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라면 봉준호처럼... "리스펙트하라, 가장 낮은 자까지"

[컬처]by 조선일보

클라스가 다른 리더 봉준호… 머릿속 설계 모두 그림으로

스태프와 어린 연기자까지, 노동 시간 효율적 안배

‘옥자' ‘기생충'... 고난 겪지만 파괴되지 않는 주인공 그려

"예의 무너지면 파국… 가장 낮은 자까지 리스펙트하라"

"불안해서 영화 찍고, 영화 찍고 나면 다시 불안해"

조선일보

봉준호의 페르소나 송강호. ‘살인의 추억'에서 용의자 박해일에게 “너,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말하던 그 순간의 아득한 표정이 생각나는 ‘기생충'의 클로즈업 장면. 개봉 10일 만에 700만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10년 전 영화 ‘마더' 촬영 후 처음 만났을 때 봉준호는 말했다. "김혜자는 위대한 배우이고, 원빈은 위대함의 문턱에서 한쪽 발을 들이민 배우이며, 저는 위대해질 가망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위대해질 가망성이 없다’던 봉준호는 지금 동시대의 가장 저력있는 감독 중 한 명이 되었다.


"봉준호가 있어서 이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넷플릭스의 콘텐츠 최고 책임자 테드 사란도스는 지난 2017년 ‘옥자'의 개봉을 앞두고 모인 취재진 앞에서 말했다. 그는 봉준호와의 만남을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놀라운 일"이라고 표현했다.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제작사 플랜 B 엔터테인먼트의 공동 회장 제레미 클라이너도 "우리는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봉준호와 그의 작품을 쫓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2019년 봉준호는 제 72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현재 지구상에서 봉준호만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변방과 중심,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아우성’을 사려 깊게 담아내려는 감독은 드물다. 어떤 이야기든 우직한 몸으로, 우왕좌왕하는 인파를 뚫고 우아하게 착지하는 그의 저력이 놀라울 뿐.


지난 5월 30일 세상에 나온 ‘기생충’은 개봉 10일만에 700만 관객 돌파를 앞두며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기생충'의 감염성이 어찌나 놀라운지, 부자든 빈자든 한번 보고나면 ‘봉준호 유니버스’의 스피커가 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것 같았다.


계급을 다룬 이 ‘웅장하고 비통한 동화’는 분명 기존 봉준호 영화의 확장판임에도, 복제의 혐의마저 벗었다. 새롭지는 않은데, 놀라운 이유는 그가 자신에게 누적된 모든 탤런트를 동원해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스펜스, 유머, 부르주아, 가족… 25년 전 중편 데뷔작인 ‘지리멸렬'부터 최근작 ‘옥자'까지 봉준호의 세계관 속에 뿌려진 모든 떡밥이 ‘기생충'의 먹이로 사용되었다.


감독은 독재자이며 ‘예술적 흡혈귀’라는 생각이 만연된 영화계에, 봉준호는 놀라운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춘 상식적인 리더로 등장했다. 봉준호를 만났다. 늘 그렇듯 회색 재킷에 검은 티셔츠, 통 넓은 바지에, 앞이 뭉툭한 낡은 신발을 신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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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너드'스타일 봉준호. 이야기와 비주얼의 완벽한 설계자이자 놀랄만큼 정확한 커뮤니케이터./사진=이태경 기자

기분이 어떠신가요?


"잠을 못 자서 약간 이상한 상태입니다. 허언을 하거나 반대로 방언이 터질 수도 있습니다."


약간 하이 상태인가요?


"스포일러를 자제해주길 부탁드리면서도, 저 스스로 방심해서 스포일러를 유포할지도 모르는 상태죠(웃음)."


2017년에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영화 ‘옥자'를 들고 칸에 갔을 때는 상영 중 야유가 터졌고 일부 관객은 퇴장하기도 했지요. 이번에 완전히 대반전을 이뤘습니다.


"그때는 스트리밍 영화에 대한 논쟁이 칸에서 벌어져서, 초반에 이슈 몰이를 좀 했지요(웃음). 이번엔 가장 클래식한 방식으로 개봉을 했어요. 칸에서 황금종려상과 별개로 ‘아트 하우스' 극장 연합에서 주는 상도 받았습니다. 극과 극을 경험했달까요(웃음)."


어쨌든 한국 영화가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칸에서 그랑프리를 받다니, 환상의 타이밍이군요.


