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어린 왕자'최초 번역은 조선일보”

[컬처]by 조선일보

1956년 조선일보 ‘어린왕자’ 첫 연재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1900~1944)의 ‘어린 왕자’ 국내 최초 소개는 안응렬(1911~2005) 전 한국외대 교수 번역의 조선일보 연재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1956년 4월 2일부터 5월 17일까지 연재된 것으로 이를 묶어 1960년에 ‘어린 왕자’ 번역본이 처음 출간됐다.


국내 대표적 ‘어린 왕자’ 수집가인 김규언(69) 소화병원 원장은 “이번에 조선일보 100주년을 맞아 공개된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면서 “고인이 되신 안 교수의 자녀인 안철·안혜란씨와 함께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64년 만에 발견한 기록


“와, 정말 아버지가 연재한 ‘어린 왕자’가 맞네요. 60년도 더 된 신문 원본이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봐요, 오빠.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니까.”


지난달 24일 광화문 조선일보. 머리가 하얗게 센 70대 남매가 자료실의 빛바랜 종이 신문을 만지며 낮은 탄성을 질렀다. 이 오누이만큼이나 나이 먹은 신문은 귀퉁이가 조금씩 찢겨 있었지만, 1956년 4월 1일 자 사고(社告)는 한눈에 들어왔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연재 시작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이 남매는 ‘어린 왕자’를 국내 최초로 번역한 불문학자 안응렬 교수의 자녀 안철(78)·안혜란(72)씨. 이날 어린 왕자 수집가 김규언 원장과 함께 1956년 조선일보 원본 실물을 확인했다. 생텍쥐페리가 1943년 펴낸 ‘어린 왕자’는 지금까지 전 세계 300여 언어로 번역됐다. 국내에서도 그간 발간된 책이 1000권도 넘는다. 이 현대판 고전은 어떻게 국내 처음으로 조선일보에 실린 것일까.


◇ “최초 판본, 조선 라이브러리서 확인”


김규언 원장은 10여 년 전부터 국내외에서 출간된 ‘어린 왕자'를 모아온 수집가. 연세대 의과대학 강남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을 지냈고, 현재는 어린이 전문 병원인 소화병원 원장이다. 지금까지 모은 ‘어린 왕자'만 600여 종. 김 원장은 “처음에는 단순한 수집욕으로 책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서 언제 처음 어린 왕자가 출판됐는지 궁금해졌다”고 했다.


“그간 한국 최초의 ‘어린 왕자’는 1960년 동아출판사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전집’ 13권에 실린 안응렬 교수 번역본이라는 게 수집가들의 정설이었습니다. 그런데 관련 자료를 모으다 우연히 한 논문에서 ’해당 전집 출판 연도가 58년이다’라는 말을 접했어요. 그때 처음 ’1960년 전에 어린 왕자가 출판됐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번에 확인하니 그 논문도 오류가 있었어요. 연재는 56년, 책 출간은 60년이었으니까요.”


김 교수는 1960년 이전 어린 왕자를 찾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주요 대학 도서관을 이 잡듯이 뒤졌다. 고서적 수집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 이전 출간된 책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김 원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안응렬 교수의 유족을 찾아 직접 ‘최초의 어린 왕자’ 행방을 묻기로 했다. 지난 1월, 김 원장은 안응렬 교수의 장남인 안철 서강대 명예교수에게 처음 연락한다. 안철 교수는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나도 아버지가 언제 어린 왕자를 처음 출간했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었다”고 했다. 안철 교수는 여동생 안혜란씨에게 당시 기억을 물었고, 안혜란씨는 “아버지가 ‘조선일보’에 먼저 어린 왕자를 연재했고, 이후 이를 묶어 동아출판사에 보냈던 것 같다”는 답을 보내왔다. 김 원장은 이 전언을 바탕으로 당시 신문을 검색했지만, 여전히 어린 왕자는 보이지 않았다. 김 원장은 “다른 신문까지 샅샅이 뒤졌는데도 ‘어린 왕자’가 나오지 않아 안혜란 선생의 기억이 잘못됐나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다.


김 원장이 조선일보에 실린 ‘어린 왕자’를 발견한 건 지난 10월. 조선일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아 공개한 ‘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newslipary.chosun.com)’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였다. 조선일보는 3년간 100억원을 들여 1920년부터 1999년까지의 조선일보를 스캔해 디지털화 작업을 거친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를 지난 3월 공개했다. 라이브러리에는 안응렬 교수가 조선일보 4면의 ‘소년 조선일보’란에 지난 1956년 4월부터 5월까지 44회에 걸쳐 ‘어린 왕자’를 연재한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시는 소년 조선일보가 조선일보 지면에 함께 실리던 시절이다.



