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꿰매보고 싶다"

[라이프]by 조선일보

영국·이탈리아 양복匠人 트리오

조선일보

이탈리아 피렌체 ‘살라 비앙카’ 최호준 대표와 이탈리아 나폴리 ‘사르토리아 차르디’ 임동민 사르토, 영국 런던 새빌로 ‘캐드 & 더 댄디’ 김동현 테일러.(왼쪽부터)/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현대 남성복은 영국에서 시작돼 이탈리아에서 완성됐다'고 패션업계에서는 말한다. 패션 칼럼니스트 이헌씨는 "군복을 근간으로 하는 영국식 슈트(양복)가 세계 남성복의 표준이 됐고, 점점 더 편안함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부드럽고 편안하게 변형한 이탈리아식 슈트가 최근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남성복의 영원한 뿌리인 영국과 꽃이랄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는 한국 남성들이 있다. 김동현(31)씨는 영국 런던 새빌로(Saville Row)에 있는 '캐드 & 더 댄디(Cad & The Dandy)'의 테일러다. 새빌로는 영화 '킹스맨'에도 나오는 고급 맞춤 양복점 거리.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테일러는 김씨가 최초이자 아직 유일하다. 임동민(35)씨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유명 양복점 중 하나인 '사르토리아 차르디(Ciardi)'의 넘버2다. 대표인 빈첸초 차르디 바로 아래서 생산관리를 총괄하는 '사르토(sarto·양복 장인)'다. 최호준(38)씨는 '피렌체식 테일러링(양복 짓기)'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리베라노 & 리베라노'에서 일하다 2018년 자신의 맞춤 양복점 '살라 비앙카(Sala Bianca)'를 차렸다.


세 남성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최호준씨와 임동민씨는 각각 트렁크쇼(trunk show·고객을 찾아가 양복 맞춰주는 서비스)를 위해 방한했고, 김동현씨는 코로나 때문에 매장 임시 휴업이 길어지면서 잠시 귀국했다.


―원래 옷을 좋아했나.


"어려서부터 옷이 좋았다. 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빈티지 양복을 싸게 구해서 입고 다녔다. 양복이 좋아서가 아니라 튀고 싶어서."(김동현)


―최호준씨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부모님이 '남자가 패션 해서 뭐 하겠냐'며 IT 쪽으로 푸시(push)를 많이 하셨다. '대학 입학하고 나서 하고 싶은 거 하라'는 부모님 뜻대로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고 패션디자인을 복수 전공으로 신청했다. "(최호준)


―임동민씨는 백댄서와 패션모델 출신이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축구를 하다가 집안 사정으로 그만두고 휴학하던 중 춤에 빠졌다. 가수 유승준 백댄서까지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만둬야 했다. 170㎝도 안 되던 키가 갑자기 190㎝로 자랐다. 너무 커서 무대에 서기 힘들었다. 옷 살 돈을 벌려고 광장시장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때 알게 된 인터넷 쇼핑몰 형님(대표)들이 '형이 옷 몇 벌 줄 테니까 사진 찍지 않을래'라고 제안해 피팅 모델을 하게 됐다. 인터넷에 내 사진이 돌자 백댄서 때 알던 가수 매니저들이 '그럴 바엔 돈 받고 패션쇼 무대에 서보라'고 해서 패션모델로 2년 일했다. 이런 과정을 겪다 보니 옷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국제복장학원에 입학했다."(임동민)


―옷을 좋아하면서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라 테일러·사르토가 됐다.


"디자이너는 옷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옷의 기획·생산 과정을 핸들링(관리)하는 직업이더라. 나는 옷을 직접 짓고 싶었다."(임동민)


"할아버지가 대구에서 양복점을 하셨다. 유행이 지나면 버려지는 '패스트 패션'에 흥미를 잃고 군대에 다녀온 뒤 우연히 할아버지가 옛날에 만드신 양복을 봤다. 양복은 클래식(고전)이다. 절대불변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자퇴하고 대구의 한 양복점에서 일을 시작했다."(김동현)


"옷 중에서 기술적으로 최고의 경지가 테일러링이다. 테일러링으로 작품을 창조하고 싶었다."(최호준)


―영국과 이탈리아에는 왜 갔나.


"남성복의 근원인 영국에서 배우고 싶었다. 런던예술대학 비스포크 테일러링(맞춤 양복) 학과에 들어갔다. 새빌로 맞춤복협회가 2년마다 맞춤 양복점 견습생과 맞춤복을 공부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황금가위상' 경연대회에서 최종 25인에 선발되기도 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양복점에서 테일러 한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급하게 3개월 무급 임시직으로 일하고 정식 직원이 됐다."(김동현)