"심사위원장인 이냐리투도 그 점을 신기해했어요. 시상식 전까지는 심사위원들과 접촉이 차단된 상태였다가 폐막식 리셉션 때야 만났지요. 그때 ‘한국영화 100주년'에 대해 물어보고 놀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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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순간들.

박찬욱, 김지운 등등 동료 영화 감독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김지운 감독은 마침 영화제 기간에 프랑스에 있어서 칸에서 만났어요. 파티에 와서 진한 축하를 해줬습니다. 틸다 스윈톤도 달려와서 파티가 정말 다이내믹했어요. 박찬욱 감독은 칸에 가기 전부터 ‘상을 탈 것 같다'고 힘을 실어줬지요. 얼마 전 시사회 뒤풀이 자리에선 저와 송강호 씨에게 감격적인 헌사를 해주셨어요."


듣고 싶군요! 앞서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던 박찬욱 감독의 헌사를!


"차마 제 입으론 말 못 하겠어요."


말해주시지요.


"아니요. 못하겠어요. (그가 계속 머뭇거리자 결국 옆에 있던 홍보담당자가 박찬욱 감독의 말을 전해주었다) 완벽하다! 경의를 표한다."


작품만큼이나 정상에서 보여준 봉준호의 애티튜드는 한동안 장안의 화제였다. ‘위대한 배우 송강호의 소감을 듣고 싶다'는 봉준호의 아름다운 추임새는 "인내심과 슬기로움과 열정을 가르쳐준 대한민국의 모든 배우에게 이 영광을 바치겠다"는 공생의 멘트를 끌어냈고, 덕분에 ‘기생충'의 영광은 온 누리에 고르게 퍼져갔다. ‘칸의 제왕'은 심지어 전 세계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송강호에게 트로피를 바치는 포즈로 사람들을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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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관객에게 아름다운 상처를 안기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한 봉준호 감독. ‘기생충'으로 제 72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사진=이태경 기자

영광을 독점하거나 성공에 좀체 취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사실 매우 봉준호스러운 것이다. ‘괴물'이 천만 관객을 넘어 장기 흥행하자 오히려 그는 근심하며 "누군가 하루빨리 이 기록을 깨워주길 바랬고", ‘설국열차'가 900만을 돌파하자 "흥행이 여기서 멈췄으면 좋겠다"고 미끄러지듯 달리던 ‘천만 질주의 레일’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칸 영화제에서도 5분이 넘는 기립 박수가 이어졌을 때도 여지없이 끊고 "밤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라" "나는 배고프다"고, 흥분한 관객을 웃겼다.


‘위대함'을 타인의 몫으로 돌리는 그의 태도가 단순히 겸손과 수줍음의 결과일까? 혹 ‘존중은 나눌수록 커지 잖아요'라는 생각이 몸에 밴 일종의 철학은 아닐까?


봉준호는 인터뷰 시작부터 자신의 영광을 허물어뜨리는 자세를 취했다.


"강호 선배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땐 자세가 잘 안 나왔어요. 제 몸이 너무 몽글몽글해서 아쉬웠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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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연대. “상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송강호가 칸 영화제에서 언급한 ‘봉테일’의 가장 확실한 예는 “봉감독은 촬영장에서 식사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는 것.

외신 반응 중 어떤 코멘트가 가장 맘에 들었습니까?


"북미 쪽에선 주로 장르에 관점을 두고 봐요. 인디와이어에서 "봉준호는 스스로 장르가 되었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가장 좋았어요."


‘내 영화의 장르는 봉준호'라는 말은 재작년 ‘옥자'가 나왔을 때 그가 인터뷰에서 내게 했던 말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언급하자, 그는 수줍게 웃었다. "그랬나요? 제 입으로 떠드는 것보다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으니 더 감격했어요."


‘옥자'도 동물과 사람의 러브스토리라고 주장했습니다(웃음). 애초에 상업 영화가 만들어낸 장르라는 틀에서 이탈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나요?


"저는 처음부터 어떤 장르도 설계하지 않습니다. 코메디? 호러? 실제 생활을 보세요. 상황과 감정은 수시로 바뀝니다. 하나로 통합되지 않아요. 직장 상사와 공포의 시간을 겪고, 퇴근 후엔 애인과의 멜로의 시간이 기다리죠. 슬프면서도 웃기고 무서우면서도 애잔한, 그게 인간의 감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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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작 ‘살인의 추억'. 봉준호 영화의 모든 원형이 함축되어 있다. 어린 아이, 소녀, 가족, 억울한 자. 쫓고 쫓기는 추격전 등.

