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선유도 등대에서 기도했다… 새해엔 서로 서로에게 따뜻한 등대가 되어주기를

[여행]by 조선일보

등대 전문가들이 추천한

연말연시 ‘등대 로드’


지난여름 ‘이지원의 등대기행’을 펴낸 수필가 이지원(63)씨는 시력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겨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등대기행’을 시작했다. 점점 무너지는 시력에 절망하고, 운전마저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육지의 끝자락, 오지의 섬을 찾아가 묵묵히 선 등대와 마주했다. “세상 모두가 중심에 서기 위해 달려갈 때 저 멀리 변방, 홀로 땅 끝에 서 있는 등대를 찾아갔어요. 등대가 ‘꼭 중심에 서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아’ 하는 것 같아 크나큰 위로를 받았어요.”


방향을 잃은 듯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견뎌 한 해의 끝자락에 서니 문득 차갑고 혹독한 겨울 바다를 지키는 등대가 떠올랐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맥박 같은 빛으로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등대를 찾아가면 흔들리는 마음에 좌표가 생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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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여행의 시작 ‘7번 국도’


강원도 7번 국도(동해대로)를 따라 달렸다. 이지원씨가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로 ‘동해 등대 로드’를 떠나기에 만만한 코스”라고 소개한 곳이다. 7번 국도는 명불허전 겨울 바다 드라이브 코스다. 동해 최북단 ‘대진 등대’를 시작으로 ‘한국의 등대 16경’ 중 하나인 속초 ‘동명항 등대’와 ‘속초 등대’, 양양의 특산물인 송이 모양을 한 ‘물치항 등대’ 등이 차창 밖으로 드문드문 이어진다. 동명항 등대를 만나러 가는 길에선 제철 맞은 양미리가 망에 널린 채 햇볕에 말라가고, 물치항 등대를 지날 땐 파도의 등에 올라탄 서퍼가 풍경이 되어주었다. 7번 국도를 내달리는 내내 길가 식당에선 ‘물곰탕’ ‘곰치국’이 제철이라고 손짓했다.


◇‘야경 명소’ 묵호 등대, ‘하트 해변’ 죽변 등대


바닷가를 신나게 달리던 차를 동해시 ‘묵호 등대’에서 멈췄다. 묵호 등대는 동해와 백두대간의 두타산, 청옥산을 조망할 수 있는 묵호 동문산 해발 67m에 있다. 벽화마을인 ‘논골담길’과 어우러져 겨울에도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등대 부근까지 차로 갈 수 있지만 벽화를 감상하며 골목 구석구석 걸어보는 게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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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등대가 있는 묵호해양문화공간은 동절기 오후 6시면 문을 닫지만, 산비탈에 기댄 논골담길의 수많은 집과 가로등에 하나둘 불이 켜지면 묵호 등대 일대는 ‘야경 맛집’으로 변신한다. 묵호진동 ‘연리지 카페’ 부근에서 묵호 등대 방향을 바라보는 전망이 특히 아름답다. 묵호 등대와 논골담길, 불 밝힌 동해 바다의 오징어잡이배, 동해시 수산물유통센터 전망대 불빛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따뜻한 불빛 덕분인지 동시에 시렸던 마음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묵호 등대에서 차로 3분 거리 발한동엔 지난 10월 문구 수집가들이 좋아할 만한 연필 뮤지엄이 문 열었다. 이곳 루프톱은 묵호 등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전망대다.


다시 7번 국도 따라 남쪽으로 내달리면 경북 울진·영덕 등대와 만날 차례다. 등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곳은 죽변·후포·축산·창포말 등대다. 모두 산이나 가파른 언덕 위에 우뚝 서 있어 전망이 좋다. 등대 주변으로 전망대나 걷기 좋은 둘레길도 조성돼 있어 쉬었다 가기 좋다.


해안선 모양이 하트를 닮았다 해서 ‘하트 해변’으로 불리는 울진 죽변항 언덕엔 ‘죽변 등대’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16m 팔각 기둥의 죽변 등대는 1910년 11월 24일 첫 불을 밝혔다. 울진과 영덕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이자 울릉도와 독도에서 직선거리 216.8㎞로 가장 가까이 있는 육지 등대이기도 하다. 지난여름부터 죽변항으론 해안 관광 모노레일인 죽변해안스카이레일이 오간다. 스카이레일 창을 통해서도 죽변 등대가 내다보인다.


