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창조의 핵심은 정리, 큰 덩어리로 남기고 다 버려야" 정구호

[컬처]by 조선일보

삼성, 롯데에서 동시 호출… 디자인계 ‘심폐소생술사’

"5초 안에 그림 떠올라… 항상 정답 던지고 시작"

"솔루션은 소통... 백 번이라도 반복 설득해야 결과 좋아"

"영화 감독이 꿈… 미스터리 현대극, 사극 시놉시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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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 디렉터 정구호. 그는 현재 삼성의 ‘빈폴'과 롯데백화점 본점 공간 리뉴얼을 동시 진행 중이다. 제이에스티나의 부사장 겸 CD이자, 현대홈쇼핑의 제이 바이, 코스맥스의 화장품 제품 개발도 맡고 있다./사진=이태경 기자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다채로운 공간에서 정구호를 만나면서 적잖이 혼란에 빠졌다. 어떤 날은 트레이닝 수트에 캡 모자를 쓰고 휠라 프리젠테이션을 진두지휘했고, 어떤 날은 서울패션위크 총감독으로 프런트로에 앉아 있었다. 어떤 날은 올림픽 공원 야외무대의 눈부신 조명 아래서 오페라 세트를 점검하고 있고, 어떤 날은 한국의 공예 장인들과 나전칠기를 설명하고 있었다.


대체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유통 마켓의 최전선에 있는 삼성, 롯데, 휠라, 제이에스티나 등 대형 기업은 물론 국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대표적 문화기관(국립무용단, 공예진흥원 등)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마다 정구호를 디렉터로 호출하는 이유는 뭘까?(도중 하차하긴 했지만, 그는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공동 총감독이기도 했다.)


나는 정구호의 모든 맥시멀한 행보가 그가 지닌 핵심 기술인 ‘정리의 기술' 때문임을 간파했다. 장르의 디테일 속에서 뭉텅뭉텅 특징을 찾아내고, 순식간에 그 관계를 정리해내는 힘!


"다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그 늘어놓은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자가 미니멀리스트"라고 정구호는 말했다.


모든 게 넘쳐나는 맥시멀한 세상, 무엇을 버려야 할 지 아는 미니멀리스트의 지혜가 절실하지 않은가.


10년간 일하던 제일모직을 나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정구호. 브랜드 ‘빈폴’ 리뉴얼을 명목으로 다시 한번 삼성의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선 당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만났다.


-정구호가 만지면 왜 모든 게 제 자리를 찾고 원래 그랬듯 말끔하게 정리될까요?


"다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그 늘어놓은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자가 미니멀리스트예요. 룩(look)으로 그려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는 모습. 사실 저는 패션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 엄청난 전문가가 되려고 한 적은 없어요. 나만의 시선으로 변화의 기회를 만들 뿐."


-삼성, 롯데 등 대기업의 패션과 공간 설계부터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연출까지… 이 모든 게 데체 한 사람이 소화 가능한 영역인가요? 유능한 조력자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미소지으며)저 사무실도 없이 혼자 일해요. 노트북이 제 사무실이죠. 패션과 패션 아닌 것으로 분류해 스케줄 조정을 해주는 재택근무 직원만 있어요."


-진정한 미니멀리스트군요!


"컨설팅의 핵심은 정확한 답을 내는 거예요. 만약 제가 정확한 답을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 조사하고 컨펌하고 수정하는 일은 불필요해요. 시간 낭비죠. 리서치, PPT 작업, 각종 구글링까지 전부 제가 해요. 도면을 그린다거나 하는 일만 외부 전문가에게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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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정구호가 연출한 ‘2019 한국 공예 법고창신' 밀라노 전시. 흑과 백의 간결한 정리가 돋보인다.

-얼마 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한 ‘2019 한국 공예 법고창신' 전시는 정말 놀라웠어요. 수묵의 독백을 이보다 더 우아하게 펼칠 수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큰 덩어리로 한국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책가도(冊架圖)라는 한국의 대표 그림을 입체화해서 투명 사방 책자로 틀을 짜고 그 안을 블랙 앤 화이트로 채웠어요. 수묵화 느낌을 큰 정서로 잡고 갓, 방짜 유기, 나전칠기, 반상 등 공예품을 그 안에 컴비네이션해 봤죠. 보물찾기하듯 즐겁게(웃음)."


