에 있는 ‘아사도르 에체바리(Asador Etxebarri)’는 전통에 기반을 둔 수준을 넘어 전통에서 새로움의 영감을 얻는다.

 

바스크 중심 도시 빌바오에서 차로 30분 가면 나오는 에체바리는 인구가 수백에 불과한 작은 마을. 겹겹이 포개진 산들로 둘러싸여 강원도 평창이나 횡성에 온 듯했다. 산림이 울창한 지역이 다 그렇듯 숯 생산지로 이름났던 마을이다.

 

오너셰프인 빅토르 아르긴소니스(Arguinzoniz)는 오랫동안 공장에서 일했던 남자. 요리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우지도, 식당 주방에서 일한 경험도 없다. 그저 숯불구이를 좋아해 아버지, 삼촌들과 함께 숯불구이 전문점을 열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불 냄새가 가득한 것이 마치 한국의 고깃집에 들어선 듯했다. 모든 요리를 숯불로만 요리한다. 스테이크는 물론 수프, 버터, 치즈,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숯불로 굽거나 훈연해 풍미를 낸다. 가장 원초적인 요리법이라 할 숯불구이가 이처럼 음식의 맛을 황홀하게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바꿔놓을 줄은 상상 못 했다. 고기와 해산물의 감칠맛을 완벽하게 살려낼 뿐 아니라, 버터·치즈·아이스크림에 불맛이 더해지며 새로운 맛의 깊이와 폭을 더한다.

 

이 궁벽한 시골 식당이 지난 2015년 쟁쟁한 식당들을 제치고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 4위에 올랐다. 미식가는 물론 요리사들이 현재 가장 맛보고 싶어 하는 식당으로 꼽힌다.

아사도르 에체바리: 코스 140유로, 홈페이지 asadoretxebarri.com

키워드 3: 맛·코스 구성의 높은 완성도

발라봐? 먹어봐!

(시계방향으로)‘아사도르 에체바리’의 오징어 먹물 소스를 곁들인 새끼 오징어 숯불구이, ‘마르틴 베라사테기’의 아몬드 디저트, ‘아박’의 푸아그라 타코. ‘엘 세예르 데 칸 로카’의 금박 입힌 초콜릿.

프랑스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스페인은 미식 선진국이 아니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미쉐린 스타(8개)를 획득한 마르틴 베라사테기(Berasategui)를 보면 스페인의 미식 성장사가 보인다. 1960년 바스크 휴양도시 산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난 베라사테기는 13세 때부터 부모 식당에서 일했다.

 

부모는 베라사테기를 프랑스로 요리 유학 보냈다. 요리 학교와 여러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베라사테기는 20세 때 부모의 식당을 맡아 5년 만에 미쉐린 별 1개를 획득했다. 1993년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레스토랑 ‘마르틴 베라사테기’를 산세바스티안 근처 마을 라사르테-오리아에 오픈했고, 2001년 별 3개라는 궁극의 영광을 얻었다. 이후 그는 스페인과 멕시코, 코스타리카, 카나리아 제도 등 전 세계에서 10여 개 식당을 운영하는 거대 레스토랑 제국을 건설했다.

 

베라사테기는 “스페인 요리가 세계적 수준에 올라설 수 있었던 근간에는 프랑스 요리가 있다”며 “프랑스의 영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칸 로카, 에체바리 등과 비교해 창조성이나 혁신성에서 다소 뒤처진다고 평가받기도 하나, 요리 자체의 맛과 코스 구성의 완성도에서 오는 전체적 만족도는 여전히 스페인은 물론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다.

마르틴 베라사테기: 코스 220유로, 홈페이지 martinberasategui.com

키워드4: 시각 유머

발라봐? 먹어봐!

①아사도르 에체바리. ②마르틴 베라사테기. ③아박. ④엘 세예르 데 칸 로카.

바르셀로나에 있는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아박(ABaC)’에서 15코스 메뉴를 시식했다. 11가지 전채와 메인을 마치고 4개의 디저트 코스가 시작할 때였다. 접시 대신 종이상자가 서빙됐다. 누런 골판지 직사각형 상자에 ‘Muy Fragil(충격에 매우 약함)’ 스티커가 붙었다. 작지만 영락없는 택배상자. 웨이터가 상자를 열자 차가운 흰색 대리석 위에 감귤류로 새콤하게 맛을 낸 우유 비스킷이 나타났다. 그런데 동그랗게 말려 있어야 할 비스킷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웨이터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이쿠, 디저트가 부서졌네요”라고 했다. 하지만 연기였다. “하하, 재밌으셨어요? 원래 이렇게 나온답니다.”

 

재미(fun) 혹은 유머의 추구는 스페인 전위 요리의 특징 중 하나다. 레스토랑을 진두지휘하는 호르디 크루스(Cruz·39)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젊은 천재 요리사다. 모델 뺨치는 준수한 외모의 크루스는 스페인판 요리 서바이벌 TV 프로그램 ‘마스터 셰프’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실력도 빼어나다. 14세 때 요리를 시작한 크루스는 24세가 되던 2004년 ‘에스타니 클라르(Estany Clar)’에서 미쉐린 별 1개를 획득한다. 스페인 최연소, 세계 둘째로 어린 나이에 미쉐린 별을 획득한 셰프라는 기록을 세웠다. 가는 식당마다 별을 따준 크루스는 2010년 아박으로 이직했다. 아박은 크루스의 진두지휘 아래 2012년 별 2개를 받아 유지해오고 있다.

 

우유 비스킷은 ‘부서졌지만’ 맛있었다. 싱긋 미소가 지어졌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닌 잊지 못할 경험을 제공하는 곳임을 재확인하며 식사를 마쳤다.

아박: 코스 140·170유로, 홈페이지 abacbarcelona.com

전위요리(前衛料理)

스페인어로 ‘Cocina Vanguardia’, 영어로는 ‘Avant-garde Cuisine’. 스페인 정상급 요리사들이 이전에 없던 맛과 미식 체험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요리 장르. 이전의 것을 배격하고 새로운 표현 수법을 시도하는 실험적인 예술인 ‘전위예술’과 맥을 같이하는 음식이란 뜻.

히로나·바르셀로나·산 세바스티안(스페인)=김성윤 음식전문기자 편집=뉴스콘텐츠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