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를 놓은 뒤에도 남아있는 여운 "세상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없다"

[푸드]by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치즈 케이크

서울 종로2가 카페 뎀셀브즈


전기밥솥으로 치즈 케이크 굽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굽는다기보다 치즈를 붓고 찌는 편에 가까웠다. 일반 케이크는 밀가루, 달걀, 버터, 설탕, 공기를 열 에너지와 물리력을 써서 조리해야 한다. 반죽에 공기를 불어넣고 골조를 세워 가볍고 폭신하지만 무너지지 않는 일종의 건축물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에 비하면 치즈 케이크는 콘크리트를 굳히는 것과 비슷하다. 덕분에 가벼운 식감은 없지만 반대로 맛의 볼륨과 밀도는 극대화된다. 이런 이유로 홍차와 같이 맛이 섬세한 음료는 일반 케이크가, 커피처럼 맛이 강한 음료는 치즈 케이크 쪽이 어울린다. 커피 없는 아침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치즈 케이크 종류와 질도 달라지고 있다. 전기밥솥에 구운 치즈 케이크로 만족할 수 없는 취향을 가진 이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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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2가 ‘카페 뎀셀브즈’의 바스크 치즈 케이크.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방이동 '스타쉐프 바이 후남'은 호텔과 미국에서 경력을 쌓은 주인장이 주방을 지키는 곳이다. 큰 키에 눈매가 서글서글한 주인장이 탁 트인 주방에서 팬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 괜히 믿음이 간다. 이 집은 미국의 오래된 레스토랑에 가면 맛볼 수 있는 큼직한 스테이크, 수북한 샐러드를 큰 그릇에 받쳐 낸다. "굳이 식당 가서 채소를 먹나"라고 주장하는 육식파라도 질 좋은 과일을 골라 썼다는 게 느껴지는 '과일 샐러드', 고기 반 채소 반인 '프라임 등심구이 샐러드'는 한 번쯤 주문해보자. 마스크에 꽉 막힌 듯한 입맛이 봄바람 맞은 꽃망울처럼 서서히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느슨히 소파에 걸터 앉아 넉넉한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이 집의 치즈 케이크를 맛봐야 한다. 모양은 평범하지만 포크를 갖다 대면 무겁고 질척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다 큰 어른들을 위한 품위 있고 절제된 맛이 간단한 치즈 케이크 하나에 담겨 있다.


발길을 돌려 도봉산이 보이는 창동까지 올라가면 카페 '도봉관'이 있다. 큰 창이 나 있는 2층 건물인 이 카페는 날이 좋을 때면 젊은 연인들이 비둘기처럼 창가에 자리 잡고 시간을 보내기 바쁘다. 1층에 들어서면 시원하게 열린 주방과 카운터가 있고 그 선을 따라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들이 공손히 손님을 맞는다. 이 집은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타고 크림을 올린 '아인슈페너'라는 커피 음료가 메인이다. 한 모금 들이켜면 달고 기름지며 씁쓸하고 농도 짙은 맛이 혀를 타고 올라온다.


이 음료와 함께 거의 모든 손님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이 '바스크 치즈 케이크'다. 이름대로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유래한 이 디저트는 밀가루를 섞지 않고 크림치즈, 달걀, 크림 등을 섞어 반죽을 만들어 높은 온도에서 구워 만든다. 이 집 치즈 케이크는 깔끔한 인테리어만큼이나 똑 떨어지는 맛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낮지만 얼지 않을 정도의 온도에 놓아둔 치즈 케이크는 속으로 갈수록 액체와 비슷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시계처럼 포크 위에서 녹아내리는 치즈 케이크를 그대로 입에 넣는다. 부드러움을 넘어 사랑의 밀어(蜜語)처럼 농밀하고 끈적한 맛이 몸 깊숙한 곳까지 흘러내린다. 하나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결국 높다란 계단을 오가며 티라미수, 말차 치즈 케이크를 종류별로 먹게 된다.


서울 한복판 종로에 오면 2002년 문을 연 '카페 뎀셀브즈'가 있다. 바리스타 사관학교라는 별칭처럼 서울에서 이름을 날리는 무수한 '커피쟁이'를 양산한 이곳은 역시 커피가 기본인 곳이다. 에스프레소를 한잔 시키면 긴 칼을 닦듯 에스프레소 기계를 닦고 약을 뽑듯 커피를 내리는 직원을 볼 수 있다. 아무리 바빠도 그 리듬은 엉키지 않고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 집에서도 바스크 치즈 케이크가 메뉴에 올라와 있다. 소나무 둥치처럼 짙은 갈색으로 물든 겉 모양새를 보면 입에 넣기 전에도 혀가 긴장된다. 고온에서 구워 맛의 강도가 한층 세다. 찌르는 듯한 에스프레소를 닮은 맛. 첫 맛은 잽처럼 날카롭지만 차츰 치즈와 생크림이 얽힌 묵직함이 혀의 깊숙한 곳부터 공략한다. 치즈의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포크를 놓은 후에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게 된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러시아 문학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의 한마디. '이 세상 어느 것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시간이 아무리 힘들게 지나가도 짧은 하루를 물들이는 커피 한잔과 케이크 한 조각이 있다. 바쁜 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은 들숨과 날숨이다. 하늘에 뜬 구름을 보고 땅에 핀 꽃을 내려다보는 사소함으로, 조그만 케이크를 먹는다.


정동현

2020.04.3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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