-연출하셨던 한국 무용 작품 ‘묵향’ ‘향연'과 같은 맥락으로 보였어요.


"맞아요. 여러 장르의 일을 번잡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겐 하나의 일이었던 거죠. 다양한 형태와 컬러로 어지러웠던 오브제를 나만의 시각으로 정리해서 간결하게 보여주는 일."


-핵심 빼고 다 버리는 방식이지요? 예술계의 곤도 마리에를 보는 것 같습니다(웃음).


"수묵이라는 주제를 정하면, 그 느낌에 합한 것만 공간 안으로 들여놓는 거죠. 전통문화는 하나하나 다 너무 좋은 요소지만 한꺼번에 보여주면 산만해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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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용단의 대표작으로 해외에서도 돌풍을 일으킨 무용 ‘묵향'. 굵은 먹선으로 구획한 4개의 면. 기본적인 덩어리만 남기고 간결하게 정리하는 정구호의 무대 디렉팅이 돋보인다.

-오페라 ‘동백꽃 아가씨'는 붉은색을 주조로 컬러풀 한데도 어지럽지 않았어요.


"오방색이라고 하면 색이 혼합된 거로만 생각하잖아요. 치마, 저고리, 고름… 그런데 색동옷을 그대로 보여주면 매력적이지 않아요. 빨강, 초록, 노랑… 색을 분리해서 한 번에 하나씩만 보여주고 그럴 때조차 배경을 단순화해야 해요.


보통 전통 무대는 병풍이나 나무에 달을 띄우면서 설명을 하잖아요. 저는 설명하는 대신 추상적인 상징물을 딱 하나만 써요. ‘향연'에서는 흰 배경에 거대한 매듭 몇 개 딱 늘어뜨렸어요. 한국인은 물건을 마무리하는 데 매듭을 잘 쓰잖아요. 노리개 끈, 부채에 달고 다니는 선추, 보자기 매듭… 매듭이라는 상징으로 전통 정서의 무드를 잡아주는 거죠."


-사이즈가 큰 덩어리로 구획을 잘하는 건 정구호식 디자인의 특징인 듯합니다. 공간과 사물의 관계를 좀 묵직하게 조정한달까요. 탁월한 ‘공간 조각가’라는 느낌도 받습니다.


"일단은 핵심을 잡고 그다음엔 아이솔레이션(isolation)을 중요한 장치로 써요. 특정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사물을 개별적으로 고립시켜 놓으면 굉장한 변화가 생겨요. 그것도 일종의 정리 기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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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무대를 조선시대 화려한 기방으로 옮겨온 야외 오페라 ‘동백꽃 아가씨'. 정구호가 연출한 국립 오페라단 작품.

-순식간에 핵심을 당겨 보는 시력이 필요하겠군요.


"저만의 필터죠(웃음). 저는 문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하다고 봐요. 첫째, 역사와 전통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사람. 둘째, 전통과 상관없이 새로운 창작을 하는 사람. 셋째, 저처럼 옛것을 요즘 시대에 맞게 재조명하는 사람."


-2015년, 휠라의 부사장으로 들어가 브랜드를 리뉴얼할 때도 로고 사이즈를 키워서 존재감을 증폭시켰었지요?


"네. 1년 6개월 정도 브랜드 리뉴얼 작업을 했는데, 당시 제가 짚었던 문제점은 휠라의 헤리티지 로고가 너무 헤프게 쓰인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로고를 쓸 수 있는 패션 라인을 줄이고, 색깔도 분명하게 정리했어요. 그랬더니 40~50대만 오던 매장에 젊은이들이 몰려오면서 스트리트 무드가 형성됐지요. 다행히 휠라가 그 뒤로 젊은 브랜드로 거듭났어요. 감사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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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호는 노령화된 휠라 브랜드를 1020세대가 찾는 브랜드로 변화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여러 회사의 브랜드 리뉴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만.


"삼성물산 빈폴, 롯데 백화점 공간 리뉴얼, 현대 홈쇼핑의 패션 브랜드 J BY, 제이에스티나의 주얼리와 가방, 코스맥스의 화장품 제품 개발…"


-그 정도면 머릿속 칸이 뒤죽박죽 엉클어지지 않나요?


"(단호하게)아니요. 섞이면 그만둬야죠."