◇유학때 선물받은 책, 귀국 배편에서 번역


지난달 24일 만난 이 세 명은 어린 왕자와 고인에 얽힌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나눴다. 이날 김 원장은 안응렬 교수가 출판한 ‘어린 왕자’와 참고 문헌 20여 권을 가져왔고, 안철·안혜란 남매는 안응렬 교수가 초판 번역에 사용한 1955년 불어판 ‘어린 왕자’ 원본, 안혜란씨가 원고지에 받아 적었던 번역본을 내놨다.


“프랑스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1년여 프랑스 출장을 마치고 1955년 귀국하셨는데, 그때 프랑스 지인이 ‘어린 왕자’ 책을 선물해줬다고 해요. 그런데 책이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돌아오는 배에서 단숨에 번역을 마치셨다고 했어요. 귀국 후 저희에게도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작가 생텍쥐페리에 대해 여러 번 얘기해주셨어요.” 안혜란씨는 65년 전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 공사관(현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안응렬은 한국 전쟁 종전을 선언하는 1954년 4월 제네바 회담에 프랑스 대표단의 통역으로 참석했고, 이후 파리에서 불문학을 공부하다 1955년 7월 14일 귀국한다. 안응렬 교수는 이후 ‘남방우편기’ ‘인간의 대지’ 등 생텍쥐페리의 대표 소설도 처음으로 번역했다.


이들은 어린 왕자가 ‘조선일보’에 연재된 계기로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과 안응렬 교수의 인연을 꼽았다. 윤석중은 타계할 때까지 1200여 편의 동요와 동시를 썼고 이중 800여 편이 동요로 만들어져 ‘한국 동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1955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맡으며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던 ‘소년 조선일보’를 복간하기도 했다. 윤석중은 이후 1956년 1월 아동 문화 단체 ‘새싹회’를 창립하는데, 이때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안응렬 교수였다. 안철 교수는 “선친은 평소 윤석중 선생과 자주 교류하셨다. 아마 조선일보 연재도 윤 선생과 맺은 인연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했다. 안응렬 교수는 어린 왕자 이후에도 ‘소년 조선일보’에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동화 ‘장화 신은 고양이’를 그해 12월 연재했고, 57년 6월에는 프랑스 전래 동화 ‘미녀와 야수’를 ‘이쁜이와 산짐승’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한다.


안혜란씨는 “아버지는 평생 ‘어린 왕자’를 사랑하셨다. 법정 스님이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셨을 때는 너무 감동해 우리에게 ‘꼭 읽어보라’ 하셨다. 나중에 대학교수가 돼서도 학생들이 아버지를 ‘어린 왕자 교수님’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법정 스님은 1971년 이 글에 “네가 나한테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이라고 한대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누가 나더러 지묵(紙墨)으로 된 한두 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화엄경>과 함께 선뜻 너를 고르겠다”고 썼다. 이 글은 이후 책 ‘무소유’ 등에 실리면서 소설 어린 왕자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조선일보

‘어린 왕자'를 국내 처음으로 번역한 안응렬 전 한국외대 교수. 그는 1955년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어린 왕자'를 번역했다. 안 전 교수는 이후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 등을 지내다 2005년 별세했다. /조선일보 DB

남매는 아직도 종종 어린 왕자를 읽는다고 했다. 안철씨는 “자식이 돼서 아버지가 언제 처음 ‘어린 왕자’ 번역본을 출간했는지 몰랐던 것이 부끄럽다. 김규언 원장 덕에 여동생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김 원장은 “박수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안응렬 선생”이라며 “소설 속 천진난만한 어린 왕자를 마주할 때마다 철부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이런 좋은 소설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해준 고인께 감사하다”고 했다.


안응렬 교수가 1956년 4월 1일 조선일보에 쓴 어린 왕자 연재 사고는 아래 문장으로 끝난다. “···어린이들을 위한 이 글에 매우 깊은 뜻이 숨어 있어 어른들이 보아도 반성할 재료를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하기는「어린 왕자」의 말마따나 어른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 글을 읽더라도 어린이들의 설명을 들어야 되기는 하겠지마는.”


[유종헌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20.12.24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이런 분야는 어때요?

ESTaid footer image

Copyright © ESTaid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