‘살인의 추억’의 논두렁 시퀀스나 ‘괴물'의 한강 소동, ‘기생충'의 가족 싸움판처럼 봉준호 영화에 ‘난장판’ 혹은 ‘난동' 장면이 시그니처처럼 들어가 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더 나아가 한바탕 소동극 형태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건, 이 희비극의 카오스에서 빠져나오려는 봉준호만의 낭만적인 ‘출구 전략'인가요?


"저는 확실히 카오스를 즐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 장면을 찍을 때 흥분돼요. 혼돈 장면과 취조 장면을 찍을 때 온몸의 피가 기분 좋게 역류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저는 무질서한 상태, 카오스가 절정에 오를 때 음악을 비벼서 장르적 쾌감을 주려고 해요. ‘기생충'에서 짜파구리 시퀀스가 그랬어요. 스크린에서 깽판이 휘몰아칠 때, 이런 식의 장르적 활기는 이창동이나 미하일 하케네 감독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지요(웃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장르의 원형으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충녀'가 떠올랐어요. 물론 훨씬 덜 신경질적이고 더 현대적이며 유머의 이빨은 더 날카로워졌더군요. 쾌와 불쾌 사이의 간을 잘 맞추는 봉준호 특유의 넉살이 좀 더 구조화됐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김기영 영화의 마니아였어요. 1994년 무렵 처음 케이블 TV에서 김기영 감독 특별전을 봤어요. 영화 아카데미를 갓 졸업해서 영화인이랍시고 폼은 잡지만, 생활비도 제대로 없어 가난하던 시절이었어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태의 반지하 집의 2/3정도 되는 시영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다른 건 돈이 없어도 유료 영화 채널을 봤어요. 하하. 그때 김기영 감독 영화에 완전히 광분해서 그걸 홈비디오 테이프에 전부 녹화를 떴거든요. ‘하녀' ‘충녀' ‘이어도’ ‘육식동물'... 김기영 감독이 살아계셨다면 제 영화 ‘기생충’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안타깝게 98년도에 화재로 돌아가셨어요."


부르주아의 욕망, 욕정을 그분만큼 치열하게 파고든 감독이 없지요.


"또 그걸 파괴하려는 외부의 침입자도 맹렬하게 그려냈어요. ‘하녀'에서 계단의 쓰임새는 아직도 기억이 나요. 꼬마 안성기가 굴러떨어지는 장면이 정말 강렬했습니다."


그는 ‘하녀'와 ‘기생충'이 동시상영 하게 되면 좋겠다고 소망을 피력했는데, 그것은 매우 봉준호다운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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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서 기택의 반지하집. 빈자의 집, 부자의 집 모두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사실 금기를 넘어서려는 작가주의 감독들의 충동은 종종 대중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공동체를 배려하는’ 저잣거리 이야기꾼으로서 봉준호의 본능은 ‘선’의 반대편 저울에 손쉬운 ‘사이코패스’를 두는 대신, 그 시대의 내밀한 사회적 공기와 시스템의 살갗을 현미경처럼 묘사하면서 설득력 있는 상업 영화 설계도를 완성해 내곤 했다.


‘빌런'이 아닌 시스템을 겨냥한다는 점, 특수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항상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봉준호는 대단히 동시대적이다.


그의 인도에 따라 우리는 ‘살인의 추억'의 논두렁과 ‘괴물'의 한강 다리, ‘설국열차'의 꼬리 칸과 ‘옥자'의 도살장을 차곡차곡 지나 마침내 그가 설계한 ‘기생충'의 괴저택에 도착했다.


밝고 깊고 좋은 냄새가 나는 곳. 이곳에서 가난하지만 웬만해선 상처받지 않는 가족과 부자지만 양식을 갖춘 가족이 만났다.


영화 속에서 고용인이 ‘선을 넘어오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이선균과 달리, 조여정은 자신의 이름 ‘연교'처럼 부자와 빈자 사이의 ‘부드러운 다리’가 되어준다. 모든 고용인에게 의존하듯 칭얼대는 조여정과 꿀린 데 없이 ‘기세등등한' 박소담은 화면 전체에 싱싱한 리듬을 부여하면서, 부자와 빈자의 전형성을 역전시킨다.