-몇 년 전 제일모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그만뒀을 때는 불화설에 ‘짤렸다'는 말까지 온갖 억측이 난무했어요. 다시 삼성의 구원투수로 등판한다는 건 매우 상징적입니다. 금의환향한 기분이 어떠신가요?


"하하. 좋은 직장을 박차고 나온다니 이상하게들 보셨죠. 2003년부터 10년 7개월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그만뒀어요. 대기업에서 받는 대우를 포기하고라도 저는 50대 초반의 시간을 자유롭게 쓰고 싶었어요. 회사를 나온 덕분에 무용, 개인전시, 기업 컨설팅을 왕성하게 할 수 있었죠.


그리고 오해들을 하시는데, 제 입지는 재입사가 아니라 컨설팅이에요(웃음). 패션뿐 아니라 요즘 모든 산업이 다 어려워요. 새로운 흐름에 맞는 확실한 결과물을 내야 하니 검증된 사람을 선택한 거죠. 제가 브랜드 구호와 빈폴 리뉴얼을 이미 8년 전에 했고 결과가 좋았거든요. 삼성뿐 아니라 제가 관여하는 모든 회사가 모두 제 크레딧입니다. 다 표가 나도록 해야죠."


-롯데 백화점 본점 공간도 정구호의 손길이 닿으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군요. L7 등 롯데 호텔을 디자인한 이력의 연장선이겠지요?


"네. 어린 시절, 롯데 백화점에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났어요. 40년도 더 전의 일이에요. 미도파와 코스모스만 있던 명동에서 롯데가 센세이셔널을 일으켰죠. 지하 식품 매장에서 유니폼에 앞치마를 두른 직원들이 웨스턴 스타일로 세팅된 음식을 팔았어요. 그때 흥분이 잊히지 않습니다. 리뉴얼 결과는 2021년이 돼야 나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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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호가 디자인한 롯데호텔 L7. 검정과 노랑색, 덩어리 형태의 몇 개의 가구로 공간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백화점이 유통의 황태자이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당신만의 묘수가 있나요?


"세대 간의 갭을 줄이고 스트리트 컬처를 흡수해야죠. 롯데와 현대, 신세계의 삼파전에서 롯데만의 특수성을 추출해 새롭게 연출해볼 생각입니다."


-지치지 않습니까?


"전혀요. 책임감은 느끼죠. 회사마다 컨디션이 다르지만, 최소 리스크로 최고 성과를 내야 하니까요."


-최소의 리스크라...


"클라이언트에게 리스크를 감수하라는 건 이제 안 먹힙니다. 유능한 컨설턴트라면 리스크를 최소화한 상태로 솔루션을 제시해야 해죠."


-컨설팅을 수락하는 기준이 있습니까?


"돈은 나중 문제에요. 내가 투입이 돼서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면 해요. 저는 확실한 결과물을 낼 수 있겠다 싶은 것만 선택해요. 성공률이 높으면 자동으로 크레딧이 올라가는 거고요."


-정구호의 히트 상품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구호, 르베이지, 휠라."


-연초에 칼 라거펠트와 알레산드로 멘디니… 두 분의 디자인 거장이 영면에 들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두 분은 평생 한 우물만 판 위대한 마스터지요. 책상 앞에서 스케치하다 돌아가셨을 거예요. 저는 못 해요. 한 우물 대신 여러 개의 우물을 팠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죽기 전까지 컬래버레이션과 개인 작업을 병행할 수 있을까? 창작의 샘물이 마르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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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부티크 구호로 첫발을 내디딘 이래 인테리어, 문구, 식기, 공연, 영화 의상, 설치미술 작업, 호텔 디자인 등으로 영역을 넓힌 정구호. 2015년부터 4년간 서울패션위크 총감독으로 컬렉션을 진두지휘했다./사진=이태경 기자

-너무 퍼다 쓰면 마르겠지요.


"아니요. 저는 퍼다 쓸수록 더 차오르는 타입이에요. 일을 안 할 때도 끝없이 상상해요. 상상이 넘치면 아이디어를 기부하기도 해요(웃음). 젊은 연출자들에게 활용하라고 주는 거죠. 내 머릿속 상상이 무대에 실현되면 그 기쁨에 상상력의 샘이 더 촉촉해져요."


-근본적인 욕구가 뭐지요?


