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여행 ]

반짝 봄꽃의 허무함에 속상했나… 늘푸른 소나무 품속 속리산에 오르다

by조선일보

[충북 보은]

 

600살 넘은 정이품송… 세조 행차 때 가지 들어올려 벼슬 받고 ‘결혼’까지

'호서지방 제일 가람' 법주사… 양옆으로 밑둥 굵은 소나무 오리숲길 따라 법주사 도착

세조길 따라 산책… 법주사 매표소에서 출발 세심정 갈림길까지 이어져

임한리 솔밭… 4만평의 거대한 소나무숲

반짝 봄꽃의 허무함에 속상했나… 늘푸

충북 보은군 임한리 솔밭에 누워 바라본 하늘. 봄이라고 세상은 이제 막 새싹을 틔워내느라 바쁜데, 소 나무는 계절에 무심한 듯 이미 푸르다(왼쪽).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본 삼년산성. 산성을 따라 길이 잘 나 있어 트레킹하기 편하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사계절이 뚜렷해 한반도의 산은 슬프다. 잎과 꽃과 열매를 품어볼라치면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금세 헐 벗는다. 그래서일까. 일장춘몽(一場春夢)의 덧없음을 안 어떤 산들은 소나무를 품었다. 충북 보은군에 있는 속리산이 그렇다. 화려하진 않지만 사시사철 그윽하게 늘 푸르다.

 

봄은 기어코 찾아왔고, 곳곳에 막 피어난 새싹을 보니 마음이 동요(動搖)한다. 섣불리 봄에 설렜다가 곧 몰려올 허무함을 알기에 이번엔 소나무를 품은 속리산으로 향했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나 한결같이 푸른 속리산은 여전히 묵묵하게 솔향을 내뿜고 있었다. 소나무가 늘어선 잘 닦인 산길과 법주사를 거닐며 성큼 다가온 봄 향기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벼슬 얻고 결혼까지 한 소나무

보은군은 오래된 소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유명하다. 널린 것이 소나무인데 유독 사람 발길 끊이지 않는 나무가 있다. 임금에게 벼슬을 받고, 결혼까지 한 정이품송(正二品松)이다. 천연기념물 103호로 나이만 6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1464년 세조가 요양 차 속리산 법주사로 향하던 길에 이 나무를 만났다.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랫가지에 걸릴까 걱정돼 "가마 걸린다"고 말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고 한다. 감명받은 세조는 나무에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정이품송을 보고 있으면 그러한 영험함이 있기를 바라게 된다.

 

속리산 맑은 계곡길을 따라 법주사로 향하다 보면 길가에 서 있는 정이품송을 만날 수 있다. 나무 높이만 15m, 둘레는 4.5m에 달한다.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나무 중 하나로 관광객이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14일 찾은 정이품송 앞에는 평일 오전임에도 찰나를 사진으로 붙잡으려는 아이들과 젊은 연인과 노부부로 북적였다. 600년 넘게 그 모습을 보아왔을 소나무는 무심한지 말을 걸어도 답이 없다.

 

정이품송의 장대한 기골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벼슬까지 받은 소나무도 나이는 이길 수 없는 법인가 보다. 쇠로 된 일곱 개의 지팡이를 붙잡은 가지는 굵고 단단하지만 메말랐다. 옛 사진을 보면 삼각꼴 모양으로 솔잎이 풍성했지만, 지금은 왼쪽 부분의 가지가 떨어져 나간 상태다. 잎이 성기어 주변의 작은 소나무들처럼 마냥 푸르지만은 않다.

반짝 봄꽃의 허무함에 속상했나… 늘푸

세조에게 벼슬을 하사받은 정이품송.(사진위) 차로 5분 거리에 정이품송과 혼인한 서원리 소나무가 있다.(사진 아래)

한편 정이품송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서원리에는 정이품송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서원리소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352호로 지정됐고 마찬가지로 600살쯤 먹었다. 정이품송이 한 줄기로 곧바로 자란 데 비해 서원리소나무는 0.7m 정도 되는 높이에서 두 줄기로 갈라졌으므로 암소나무라고 한다. 사람도 대개 여성이 더 건강하고 장수하듯 서원리소나무는 아직 잎이 풍성하다.

 

소나무가 혼례를 치르고 직접 혼인신고까지 할 일은 없고, 모두 사람이 만든 말일 테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결혼한 정이품송의 씨를 보존해야 한다며 산림청과 군청이 2001년 강원도 삼척에 있는 젊은 미인송과 두 번째 혼례를 치르게 한 것이다. 수술의 화분을 암술에 묻혀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건만 수많은 하객과 기자들을 불러모아 세계 최초로 소나무 전통 혼례식을 치렀다. 그런데 소나무의 혼례가 성사되자 서원리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정부인(貞夫人) 소나무'라고 불리는 서원리소나무가 아직 멀쩡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대대적인 혼례식을 치르는 게 말이나 되느냐며 산림청에 따진 것. 무심한 소나무를 두고 사람들끼리 난리가 난 해프닝이다.

 

정이품송 주변에는 속리산 솔향공원이 조성돼 있다. 흔하기에 무관심했던 소나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소나무전시관(043-540-3774)을 한번 들러볼 만하다. 우리나라에 있는 소나무의 종류와 쓰임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볼 수 있다. 전시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솔향공원을 가로지르는 스카이 바이크(043-542-0970)가 있다. 4인승으로 이용료는 1만5000원. 하늘에서 소나무의 정수리를 바라보는 느낌이 새롭다.