소박한 어촌 정취를 만끽하고 싶다면 영덕 ‘축산 등대’를 지나칠 수 없다. 등대가 있는 해발 80m 죽도산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 대나무 군락과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축산(丑山)이란 이름처럼 소가 누워있는 듯 부드러운 능선 아래 자리 잡은 축산항은 빛이 너그러워지는 오후 풍경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항구의 반짝이는 물비늘과 물결이 찰랑댈 때마다 흔들리는 작은 배들을 보고 있노라면 요란하던 마음의 물결도 잔잔해진다.


◇‘BTS 등대’ ‘갯차 등대’도


축산항에서 차로 3~5분 거리 경정항에는 ‘BTS 등대’로 불리는 빨간 방파제 등대가 유명하다. BTS ‘화양연화’ 뮤직비디오에 배경으로 등장한 후 ‘영덕 BTS 등대’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따금 조용히 등대 앞까지 걸어가 뮤직비디오 속 한 장면처럼 장난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이들도 보인다. 경정항에서 선박을 정비하던 한 선주는 “쪼매난(조그만) 항구였는데 몇 년 전부터 ‘BTS 등대’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기(이게) 뭐 볼 게 있다꼬. 하하!”


만약 ‘올해의 등대 어워드’를 한다면 ‘인기상’은 단연코 포항 구룡포 석병1리 마을 앞바다에 있는 방파제 등대일 것.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 자주 등장하며 아예 포항 여행 코스 중 하나가 됐다. 해 질 녘이면 핑크빛 하늘과 푸른 바다, 빨간 등대가 ‘삼합’을 이룬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포항 대표 등대는 따로 있다. 남구 호미곶등대는 김송이 국립등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등대 여행을 한다면 꼭 들러봐야 할 등대 중 하나”라고 꼽았다. 국립등대박물관(확장 공사로 휴관 중)과 가까이 있다. ‘등대의 세계사’ 저자인 주강현 전 제주대 석좌교수도 “등대는 한국 역사에서 근대를 알리는 상징적 건축물”이라며 “그중 호미곶 등대는 울산 울기 등대, 인천 팔미도 등대 등과 함께 역사적 가치가 높고, 근대 건축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등대로 꼽힌다”고 했다. 1908년 12월 20일에 점등한 높이 26.4m의 호미곶등대는 18세기 중반 르네상스식 건축 양식을 따랐다. 벽돌을 쌓아 만든 등탑 내부엔 철제 주물로 된 108 계단이 있고, 각 층 천장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문양이 새겨져있다. 아쉽게도 문화재로 관리돼 내부 관람은 불가하다.


◇서해·남해엔 외딴 섬 지키는 등대


서해와 남해는 섬 등대 여행을 하기에 좋다. 육지에 기대 있는 등대에 비해 가볍게 접근하긴 쉽지 않지만 의미 있는 등대를 찾아가 보는 여정 또한 색다른 경험이다. ‘인천 등대원정대’를 진행한 이동열 황해섬네트워크 이사장은 “등대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무인도 등 섬에 있는 등대”라며 “우리나라 등대 1호인 ‘팔미도 등대’나 ‘연평도 등대’ 등 역사적으로 의의가 깊거나 이야기가 있는 등대가 서해, 그중에서도 인천에 모여 있다”고 했다.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km 떨어진 작은 섬 인천 중구 무의동 팔미도 등대는 1903년 점등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 전국에 전기가 보급되기 전 ‘도깨비 불’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팔미도 등대의 구(舊)등탑은 현재 문화재로 남아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에 요구해 설치한 것으로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2003년 현재 신(新)등탑이 세워지기 전까지 인천항을 오가는 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현재 팔미도로 가는 정기여객선은 따로 없다. 코로나19 대응 상황에 따라 매 주말과 ‘해넘이’(31일), ‘해맞이’(1월 1일)에 맞춰 운항하는 ‘팔미도 유람선’을 이용해 들어갈 수 있다.


이지원씨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 부담 없이 섬 등대를 만나고 싶다면 연륙교나 바닷길을 이용해 닿을 수 있는 섬을 찾아가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경기도 안산 탄도항 ‘누에섬 등대’는 물때에 따라 바닷길이 열리면 걸어서 들어가볼 수 있다. 등대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한바퀴 둘러보기 편하다. 연말이면 해넘이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 동호인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전북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군도의 63개 섬 중 하나인 선유도는 연륙교와 연도교로 이어져 있어 차로 쉽게 오갈 수 있다. 선유도항 ‘망주봉’ 부근엔 ‘기도 등대’라는 별칭이 붙은 방파제 등대가 있다. 두 손을 합장한 듯한 이색 등대는 ‘소원 등대’라고도 불린다. ‘소원등대’ 앱을 내려받아 실행하면 AR(증강현실) 소원 빌기 체험도 할 수 있다.