"좋은 영향을 미치고 싶다, 정도. 제가 영화 ‘스캔들' 아트디렉팅을 했는데, 그 이후 시장 포목점에 가보면 한복 색깔이 정말 다양해졌어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아요.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만들어서 세상의 문화를 바꿨잖아요. 반면 저는 얕고 폭넓은 사람이에요. 정치인, 경제인, 디자이너, 건축가… 세상에 많은 유명인들이 있지만 정구호라고 하면 어떤 장르를 특정할 수가 없어요.


제가 국립 오페라단에서 ‘라트라비아타'를 변주해 ‘동백꽃 아가씨' 오페라 연출까지 하니까, 친구들이 그래요. "도대체 넌 커서 뭐가 될래?" 전 제가 뭐가 될지 모르겠어요(웃음). 길을 정해둔 적이 없어요. 그냥 주어진 기회를 충실하게 활용할 뿐이죠. 사실 무언가를 먼저 제안해본 적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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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호가 아트디렉터로 참여해 파격적인 미장센을 선보인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그는 ‘정사' ‘황진이' 등의 영화에 참여했다.

-먼저 제안한 적이 없다고요?


"없어요. 저 스스로 무용하겠다고, 공예 전시하겠다고 뛰어다닌 적 없어요. 기회가 와서 결과물을 냈던 거죠. 제가 제안하면 상대가 저를 파악하는 데만 시간이 꽤 걸려요. 저에게 제안이 올 때는 저와 저의 이전 결과물을 스터디한 상태라 훨씬 일이 빨라요."


-메뉴 개발을 제안받은 적은 없나요? 요리학교 꼬르동블루까지 나왔는데요.


"제안이 오긴 하지만, 요리를 커머셜로 풀고 싶진 않아요. 요리는 저의 ‘베프’예요. 행복의 요소인데, 이걸로 스트레스받고 싶진 않아요(웃음)."


-어떤 음식을 좋아합니까?


"멸치 철엔 멸치젓 담가 놓고 죽순 철엔 죽순을 사다 얼려놔요. 여름이면 오이지도 담가 먹고 낙지가 좋으면 친구를 초대해서 요리도 해먹고요."


-당신 안엔 대체 몇 명의 정구호가 사나요?


"제가 결혼을 안 했잖아요. 사람도 잘 안 만나고 아이 키우느라 진 빼지 않으니 남들보다 시간이 많아요."


-잠은 언제 잡니까?


"새벽 2~3시에 잠들고 아침 7시면 일어나요. 잠은 좋아하는 데 잠자는 건 싫어해요(웃음). 자느니 눈 부릅뜨고 앉아 영화를 보거나 웹서핑을 해요. 죽으면 평생 잘 텐데 싶어서요."


-영향력이 오래 유지되는 건 시대를 잘 읽어서인가요?


"오래 간다는 건 트렌드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현대홈쇼핑에서 J BYE라고 제 패션 브랜드를 내고 있는데, 그것도 트렌드보다는 퀄리티가 우선이에요. 트렌드 리스, 시즌 리스는 좋은 상품의 기본이거든요. 진정한 가치는 유행과는 상관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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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헥사 바이 구호 FW 파리 컬렉션. 구조적인 멋이 살아 있는 구호의 옷은 패션 저널리스트들에게 큰 갈채를 받았다.

-미니멀 앤 아방가르드라는 취향은 여전한가요?


"주변에서 그렇게 평가하지 제가 ‘미니멀 앤 아방가르드'를 추구한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기본에 충실해야한다는 생각이 ‘미니멀'이 되고, 거기서 좀더 혁신적인 태도를 취하니까 아방가르드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작업도 다 비슷한 방식이에요. 베이식을 찾은 다음, 미래를 예측해서 그 흐름에 맞게 약간의 새로움을 얹는 거죠."


-잘 못하는 일은 뭐죠?


"창작과 기획은 잘하지만 돈으로 셈하는 건 못해요. 재무제표나 인사관리, 영업은 제 범위의 일이 아니라 사업은 안 합니다(웃음)."


-정구호만의 셈법이 있을 듯한데요. 미니멀리스트이니, 뺄셈을 덧셈으로 만드는 법은 잘 아실테고(웃음).


"제 계산법은 1+1=2가 아니에요. 1+1=3이 되는 길을 찾아요. 꼭 돈의 문제는 아니에요. 당장 돈 버는 건 쉬워요.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게 어렵죠. 가치가 없으면 생명력이 유지가 안 되고, 생명력을 잃으면 브랜드는 순식간에 사라져요."


