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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제주 倉庫 여행

by조선일보

감귤 창고는 갤러리, 감저 창고는 카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서 즐기는 '제주의 여유'

자녀 대학 보낼 때까지 돈벌이를 톡톡히 한다고 해서 제주 사람들에게 '대학나무'란 별칭이 붙은 귤나무. 아직 덜 익은 풋귤이 그득한 귤밭 한가운데 창고(倉庫)엔 그림이 걸렸다. 몇 년 전 제주말로 '감저'라 불리는 고구마 창고에 카페가 들어서더니 최근 마늘 창고를 개조한 카페·라운지 안뜰에선 사람들이 피크닉 매트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며 피크닉을 즐긴다.

제주 倉庫 여행

제주의 낡은 창고들이 하나 둘 새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오랜 세월 마늘 창고였다가 카페·라운지로 변신한 구좌읍 행원리의 ‘행온’.

동네 어귀, 밭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방치되던 창고가 그림과 사진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먼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창고가 세계 각국의 소품들을 모아 놓은 편집숍으로, 사람 발길 끊겨 온기를 잃었던 창고가 책방으로 변신해 여행객에게 시간과 여유를 선물하는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

그림, 사진 작품 만나는 ‘갤러리 창고’

나무 골조가 드러난 세모 지붕 천장 아래 꽃과 새, 인물화가 단정하게 걸려 있다. 천장과 벽 사이 반투명 플라스틱 패널로 자연광이 스며드는 한낮엔 햇볕이 조명을 대신한다.

 

중견 화가 김종학의 개인전 ‘새는 날아다니는 꽃이다’(다음 달 16일까지)를 열고 있는 제주시 월평동 중선농원(064-755-2112)은 감귤 농장을 비영리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1979년에 지어져 40여 년 동안 감귤을 품었던 감귤 창고 3개 동이 지난해 4월 이후 각각 전시장인 ‘갤러리2’, 인문학·예술 도서를 모아놓은 작은 도서관 ‘청신재(晴新齋)’, 카페(개점 준비 중)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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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원과 하얀 풍력발전기가 보이는‘행온' /2. 농작물 창고였다가 사진 갤러리가 된‘사운드 로잉' / 3. 고구마 창고 겸 제분 공장이었다가 카페로 변신한‘앤트러사이트 제주 한림점' / 4. 남 원읍 위미리에 최근 문을 연 창고 카페‘키아스마' / 5. 창고 골조를 북카페로 살려 개조한‘유람위드북스'.

제주식 돌벽을 그대로 살려낸 갤러리2에선 그동안 백남준·윤석남 등 중견 작가들의 전시가 이어졌다. 특히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열렸던 ‘백남준의 언플러그드’전은 전국 미술 애호가들에게 화제가 됐다.

 

중선농원의 문화 콘텐츠 기획과 운영을 맡고 있는 정재호(48)·김정원(46) 대표 부부는 “여행객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 등 누구나 편히 들어와 제주의 자연을 만끽하면서 문화를 즐기도록 꾸몄다”며 “농가를 개조해 게스트하우스로 꾸민 ‘태려장(太麗莊)’까지 있어 중선농원에선 뮤지엄 스테이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갤러리2와 청신재는 무료 관람 및 이용이 가능하며 태려장은 사전 문의 후 이용할 수 있다. 갤러리2는 일~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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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창고를 개조해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중선농원’의‘갤러리2’

서귀포시 성산읍 신풍하동로의 좁다란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붉은색 지붕에 큼지막하게 ‘SOUNDRAWING(사운드로잉)’이라 써놓은 농가 창고가 눈에 들어온다. 인물·풍경 사진작가 송철의(38)씨가 지난 7월 문을 연 사진 갤러리 사운드로잉(010-3241-2612)이다. 갈아놓은 무밭 너머 덩그러니 자리한 창고의 묵직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비롭고 묘한 풍경의 사진들이 펼쳐진다. 방치돼 있던 농작물 창고를 살려낸 것은 보랏빛으로 물든 바다, 호수 그리고 인물을 담은 ‘사진’들이다. 창고 가운데 낡은 팔레트 나무 테이블은 차가운 시멘트벽에 따뜻한 감성을 입혔다. 사운드로잉은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하나 사전 문의 후 방문해야 한다. 인근 삼달리에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이 있어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간 김에 두루 둘러볼 만하다.