◇‘등대스탬프’ ‘이달의 등대’ 여행 해볼만


등대 여행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해양수산부의 ‘등대 스탬프 투어’를 눈여겨볼 만하다. 시즌1·2에 이어 내년 초 새로운 등대 스탬프 투어인 시즌3 ‘재미있는 등대 17개소’를 발표할 예정이다. 선유도항 ‘기도 등대’ 등 재미있는 조형 등대들이 이번 스탬프 투어에 이름을 올렸다. 배용찬 해양수산부 항로표지과 주무관은 “조용히 외딴 곳에 있는 등대를 찾아가는 ‘등대 스탬프 여행’이 비대면 여행법의 하나로 뜨면서 등대 스탬프 투어 도전자뿐 아니라 완주자도 매년 늘고 있다”며 “12월 17일 현재 기준 올한해 507명이 등대 스탬프 투어를 완주했다”고 전했다. 어머니와 함께 등대 스탬프 투어에 도전해오고 있는 이가영(36·부산)씨는 “등대 스탬프 투어를 계기로 섬 곳곳을 찾아다니게 됐는데 해외여행 부럽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이지원씨도 “등대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길을 알려주는 등대였다는 걸 깨달았다”며 “해양수산부에서 매달 한 곳씩 선정하는 ‘이달의 등대’와 등대 스탬프 투어만 해도 우리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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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꽉 찬 도루묵구이, 시원한 곰치국··· 겨울 바다가 입 안으로 ]


동해와 가까이 있는 제철 맛집





이 무렵 속초 ‘동명항 등대’ 부근 동명항 오징어 난전은 ‘오징어 난전’이라는 말 대신 동명항 양미리 부두로 불린다. 양미리철이기 때문이다. 매년 이맘때 열렸던 양미리 축제는 코로나 사태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쉬어간다. 대신 오후 6시까지는 양미리 부두 ‘포차’에서 양미리와 도루묵구이를 맛볼 수 있다.


어선의 선주가 운영하는 포차들이 문을 닫으면 그 앞길 건너 실내 포차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테이블마다 양미리, 도루묵을 굽느라 바쁘다. 대개 가격은 양미리 열 대여섯 마리와 도루묵 너덧 마리 패키지가 2만~3만원 정도다. 바닷가 생선구이 집에서도 양미리와 도루묵을 맛볼 수 있다. ‘묵호 등대’ 아래 묵호항 다이버생선구이에선 생선구이 정식에 고등어, 가자미, 꽁치와 함께 알 꽉 찬 도루묵을 곁들여낸다. 주인은 “아직 양미리가 여기(묵호)까지 안 내려와서 도루묵만 내지만 양미리가 잡히면 양미리도 곁들여준다”고 했다. 생선구이 정식에 내는 생선 종류는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살이 도톰해 발라 먹는 재미가 있다. 같은 동해여도 지역에 따라 달리 불리는 ‘곰치(꼼치)’도 지금 맛있을 때다. 양양 ‘물치항 등대’와 가까운 광주빛고을식당은 곰치를 넣은 ‘물곰탕’을 맑은 국물의 지리 형태로 시원하게 끓여낸다. 말캉말캉한 식감의 곰치는 무향 무취 무맛인 것 같지만, 먹다 보면 중독성이 강한 식감을 자랑한다.


서해 항구마다 요즘 석화를 찾는 사람이 많다. 경기도 안산 탄도항 부근 탄도어항수산물직판장에선 각종 회뿐 아니라 석화도 바로 사 2층 ‘초장집’에서 맛볼 수 있다. 1인분 주문하면 10여 개 정도 나온다. 고군산군도 선유도 ‘기도 등대’를 만나고 난 뒤 짬뽕 한그릇 생각난다면 비응항 부근 비응반점이 먹을 만하다. 비응항을 찾는 낚시꾼들에게 ‘짬뽕 맛집’으로 통한다. 기도 등대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다. 갑오징어, 홍합, 오징어 등 싱싱한 해산물을 푸짐하게 올려준다. 국물도 자극적이지 않고 매콤한 듯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난다. 갑오징어 탕수육은 이 집의 별미다. 주인은 “5~6월 제철에 1년치 갑오징어를 사다가 급랭해 일년 내내 쓰고 있다”고 했다.


[동해·영덕·안산·군산=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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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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