-지금도 3초 안에 그림이 떠오르나요?


"가끔 5초가 걸리기도 해요(웃음). 일을 제안받을 때 5초 안에 그림이 또렷하게 떠오르면 그 일을 해요. 현재, 환경, 요구… 이 3가지를 기본으로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제가 답을 모르는 거예요. 떠오른 그림으로 방향을 잡고 디테일하게 그린 후, 최종적으로 실현하는 게 제가 일하는 루틴이에요."


-자기가 그린 그림이 정답이라고 확신합니까?


"그럼요! 확신이 없다면 돈 받고 일을 시작하면 안 돼요. 디렉터라면 정답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통 디렉터들은 스태프들에게 R&D를 시키고 그중에 하나를 초이스하는데 저는 처음부터 정답을 던져요. 그리고 첫 미팅 때 했던 이야기를 끝까지 고수하는 편이에요. 함께 일하는 분들은 "디렉션이 이렇게 일관된 사람은 처음 봤다"고들 하세요. 재수 없게 들릴 텐데… 제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이 그거예요. 생각한 걸 단번에 시각화할 수 있다는 것."


-자칫 ‘나만 옳다'는 자기중심주의로 흐를 수도 있을 텐데요.


"모든 일의 솔루션은 커뮤니케이션이에요. 저는 제가 하려는 걸 윗사람에게든 아랫사람에게든 오십 번도 백 번도 더 반복해서 친절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쉽게 이해할 때까지. 결과는 두 가지예요. 설득당하거나 설득시키거나. 설득당하면 깨끗이 승복하는 편이에요. 목표 설정이 같으면 함께 갈 수 있어요. 실행하도록 윽박 지르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디자인이나 창작은 실무자의 기분에 따라 능률의 차이가 커요."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라고 했다. 좋은 결과를 내려는 완벽주의자일뿐. 핵심은 결국 관계 설정이다. "당장 손해 보더라도 관계를 해치지 않는 쪽으로 가요."


-창의성은 타고난다고 생각하나요?


"네.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라는 말은 옛말입니다.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창조적 환경을 만나 갈고 닦아서 최종 결과물을 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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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물이 돌멩이를 타고 흐르듯, 한 호흡으로 둥글게 모였다 퍼지는 정구호의 화법은 사람을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야의 탁 트임이 가히 위력적이다./사진=이태경 기자

정구호는 성북동 한옥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3대가 함께 살았다. 사시사철 제사, 폐백 음식, 고추장 된장 담그는 행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예민함을 타고난 소년은 중학교 진학할 때 엄마 몰래 조금씩 가구를 빼내 초록 카펫이 깔린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TV에서 하는 공예 프로그램을 따라 박공예와 매듭을 만들고 장롱 속 옷을 꺼내 죄다 염색하며 놀았다. "항상 창의적 분위기에 있었던 것 같아요." 뉴욕 파슨스와 시드니 꼬르동블루에서 패션과 요리를 공부하면서 그 환경이 절정을 이뤘다.


-따르는 스승이 있습니까?


"없어요. 스승은 아니지만 흐름을 바꾼 사람으로 항상 스티브 잡스를 생각해요. 저는 처음 샀던 아이팟을 기억해요. 박스를 뜯는 순간부터 빠져들어 갔어요. 그리고 이 완벽에 가까운 제품이 어떻게 진화할지 직관적으로 예감했어요. 전화기와 TV의 기능을 할 거라고. 중요한 건 정말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요. 진짜 결과를 만드는 사람은 드물죠."


-늘 앞서가는 사람인데,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성에 혼란을 느낄 때는 없나요?


"삼성을 나와서 공연과 전시를 하는 도중에 잠깐 어지러웠어요. 패션이, 커머셜 디자인이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도통 모르겠더군요. 그 답을 길거리에서 찾았습니다. 골목에 있는 작은 가게들, 모여드는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봤어요. 그동안 저는 메인스트림에서 큰 것을 만들어왔는데, 이젠 외진 곳의 작은 움직임들이 더 중요해졌어요."


-스트리트 컬처가 명품 산업까지 움직이는 상황이죠.


"맞아요. 이젠 패션 트렌드에서 솔루션을 찾으려면 답이 없어요. 발을 떼고 다른 곳에서 봐야 해요. 유행이 아니라 사회 문화를 예측해야죠."