소나무 그득한 속리산 세조길 걷기

반짝 봄꽃의 허무함에 속상했나… 늘푸

세조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속리산을 물속에 담은 저수지를 만난다.(사진 위) 속리산 솔향공원 에 있는 스카이바이크.(사진 아래)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보은군청

속리(俗理·세속의 이치)에 따라 얼떨결에 스타가 된 두 나무를 등지고 속리(俗離·세속을 떠남)산이 품은 법주사로 향했다. 속리산 버스터미널을 지나자 법주사로 올라가는 찻길이 막혔다. 절 주변 교통이 혼잡해 일반 차량은 통행을 금지했다고 한다. 흔쾌히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워 짐을 챙긴다. 주차비는 한 시간에 4000원. 주변은 각종 한정식집과 기념품 상점으로 가득하다. 속리(俗離)를 위해 세운 절 주변이 항상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한 것은 늘 보는 아이러니다.

 

법주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10리(4㎞)가 안 되고 5리(2㎞)만 이어진다고 해서 '오리숲길'이라고 불린다. 산속에서 세월을 먹고 자란 밑동 굵은 소나무가 양옆에 가지런히 펼쳐진 길이다. 그득한 솔향에 취해 천천히 걷다 보면 30분이 채 안 돼 법주사에 도착한다.

 

눈을 사로잡는 것은 높이 33m의 거대한 금동미륵대불이다. 신라 제36대 혜공왕 때 승려 진표가 청동으로 주조한 후 1000여년간 유지됐다가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이 당백전(當百錢)의 재료로 쓰기 위해 훼손했다. 1939년 근대 조각의 선구자 김복진이 시멘트로 다시 대불을 제작했다. 1987년 이 시멘트대불을 그대로 본떠 다시 청동대불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부식이 진행됐고 불상으로서의 품위 유지가 어려워지자 2000년부터 불상에 금박을 입히는 공사를 시작했다. 청동에서 시멘트로, 시멘트에서 다시 청동으로, 그리곤 금동으로. 속리(俗理)에 따라 부처의 모습도 바뀐다.

 

눈이 아니라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한눈에 보이는 속리산의 주봉들이다. 법주사 입구의 우뚝 솟은 두 그루의 소나무를 지나 사천문을 통과하면 '산의 정기를 받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이 난다. 법주사 중앙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관음봉·문장대·천왕봉 등이 하늘에 닿을 듯 치솟아 있다.

반짝 봄꽃의 허무함에 속상했나… 늘푸

법주사에 있는 5층 목탑 팔상전(왼쪽)과 높이 33m의 금동미륵대불.

법주사는 533년(진흥왕 14년)에 의신 스님이 창건했다. '호서 지방 제일 가람'이란 별칭처럼 법주사 경내와 암자에는 국보 3점, 보물 12점, 시도유형문화재 22점 등 문화재로 가득하다. 특히 국내 유일하게 남은 목탑인 5층 건물 '팔상전'이 유명하다.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인 '팔상도'가 있는 건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지막 그림 속 열반에 든 부처의 평온한 모습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은 소나무를 떠올린다.

 

속리산은 산세가 험준해 문장대 같은 봉우리에 오르려면 3~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힘들지 않게 트레킹을 하고 싶다면 2016년 새롭게 조성된 '세조길'을 걸어볼 만하다. 세조가 요양 차 복천암으로 온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붙인 이름이다. 법주사 매표소부터 세심정 갈림길까지 이어진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계곡을 막으며 생긴 널찍한 저수지의 풍경이 아름답다. 저수지 안에는 속리산이 잠겨 있고, 그 위를 송사리들이 살랑거리며 헤집는다. 복잡했던 마음이 저수지에 가라앉는다.

 

아직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해 저수지에는 살얼음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봄이라며 가볍게 입고 옷 셔츠 사이로 바람이 파고든다. 법주사로 내려오는 길에 있는 찻집에서 대추차로 몸을 녹였다.

영적인 분위기 풍기는 임한리 솔밭

반짝 봄꽃의 허무함에 속상했나… 늘푸

해 질 녘 임한리 솔밭은 찾는 이가 없어 사색하 며 걷기 좋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계절에 상관없이 늘 푸른 속리산은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붐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고 싶어 법주사 버스터미널에서 차로 20분을 달리면 있는 임한리 솔밭으로 향했다.

 

임한리 솔밭은 250년 전 마을 사람들이 심은 소나무 100여그루가 자유롭게 자라 4만여평의 거대한 송림을 이룬 곳이다. 특히 사진가들에게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새벽녘이면 소나무 사이로 안개가 자욱하게 껴 영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래서 오후보다 오전 시간에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다.

 

이날 오후 임한리 솔밭에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 놓고 홀로 구부러진 소나무 사이를 거닌다. 다른 지역의 솔숲처럼 캠핑장으로 활용되거나 훼손되지 않아 한적함이 느껴진다. 솔밭 한가운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다. 그 위에 걸터 누워 눈을 감았다. 분명 찰나가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수십 분이 지나 있다. 해가 저물까 걱정돼 헐레벌떡 일어나 몸 안에 스며든 솔향을 품고 다시 속리(俗理)로 향한다.

 

보은=표태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