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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땅끝마을' 100년 한옥에서 하룻밤… 수제 맥줏집·식당으로 변신한 곳도

두툼한 광목이불, 삐걱거리는 마루… 추억이 客들 발길 이끄네

by조선일보

누군가에게는 '노루잠으로 눈을 붙이는 시늉만 하고'(김주영 소설 '객주' 중) 잠시 머물다 가는 곳, 누군가에게는 역작(力作)을 탄생시킨 집필실이었다. 때로 피신(避身), 피정(避靜) 또는 수양(修養)의 공간이 되고, 어떤 이에겐 영감 충만한 아틀리에가 되어준 곳, '여관'이다.

 

옛 정서를 오롯이 간직한 전북 순창 역전 부근 '금산여관'의 좁은 방엔 여전히 객(客)들이 찾아들며 고단한 여정을 풀어내고 몸을 누인다. 남도 문학 기행의 필수 코스가 된 전남 보성군 벌교읍 '보성여관'은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 나온 뒤 여행객들이 부쩍 늘었다.

 

번화한 도심에서 퇴락의 길을 걸으며 씁쓸하게 모습을 감추는 대신 예술의 옷을 입고 열린 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여관도 있다. 서민들을 품어내며 길게는 100년의 세월을 이고 지고 온 오래된 여관으로 발걸음 했다.

두툼한 광목이불, 삐걱거리는 마루…

(왼쪽) 1935년 번화하던 전남 보성군 벌교의 중심에 들어선 보성여관. 당시 지금의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가 한때 퇴락의 길을 걸었지만, 복원 사업을 거쳐 2012년 재개관 후 ‘문화재 스테이’ 명소가 됐다. / 1. 소담스러운 마당을 품은 '금산여관'. 2. 오래된 여관을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민 대구 '문화장'. 3. '보안여관'의 외관. 4. 부티크호텔로 변신한 서울 익선동 '낙원장'의 열쇠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두툼한 광목이불, 삐걱거리는 마루…

1. ‘옛날 TV’와 옛날 가구로 꾸민 벌교 ‘보성여관’의 소극장. 2. 전북 순창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금산여관’의 예스러운 간판. 3. 전시 공간으로 자리 잡은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그대로 멈추거나 현대식으로 바꾸거나… 오래된 여관 생존법

골목마다 여관이 성업했던 때가 있었다. 그 옛날 여관은 집 없는 사람들에겐 저렴한 월세로 장기 투숙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주고, '통금(통행금지)' 있던 시절엔 하룻밤 묵어갈 서민의 임시 피신처가 되어 주기도 했다.

 

최신식 시설을 갖춘 호텔과 모텔,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고, 24시간 카페나 영화관에 심야 교통수단까지 늘면서 여관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관(旅館)이란 이름 그대로 나그네나 여행자를 위한 공간으로 건재하는 곳도 있다.

 

전북 순창군 순창시외버스터미널에서 느린 걸음으로 5분, 좁다란 골목 안으로 빛바랜 금산여관(063-653-2735)이란 간판 하나가 전봇대 엉킨 전깃줄 사이로 뾰족 얼굴을 내민다. 어느 변두리, 시골 역 근처에 있을 법한 평범한 여관이지만 여행자들 사이에선 "금산여관 하나만으로도 순창 여행은 충분하다"는 말이 돌 만큼 발걸음을 묶어두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덕분에 하룻밤 묵으려고 들렀다가 '장기 투숙자' 되는 이들도 많다.

 

두툼한 광목이불, 삐걱거리는 마루…

‘보성여관’의 객실(위)과 ‘금산여관’의 욕실.

삐거덕거리는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담한 마당을 품은 'ㅁ'자 형태의 한옥이 펼쳐진다. 마당엔 집의 키를 이미 넘어선 개가죽나무, 이제 막 다디단 열매를 대롱대롱 매단 무화과나무, 사과나무가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 1930년대 지어져 1960년대부터 여관이었다가 11년 동안 폐가로 방치되던 곳을 최대한 옛날 모습으로 복원했다. 옛 여관 구조와 세월 흔적 묻은 소품을 만끽할 수 있다.

 

'101호' '102호' 작은 문패를 단 여닫이 목문을 열면 두서너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만한 아담한 방이 나온다. 수놓은 광목 이불이 방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안쪽으론 옛 목욕탕 타일이 붙은 욕실과 화장실이 있다. 마당에 있는 야외 책장엔 20여 년 전 베스트셀러들이 꺼내 보는 이 하나 없는 듯 빛바랜 채 그대로 꽂혀 있다. 투숙객들은 멀리 나가는 대신 고무신이나 편한 슬리퍼를 신고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보며 사색에 잠긴다.

 

"최대한 이 집에 있던 것을 그대로 복원해 쓰고 있다"는 주인 홍성순(52)씨는 "집이 멋스럽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좀 심란하다"며 웃었다. 전화번호도 옛날 금산여관 번호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이따금 투숙객들과 함께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덕치면 김용택 시인의 집에 마실을 다녀오기도 한다고. 숙박비는 1인실 3만원, 2인실 5·7만원(조식으로 빵, 커피 무료 제공). 여관 입구 '방랑싸롱'은 이 여관에 여행 왔던 장재영(43)씨가 아예 자리를 잡고 방랑객들을 위해 차린 카페다. 순창 수제 맥주와 무슈라테가 유명하다.

두툼한 광목이불, 삐걱거리는 마루…
두툼한 광목이불, 삐걱거리는 마루…

김일엽과 나혜석, 이응노가 머물렀던 충남 예산 ‘수덕여관’.