-을지로와 익선동만 봐도 이곳은 서울의 핫 스팟이 아니라 이미 글로벌 스트리트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울의 특정 지역만 그런 게 아니에요. 전국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화양리에서도, 내륙 도시인 대구나 제주 바다에서도, 산골 어디에선가도 그런 바람이 불고 있어요. 놀라운 확장성이죠. 취향과 열정을 지닌 젊은이들이 전방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거죠."


-그 흐름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요?


"저는 항상 조합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어요. 이젠 단순히 콤비네이션이 아니라 진정한 컬래버레이션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느껴요. 이걸 분석만 하면 늦어요. 그곳에 가서 있는 그대로 느끼고 내 생활의 일부로 만들어야 해요. 그 장소에서 먹어 보고 사보고 경험해야 알아요. 삼성을 나와서 거리에 가보고 알았어요. 쇼핑은 온라인에서 90% 이뤄지고 오프라인은 경험의 장소라는 걸. 스트리트와 접속해야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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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호가 영감을 받은 도예 작가 에드먼드 드바알의 설치 작품.

-호기심이 대단하군요!


"호기심이 에너지를 만들어요. 그게 사라지면 창의력은 고갈되겠죠. 새벽에 웹서핑하는 것도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예요. 지구를 다 걸어 다닐 수 없으니 웹의 골목을 샅샅이 뒤져요. 요즘엔 현대 미술에서 큰 영감을 받고 있어요."


-세 점의 미술 작품과 한 벌의 옷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어떤 걸 고르시겠어요?


"조르주 모란디와 에드먼드 드바알의 작품. 모란디는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 작가인데 하찮은 덩어리 오브제를 잘 그립니다. 그 단순함이 지닌 파워가 어마어마하죠. 에드먼드 드바알은 설치 작가인데, 도예 작품을 굉장히 미니멀하게 설치해요. 자코메티의 조각도 빼놓을 수 없고요."


-역시나 모두 덩어리 형태로군요! 옷은 어떤가요?


"예전부터 완성도 높은 최고의 한복을 입고 싶었어요. 바느질 장인 침선장이 바느질하고 누빔 장인이 누빈 옷에 옥 장인이 만든 단추를 달고 신발 장인이 만든 신발을 신고 관에 들어가고 싶어요. 대개 수의는 삼베로 지어 입는데, 저는 명주로 지은 소색 한복을 입으려고요. 화장터에 가기 전까지 그렇게 곱게 입고 관에 눕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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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모란디의 정물화.

-탐미주의자답군요.


"오래 생각했어요(웃음). 두고 보세요. 앞으로 문화가 발전할수록 전통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거예요. 컨템포러리와 전통의 조합이 더 많이 요구될 거고, 일반 생활에도 흘러들어올 거예요."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때는 언제죠?


"머릿속의 상상이 100% 가깝게 실현됐을 때죠. 저는 기업과 브랜드 론칭도 하고, 무용이나 공예 같은 순수 작업도 해요. 많은 분이 순수한 창작물은 상업성이 없다고 하지만, 제가 연출한 국립무용단의 ‘단'과 ‘향연' 같은 작품은 티켓 파워가 엄청났어요. 커머셜한 일과 예술 작업을 병행한 건 정말 잘한 결정이었어요."


-행운아라고 생각하지요?


"행운아예요. 지난 4년 동안은 서울 패션위크 감독도 맡아서 잘 치러냈어요. 놀라운 행운이죠.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해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걸 보면 감개가 무량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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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독을 꿈꾸는 정구호. 생각하는 바를 머릿속에 5초만에 시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사진=이태경 기자

-정구호 시즌2는 어떻게 펼쳐질까요?


"새로운 챌린지를 보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영화에요. 파격적인 현대물도 있고 사극도 있어요. 미스터리 스릴러 풍의 시놉시스를 써놨는데, 언젠간 감독을 꼭 해보고 싶어요."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세요(웃음)?


"제가 올해로 56살이에요. 여전히 미래는 모르겠어요. 무계획이 저의 유일한 계획입니다."


동시대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싱글맨' ‘녹터널 애니멀스'를 감독한 디자이너 톰 포드처럼 정구호가 세공해낼 스타일리시한 영화가 벌써부터 기대 된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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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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