소품 모아놓은 편집숍, 책 읽는 북카페 창고제주의 동쪽 끝 구좌읍 종달리의

달리센트(인스타그램 @dalriscent_official)는 이곳이 고향인 전직 잡지기자 양효신(39)씨가 공들여 모은 소품을 만날 수 있는 편집숍. 밭 한쪽에 외따로 우뚝 서 있는 회색빛 허름한 감귤 창고의 문을 열면 그야말로 반전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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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각국에서 수집한 소품을 만나볼 수 있는 ‘달리센트’.

작은 간판 하나만 단 달리센트의 소박한 외관과 달리 실내엔 어머니가 쓰던 고가구와 나무 팔레트, 오래된 사다리, 케이블 드럼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위엔 양씨가 수시로 해외 각국에서 수집해온 장식품, 문구류, 액세서리, 엽서, 액자, 그릇, 책들이 놓여 있다. 종달리란 지명의 이름을 딴 ‘달리’에 향기를 뜻하는 ‘센트(scent)’를 더해 ‘향기가 있는 달리’를 의미하는 가게 이름이 말해주듯 향과 관련된 제품들도 다양하다. 사방으로 난 커다란 격자창 너머론 지미봉, 우도, 일주도로가 그림처럼 내다보인다. “오래된 창고는 특별한 인테리어 없이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죠. 제주의 감귤 창고야말로 가장 제주스러운 공간이 아닐까요?” 양씨의 말.

제주 倉庫 여행

‘달리센트’의 소품들.

제품을 수집하러 주인이 해외에 나가는 일이 잦아 운영 시간은 ‘주인장 마음대로’다. 공식 인스타그램에 미리 공지하니 방문 전 참고하는 게 현명하다. 방문 시간을 예약하는 것도 헛걸음을 방지할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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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사진 갤러리 ‘사운드로잉’, 편집숍 ‘달리센트’, 카페·라운지 ‘뉴저지’의 외관.

최근 제주엔 마을마다 책을 테마로 한 서점과 북카페가 눈에 띄게 늘었다. 그중 창고 형태를 그대로 살려 인테리어한 책방과 북카페도 있다.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의 인공위성제주(070-4147-0255)는 마당이 있는 양옥을 개조해 꾸민 서점으로 집처럼 편한 분위기에서 독서할 수 있다. ‘질문을 찾아 떠나는 여행, 인공위성 제주’라고 쓰인 간판을 보며 마당으로 들어서면 레몬색 양옥집과 파란색 창고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유리창 너머 소담스러운 마당이 내다보이는 창고는 비 오는 날 더욱 운치 있다고. 따끈하게 구워낸 베이글(2500~5500원)을 맛보며 책을 읽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

 

제주시 한경면 왕복 2차로 도로변에 있는 유람위드북스(070-4227-6640)는 오래전 창고나 축사로 쓰이다 집, 작은 점방(店房)을 거쳐 북카페로 다시 태어난 곳. ‘디자인유람’이라는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정호선(41)씨가 복층형 구조로 꾸민 북카페다. 음료를 마시거나 북카페 이용료 3000원을 내면 다양한 장르의 책 7500여 권을 시간 제한 없이 자유롭게 꺼내 읽을 수 있다. 1층 안쪽에 있는 ‘만화방’도 인기지만 1층이 내려다보이는 위층 구석 자리도 자리 경쟁이 치열하다. 저지리 예술인마을, 제주현대미술관, 오설록티뮤지엄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

 

제주=박근희 기자 이경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편집=뉴스콘텐츠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