"잠시 휴학하고 한 통신 회사에서 시스템 구축 관리 일을 했다. 그때 완벽히 알았다, 내가 갈 길이 아니란 걸.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로 갔다. 어학연수를 하고 밀라노에 있는 패션 학교에서 1년짜리 단기 코스를 들으며 패턴 뜨는 법을 배웠다. 틈틈이 피렌체에 있는 '리베라노 & 리베라노'를 찾아갔다. 리베라노의 우아한 실루엣이 마음에 들어서 꼭 일하고 싶었다. 네 번 찾아가 '견습생으로 받아달라'고 했다. 이곳 주인이자 전설적 사르토인 안토니오 리베라노씨는 그때마다 '다음에 보자'고 했다. '끈기가 있는지, 진지하게 일하려는지 보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나중에 들었다. 네 번째 찾아갔을 때 마침내 '테스트 받아보겠느냐'고 하더라. 3시간 동안 공방에서 바느질했다. 리베라노씨가 '어떠냐'고 물었다. '재밌었다'고 했더니 '내일 또 와볼래?' 물었다. 그렇게 3일을 더 찾아갔다. 그러자 견습생으로 받아줬다. 1년 동안 봉급 받지 않는 견습생으로 일한 다음 정식 계약하고 6년 반을 더 일했다. 내 옷을 만들고 싶어 나와서 살라 비앙카를 차렸다."(최호준)


"이탈리아에서 일하며 배우고 싶어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거의 논문처럼 써서 번역했다. 유명하단 양복점에는 다 보냈다. 13곳에 보낸 것 같다. 현재 일하고 있는 차르디 단 한 곳에서만 답이 왔다. '(일하러 오는 건) 안 된다. 하지만 놀러 오는 건 환영이다'라고. 거절이었지만 '알겠다. 다음 주에 놀러 갈게'라고 답하고 바로 비행기표 끊어 나폴리로 갔다. 이탈리아어라고는 '차오(ciao·안녕)'밖에 몰라서 면접에 나올 내용을 달달 외워 갔다. 그런데 의외로 일하게 해줬다."(임동민)


―영국과 이탈리아, 런던·나폴리·피렌체의 양복은 어떻게 다른가.


"심지 등 부재를 넣지 않는데다, 셔츠 만드는 방식을 접목해 부드럽고 편안하고 우아한 테일러링이 나폴리의 특징이다."(임동민)


"영국식 남성복의 큰 줄기는 군복과 승마복이다. 부재를 충실하게 넣어 단단하게 형태를 잡아준다. 가슴은 판판하고 허리는 잘록하다."(김동현)


"양복은 일반적으로 가슴 부분의 절개선으로 볼륨감과 남성미를 표현한다. 피렌체에서는 다리미질로 입체감을 만든다. 원단은 대각선 방향으로 늘어나는 성질이 있다. 이걸 이용해 열 성형 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머리카락도 가열하면 구불구불해지지 않나."(최호준)


―한국인이라 테일러·사르토로 일하는 데 장점이 있을까.


"꼼꼼하고 디테일에 강하다. 시키면 군말 없이 빨리 하고(웃음)."(김동현)


"확실히 성실하다. 이탈리아 사람과 성향이 비슷해 함께 일하기 편하다고 한다."(최호준)


―복장 자율화로 양복을 점점 더 입지 않는다.


"가볍게, 간소하게, 심플하게 입는 게 전 세계적 추세다. 슈트를 입으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슈트는 클래식이고 기본이다. 입고 싶도록 만드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김동현)


"정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재킷 하나는 입어줘야 하지 않을까. 일부러 나를 어필하지 않아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 확실히 있다."(최호준)


―앞으로 목표나 계획은.


"단일 시장으로 세계 최대인 미주에서의 트렁크쇼를 준비 중이다."(최호준)


"기술을 더 공부하고 싶다. 양복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싶다. 이야기가 상품의 가치를 만드니까."(김동현)


"더 많이 꿰매보고 싶다. 누가 지시를 내리더라도 완벽하게 소화하는 기술자가 되고 싶다."(임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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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탈리아 피렌체 ‘살라 비앙카’ 최호준 대표. ② 이탈리아 나폴리 ‘사르토리아 차르디’ 임동민 사르토. ③ 영국 런던 새빌로 ‘캐드 & 더 댄디’ 김동현 테일러.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슈트 잘 입는법


신사는 앉았을 때 다리살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전 세계 고객을 상대로 양복을 짓는 세 사람 눈에 요즘 한국 남성의 옷차림은 어떨까. 최호준씨와 김동현씨는 "동양인 중에서 체형과 비율이 가장 좋은 편으로 골격·키가 커서 입혀 놓으면 태가 난다"며 "색상 매치도 잘한다"고 했다. 많지 않은 옷으로도 멋쟁이로 보이는 비결로 최호준씨는 "재킷은 네이비(감색), 바지는 그레이(회색)로 하나씩만 갖추라"고 했다. 날씬해 보이겠다고 꽉 끼거나 너무 짧은 재킷을 입는 건 금물. 몸에 꼭 맞되 여유가 있으면서 길이는 엉덩이를 살짝 덮는 정도가 우아하다. 김동현씨는 "제대로 된 바지를 처음 구입한다면 플리트(주름)가 하나인 제품을 추천한다"고 했다. 양말은 의자에 앉았을 때 다리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 길이에 바지보다 살짝 어두운 색상이 알맞다. 임동민씨는 "화려한 색상은 소화하기 쉽지 않다"며 "옷을 다양하게 갖추기 전에는 자제 하라"고 권했다.

[김성윤 기자]

2020.07.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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