‘뺀질뺀질한’ 이선균과 ‘뻔뻔한’ 송강호가 한 프레임에 잡힐 때마다, 이 팽팽한 기싸움의 긴장은 더욱 고조된다. 계급은 다르지만 매우 효율적인 두 가족의 결합에 균열을 내는 것은 서로 다른 ‘냄새’.


감독 봉준호도 사회적 공기를 감지하는 예민한 후각을 지녔다. 그의 영화가 뇌리에 오래 남는 이유도 시각에 동반된 후각의 강력한 잔상 때문.


‘살인의 추억'의 비릿한 피 냄새, ‘괴물'의 하수구 냄새, ‘옥자'의 단백질 타는 냄새에 이어 ‘기생충'의 반지하 냄새까지… 봉준호가 비 오는 장면을 즐겨 쓰는 이유도 습기가 악취를 더 진동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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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프로젝트 ‘설국열차'에서 배우들에게 연기를 설명하고 있는 봉준호.

문득, 봉준호의 외할아버지가 ‘풍속소설의 대가'인 소설가 박태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유명한 작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천변 풍경'은 등장인물의 신변과 세태 풍속을 파노라마 방식으로 묘사했던 근대 문학의 걸작이었다.


창작자로서 소설가인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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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외조부 소설가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대표작이다.

"솔직히 외할아버지는 제게 동화 속의 인물이에요. 저희 외가는 이산가족입니다. 전쟁통에 외조부와 큰이모는 북에, 어머니를 포함한 나머지 사남매는 남쪽으로 찢어졌어요. 외할아버지는 북한에서 돌아가셨어요. 외할아버지가 유명한 소설가라는 걸 안건 고등학교 때였어요. 9인회의 일원이었으며 시인 이상과도 친하셨다고요. 사진을 가만히 보면 저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제가 외탁을 했거든요(웃음)."

 

오히려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서울과학기술대학 시각디자인과 교수이자 1세대 그래픽 전문가인 아버지 봉상균은 2017년 그가 ‘옥자'를 작업하던 시기에 작고했다.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어떤 면이 당신의 창작 욕구를 건드렸나요?


"아버지의 서재엔 해외에서 사들인 화집이 가득했어요. 외국 출장을 다녀오시면 진귀한 그래픽 책을 사오시곤 했는데, 70년대엔 흔치 않은 자료였어요. 그 영향인지 저는 5살 때부터 만화를 그렸어요. 만화가가 되고 싶었죠. 어릴 때 이미 스토리보드를 그리면서 숏 개념을 익힌 거죠. ‘기생충'도 100% 제가 촬영 전에 그림으로 설계를 다 했어요."


그 완벽에 가까운 ‘기생충' 스토리보드가 곧 아트북으로 출판된다고 했다.


아버지도 국립영화제작소 미술 실장을 하신 적이 있지요?


"맞습니다. 김기영 감독님의 ‘하녀' 타이틀을 아버지가 만드셨어요. 꼬마 안성기가 하녀와 실뜨기를 하는 장면 위에 타이포가 떠오르죠(웃음). 넓게 보면 아버지도 영화인이셨는데, 당시 환경이 좀 거칠었는지 저한텐 ‘영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제 영화를 ‘설국열차'까지 보셨어요. ‘기생충'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부친께서는 당신이 영화감독이 된다고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사람은 월급을 받아 살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직장에 다녀야 한다고(웃음). 정 원하면 방송국이나 케이블 쪽에 가서 훌륭한 드라마를 찍으라고 하셨어요. 제가 취직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아시고는 응원해주셨죠. 93년 대학에 복학했을 때 무려 제작비가 600만원이나 드는 단편 영화 ‘백색인'을 찍었는데, 당시 제작비 일부를 대주셨어요. ‘잘 완성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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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희비극 ‘기생충'.

이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자지간의 애정이 느껴지더군요.


"프랑스 배급사 대표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다른 세계에서 깜빡깜빡 교신하는 장면을 보고 아버지와 저의 관계를 연상했다고요."


봉준호는 노트북에서 아버지가 영화 촬영 스태프들과 찍은 옛날 흑백 사진 한 장을 찾아서 보여주었다. 세트장에서 촬영된듯한 그 사진에서 봉상균 선생은 양복을 입고 카메라 뒤에서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식인 분위기라면 봉 감독은 좀 더 분방한 스타일입니다.


"하하. 저는 방치된 스타일이죠. 2~3년 주기로 삭발을 하는데, 버스를 타도 아무도 못 알아보더군요. 제 머리카락은 오일을 바르면 물에 젖은 개털 같아지거든요. 흐흐."


