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관리비 7억, 숨진 두 직원… 노원 아파트에 무슨일이

[이슈]by 조선일보

12억 공사비 납부 미루던 경리 "미안하다" 글 남기고 극단 선택

관리비 통장엔 240만원만 남아… 부담감 시달린 관리소장도 숨져

관리비 회계감사 곳곳서 허점, 주민들 동의받고 생략하기 일쑤


조선일보

지난달 26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 A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직원 박모(여·50대)씨가 관리소장 송모(남·60대)씨에게 "미안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긴 뒤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문자메시지를 받은 송씨도 그로부터 나흘 뒤 근무지인 아파트 지하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아파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5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이 아파트는 관리비를 모은 돈으로 노후 수도관 교체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12억원짜리 공사였는데, 박씨는 공사업체에 2억원을 지급한 뒤 나머지 대금 지급을 계속 미뤘고, 송씨로부터 "빨리 돈 보내주라"는 독촉을 받는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아파트 노후 시설을 고치기 위해 쌓아놓는 돈인 '장기수선충당금' 통장을 주민들이 열어봤을 때, 장부상 7억원이어야 할 잔고는 240만원에 불과했다. 주민들은 송씨에게 따졌고, 이틀 뒤 송씨도 숨진 채 발견됐다. 송씨는 '7억원을 내가 물어줘야 할지 모른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고 지인이 전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관리사무소 직원과 입주자 대표 등이 공모한 횡령 사건으로 보고 경찰에 고소했다. 노원구청도 6일부터 해당 아파트 감사를 시작한다.


이런 사건은 전국 1만6700여 아파트 단지 어디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잠재된 폭탄'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서울시가 13개 구청과 아파트단지 관리 실태를 합동으로 감사해 작년 2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개 단지에서 적발된 비리·부실 건수만 338건, 단지당 17건꼴이었다. 입찰 요건을 갖추지 못한 업체에 발주하는 등 '공사·용역' 분야가 120건으로 제일 많았고, 장부와 실제가 맞지 않는 등 '예산·회계' 분야도 94건이었다.


서울시는 2014년부터 '맑은 아파트 만들기' 사업을 통해 각 구청이 아파트 관리비 감사를 벌일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300가구 이상 단지'가 대상인 데다, 예산 문제 등으로 실제 감사를 받는 단지는 극히 일부에 그친다. 예컨대 노원구엔 총 243개 단지가 있지만, 127개 단지는 300가구 미만이어서 감사 대상이 아니다. 나머지 116개 단지도 감사받을 확률은 낮다. 구청 관계자는 "예산이 부족해 1년에 12개 단지 감사가 한계"라고 했다.


서울에선 작년 3월에도 억대 횡령 사건이 있었다. 공릉동 B아파트에서 2014~ 2017년 관리소장으로 근무했던 정모(76)씨가 지출증빙자료 130장을 위조해 관리비 2억여원을 빼돌린 것이다. 정씨는 구속 기소됐고, 경리직원 2명도 범행을 방조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공동주택관리법상 300가구 이상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는 자체 비용을 들여 연 1회 회계법인 등의 감사를 받고, 감사보고서를 구청에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입주자 3분의 2 이상이 동의하면 생략할 수 있다.


일부 단지에선 주민들이 자체 감사단을 꾸려 관리비 점검에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성이 담보되지 않아 적발은 쉽지 않다. 노원구 A아파트에서 2년 전부터 감사직을 맡아 온 심모씨는 "관리사무소장, 다른 동대표들과 한 달에 한 번 회의한 게 전부"라며 "회계를 다룬 적도 없는데, 누군간 해야한다고 해 등 떠밀려 맡았다"고 했다.


시민단체 '아파트 비리 척결 운동본부'의 송주열 회장은 "횡령을 저지른 관리소장 등은 '비용 절감'을 이유로 회계 감사를 받지 말자고 주민들을 설득하고, 결국 쳇바퀴 돌 듯 문제가 반복된다"고 했다.

[Tip] 우리 아파트 관리비 적정한지 살펴보려면…


아파트 주민들이 자기가 거주하는 아파트 관리비가 적정한지 알아볼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한국감정원이 운영하는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www.k-apt.go.kr)이다. ▲난방 방식 ▲노후도 ▲가구 수 등이 비슷한 다른 아파트 단지와 비교해 관리비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 5단계로 표시해준다. 자기 아파트의 유지관리 이력과 입찰 정보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이 사이트에 '서울 마포구 C아파트'를 입력해보면, 작년 10월 기준 전용면적 1㎡당 공용관리비가 1627원으로 유사 단지 평균(1166원)보다 '높은 수준'으로 나온다. 특히 승강기관리비가 87원으로 평균(32원)의 2.7배였다.


하지만 조건이 비슷한 단지가 20개에 못 미치는 전국 1000여개 단지는 비교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조유미 기자]

2020.01.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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