금산여관이 오래된 한옥의 공기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서울 종로구 익선동 낙원장(02-742-1920)은 1980년대 있던 여관의 아날로그 감성은 그대로 살리고 현대식 스타일로 재탄생시킨 부티크 호텔이다. 프런트 데스크에 해당하는 '리셉션 라운지'에서 체크인하면 카드키 대신 '낙원장'이라고 쓰인 묵직한 옛날 여관 열쇠를 준다.

 

루프톱 포함 전체 6층 건물로 2층 프라이빗 다이닝 역시 객실을 별실처럼 활용해 코스식을 제공한다. 엘리베이터는 없지만 높은 층일수록 익선동의 한옥 전망을 볼 수 있다고 소문나 기꺼이 5층 한옥 뷰를 택하는 이들도 있다. 호텔 바로 옆에 '동남아' '창화당' 등 익선동 맛집이 밀집해 있다.

작가에겐 소설 공간, 화가에겐 아틀리에… 예술적 영감 준 그 여관

네모난 격자창이 보이는 카페,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밟고 올라서면 보이는 다다미방. 피곤에 지친 떠돌이들은 이곳에 누워 가족을 떠올렸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불안한 시대를 고민하거나 밀담 나누었을 것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임권택 감독이 만든 동명(同名)의 영화 속 반란군 토벌대 주둔지로 등장했던 '남도여관'. 실제 모델로 알려진 전남 보성군 벌교읍의 보성여관(061-858-7528)을 둘러보다 보면 그 시절의 사람들과 태백산맥 속 인물들의 대화가 튀어나오는 듯하다.

 

1935년 일본식 목조 건물로 건립돼 근현대를 거치며 조용히 세월의 풍화를 견뎌오던 보성여관은 2004년 등록문화재로 등재된 이후 2009~2011년 보수 공사를 거쳐 2012년 재개관했다. 크게 카페, 전시실, 소극장, 자료실, 숙박 동으로 이뤄져 있는데 '문화재 스테이'가 가능한 숙박 동에선 숙박을 하며 여유롭게 벌교 '태백산맥 문화거리'에서 근현대의 삶을 체험해볼 수 있다. 객실은 한옥 동과 일식 동으로 나뉘어 있고 2인 기준, 숙박비는 8만~15만원(조식으로 빵과 차 제공). 보성여관 홈페이지(boseonginn.org )를 통해 예약 후 이용할 수 있다. 숙박 동 외에 전시실, 자료실 등은 일반 관람 가능하다. 입장료는 성인 10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500원이며 3000원을 추가하면 카페에서 음료를 제공한다.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자 소설가인 나혜석이 생의 말년에 작품 활동을 했던 충남 예산군 수덕여관(041-330-7700)은 고암 이응노 화백이 한국전쟁 때 피란처로 사용한 집으로도 유명하다. 덕숭산 자락,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에 자리 잡은 초가집 형태의 수덕여관은 여류 문인이자 승려인 김일엽을 따라 수덕사를 찾은 나혜석이 3년 동안 기거하며 이응노와 함께 예술을 논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지인들을 만났다고 한다.

 

나혜석에게 그림을 배우려고 이곳을 찾았던 이응노는 나혜석이 떠난 후 낡은 수덕여관을 인수해 현판도 직접 달고 조각도 새기는 등 수덕여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덕여관은 사찰 안에 있고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돼 템플스테이 외 투숙은 불가하며 일반 관람객은 외부 관람만 가능하다. 별도 관람료는 없지만 수덕사 입장권(성인 3000원)을 끊어야 관람할 수 있다. 바로 옆 수덕사선(禪)미술관(041-330-7735)에선 불교 미술과 이응노 작품을 두루 감상해볼 수 있다. 수덕사선미술관은 화요일 휴무.

두툼한 광목이불, 삐걱거리는 마루…

'예술' 입고 투숙객 대신 관람객 받는 낡은 여관

서촌 나들이 명소인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02-720-8409)은 우리나라 최초 문예동인지인 '시인부락'을 탄생시킨 산실(産室)이다. 1936년 시인 미당 서정주는 이곳에 머무르며 김달진, 김동리 등과 함께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인 2007년 보안여관은 '예술'을 입고 작가들을 위한 전시 공간, 시민을 위한 무료 관람 공간으로 용도 변경했다.

 

보안여관은 전시가 있는 기간이면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둔다. 현재 통의동 가을 축제인 '서울루나포토 2017'(17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검붉은 벽돌 낡은 건물의 내부로 들어서면 철거를 앞둔 폐가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만 방마다 작가의 실험적 작품이 전시돼 있다. 보안여관의 연장 공간이자 카페, 책방, 게스트하우스를 갖춘 예술 공간인 '보안 1942'가 더해져 요즘 더 '핫'해졌다. 특히 여관으로 변신한 3~4층 7개의 숙소는 정식 개관 전이지만 입소문이 퍼지는 중이다.

 

보안여관 성공 이후 오래된 여관들은 다용도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추세다. 지난 5월 문을 연 대구 중구 문화동의 문화장(010-8599-0755)은 40여 년 된 여관 '청수장'을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문(文), 화(畵), 장(粧) 이름처럼 글 쓰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인테리어와 퍼포먼스로 공간을 꾸미는 사람들이 뭉쳐 만들었다. 건물은 크게 지하 전시 공간, 1층 카페, 2~3층 전시 공간, 옥상으로 나뉜다. 여관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민 것에 대해 문화장 잼 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여러 방으로 나뉜 여관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손색없다"며 "관람객도 방을 탐험하면서 작품에 집중할 수 있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문화장은 작품을 전시하거나 설치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1대1 큐레이팅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박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