헤어스타일은 흡사 ‘미래소년 코난’ 같습니다(웃음).


"10대 시절 KBS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 소년 코난'을 보고, 그 그림체와 이야기에 매혹됐어요. 특히 여주인공인 라나를 좋아했어요. 라나는 걸리시한 듯 하지만 코난을 구하는 장면에선 파워풀하고 파괴력도 있어요. 그래선지 저는 강한 소녀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라나는 ‘괴물'의 현서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옥자'의 미자도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와 유사성이 있지요."


10대 시절에 본 영상이 봉준호 월드의 원형이 됐군요!


"맞습니다. 10대 시절에 본 만화와 함께 개성 있고 도전적인 할리우드 영화들이 제 혈관 속에 흐르고 있어요. 저는 아직도 7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장인들이 찍은 ‘마라톤맨' 같은 영화를 강렬하게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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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부자와 빈자 중 어디에 속해 있다고 보십니까?


"케이블TV에서 김기영 감독 영화를 보며 살던 신혼 초에 저희 집은 기택의 ⅔ 정도 공간이었어요. 지금 제가 사는 곳은 박 사장 집의 ⅕ 정도 되는 공간이지요. 친구들은 다양했어요.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친구도 대리석으로 지은 거대한 집에 사는 친구도 있었지요. 영화적으로는 부자와 빈자의 양극을 묘사했지만, 저는 그 중간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지상이냐 지하냐’ 높이와 크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거리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그 거리를 무너뜨리는 건 카메라예요. 타인과 유지해야 하는 거리가 있는데, 카메라가 그 선을 넘고 있지요. 박사장과 연교가 저택의 소파에서 돌발적으로 야한 행위를 할 때, 이선균 씨는 평소의 젠틀함과 달리 상스럽게 거친 언행을 보여요. 그들에게 ‘냄새가 난다는 둥' 대놓고 할 수 없는 무례한 말을... 그 이야기를 탁자 밑에 있던 기택의 가족이 듣고 있는 상황, 그 밀접한 거리가 ‘잔인함'이 되는 거죠. 야한 듯 야비한 듯..., 타인의 사생활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다는 데 텐션이 만들어집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여기저기 코를 대고 ‘냄새’를 맡게 되더군요.


"그랬나요(웃음)? 저는 날 것의 냄새가 화면에 생생하게 보이도록 찍고 싶었어요. 결국 그 표현은 배우들이 표정으로 해냈지요. ‘기생충'은 냄새를 도구로 예의가 붕괴되었을 때 어떤 파국이 오는가를 그렸습니다."


파국을 막기 위한 그 예의는 어떻게 시작되는 건가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 상대에 대한 근본적인 리스펙트가 필요합니다. 그게 유지가 안 되면 ‘갑질'이 되는 거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힘든 처지의 인간이 밝은 곳으로 나와 외치고 싶은 한 마디가 그거예요. ‘리스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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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제스처.

나비넥타이에 트로피를 들고 매력적인 ‘승자의 제스처'를 취했던 봉준호. 만인의 ‘리스펙트’를 받은 그가 차마 자제하지 못하고 발설한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는 바로 이것이었다. ‘리스펙트!’.


‘기생이 공생이 되고 상생이 되길 바란다'고 다시한번 강조하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젠 좀 평안하신가요? 행복지수가 높아졌습니까?


"(깜짝 놀라)행복지수라니요? 숫자로 말해야 하나요?"


아니요. 만족감을 느끼는지 물었습니다.


"아니요. 저는 늘 불안합니다. 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신경정신과 의사는 약을 권하지만, 저는 불안이 유지돼야 글을 쓸 수 있어요."


그제서야 봉준호가 했던 특유의 자기비하적 농담이 기억났다.


"‘살인의 추억’ 때는 살인범이 찾아올까 불안했고, ‘괴물’ 때는 감당하기 힘든 흥행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마더’는 ‘이 영화가 나에게 무엇이고 관객들에게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 때문에 불안했죠. 정신 불안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버텨갑니다. 불안하지 않으면 그게 불안하고, 불안을 잊기 위해 영화를 찍고, 영화를 찍고 나면 다시 불안에 떠는 거죠."


나는 넘치는 인류애로 불안에 떠는 이 진실한 천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태프들의 ‘밥 때'과 어린 연기자들의 ‘잠 때'까지 설계하는 이 ‘디테일한’ 리더의 불안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랬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2019.06.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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