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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박종인의 여행 속으로] 스위스

비현실 속에서는
철저하게 비현실만 즐긴다

by조선일보

그 비현실의 끝에 물가가 있다… 비현실적이다

비현실 속에서는 철저하게 비현실만 즐

현실을 벗어나본다. 열심히 살았으니까. 어차피 돌아올 현실세계, 기왕이면 아주 비현실적인 곳으로 가본다. 스위스다.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열서너 시간 서쪽으로 날아가면 나오는 곳인데, 이리도 다르다.

비현실 속에서는 철저하게 비현실만 즐

풍경이 비현실적이다. 호수가 바닥이 보인다. 빙하가 녹은 물이 산중에 갇혀 있다. 물고기며 오리가 허공에 떠 다닌다. 이름은 블라우제(Blausee), '푸른 호수'다 <사진1>. 그 풍경, 믿을 수 없다. 눈앞에 포토샵 작업을 여러차례 거친 듯한 맑은 호수가 떠 있는 것이다. 이런 크고 작은 호수가 7000군데가 넘는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한국 단위 평(坪)으로 9만평이 넘는 호수가 모두 103개다. 알프스 골짜기마다 이런 호수가 있으니, 그 옛날 한자문화권에서 그리워한 무릉도원이 알고 보니 스위스에 있는 게 아닌가. 그 하고많은 호수 가운데 레만 호숫가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죽었다. 에이즈 감염을 고백하고 다음날 죽었다. 레만 호숫가 몽트뢰에 있는 프레디 동상은 손을 치켜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진2>. 우리 또한, 그를 위하여 경배.

비현실 속에서는 철저하게 비현실만 즐

블라우제는 체르마트로 가는 길목에 있다. 체르마트는 인터라켄과 함께 마테호른(4478m)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스위스사람들은 마테호른 아래 고르너그라트 역까지 기찻길을 뚫어놓았다. 역 높이는 해발 3100m다. 그 높은 곳까지 선로를 놓은 것도 비현실적인데, 그 개통 연도가 1898년이라는 사실을 알면 사람이 멍청해진다. 그때 우리는 광무2년, 대한제국시대였다. 융프라우를 빼놓을 수 없다. 해발 4158m다. '어린 귀부인'이라는 뜻이다. 융프라우 아래 마을 이름은 그린델발트다. 맑은 날 아침, 마을은 위 사진처럼 생겼다.

비현실 속에서는 철저하게 비현실만 즐

장작불 땐 연기가 자욱하고, 미니어처 같은 집들이 역시 미니어처로 만든 잔디밭에 박혀 있다. 엄연히 사람이 살고, 소가 머리를 처박고 하루종일 풀을 뜯는 초원인데 왜 저리 비현실적인가. 감성이 완전히 말라버린 사람도 이 풍경 앞에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어서, 관광객 마음까지 비현실적으로 변한다. 머릿속 천사가 속삭인다. 이것은, 동화다. 이것은 허구다…. 역사며 문화 따위는 잊기로 한다. 관광객의 뇌 용량은 한계가 있다. 역사, 문화 따위를 깊게 파고들면 비현실적인 풍경을 즐길 여유가 없다. 비현실 속에서는 철저하게 비현실만 즐긴다.

 

그 비현실의 끝에 물가가 있다. 비현실적이다. 융프라우 산악열차 왕복 210프랑. 한국 돈 25만원. 느껴지는가. 푸른호수 입장료는 7프랑, 7700원이다. 둘이서 패스트푸드 햄버거 세트 시켜 먹으면 2만원이다. 비현실적 풍경과 물가 사이에서 관광객은 점점 현실감을 되찾는다. 하지만 늦었다. 지갑은 이미 저 설산(雪山)에, 저 푸른 초원에, 깊이 모를 푸른 호수와 와인 잔에 다 털렸다. 그러지 않으려면 품질 좋은 패키지여행이 최고다. 그 다음은 렌터카다. 데이터 빵빵하게 채워넣고 구글맵을 켜면 운전은 쉽고, 어디든 갈 수 있다. 그 다음은 기차다. 여행 수단이 무엇이 됐든, 뇌 한 구석에 현실감각은 반드시 켜둔다. 특히 물가에 관해서는.

 

글·사진=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