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어쩌다 등산’ 초짜 등산러의 대둔산 여행기

[여행]by 시티라이프

끽해야 집 뒷산이나 오르락내리락했던 사람이라면 ‘내 언젠가는 고산준령에 올라가고야 말 테다’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전 국민이 등산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또는 주말마다 산행을 하는 이 나라에서 ‘어쩌다 등산’은 초짜 등산러에게 작지 않은 위안이 된다. 대둔산은 정상 높이가 878m, 온통 바위와 철제 등산로를 올라야 하는 만만치 않은 산이다.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르니 큰 어려움 없이 꽤 높고 먼 길을 걸으며 예쁜 초록과 높은 산, 오래된 유적들을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케이블카 타고 금강구름다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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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번 국도 충남 금산 어디쯤, 대둔산이 저 멀리 보였다. 바위가 불쑥불쑥 올라온 모습이 마치 전라도와 충청도의 산신령들이 해발 878m 능선에 모여 현재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내게 있어서 어지간한 산 대개가 초행이듯 대둔산 역시 생전 처음 와보는 곳이다. 아는 거라곤 이 산이 전라북도 완주군과 충청남도 금산군, 논산시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곳에서 출발하든 등산의 목표 지점은 해발 878m 마천대이고 나는 지금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시작하는 대둔산 도립공원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출발지를 완주로 선택한 것은, ‘결국 내려올 산에 왜 올라가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어쩌다 산행’을 늘 따라나서는 친구의 솔깃한 유혹 때문이었다. 완주군 등산로에는 논산시와 금산군에는 없는 케이블카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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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에는 세 개의 등산 코스가 있다. 1코스는 케이블카가 운행하는 느세골 – 동심바위 – 금강구름다리 – 마천대 정상 루트로, 총 길이 약 1.7km이다. 용문 입구에서 출발 – 칠성봉전망대 – 용문골삼거리 – 마천대 정상을 이어지는 2코스는 약 2km, 안심사 입구 – 쌍바위 – 지장폭포 – 마천대로 향하는 3코스는 세 코스 중 가장 긴 3.4km이다. 거리만 기준으로 보면 그닥 먼 길이 아닌 것 같지만, 모두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라 숨깨나 헐떡거려야 하는 코스들이다. 소요 시간은 편도 한 시간 반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차장에서 케이블카 승차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주차장 도착 시각은 오전 11시쯤. 등산 초짜인 우리는 점심 도시락 챙기는 걸 까먹고 그저 초콜릿 몇 개 가져온 게 오늘의 식사 전부였다.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김밥을 찾았지만, 이런. 초입 식당가에는 부침개, 막걸리, 산채비빔밥, 고기 등만 팔고 있었다. 편의점에서조차 김밥은 없었다. 그러나 방법은 없었다. 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려서 무엇이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결국 초짜 등산러들은 점심을 초콜릿과 물로 때우기로 했다.


케이블카 승강장에 들어갈 땐 누구나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토요일이었지만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나마 멀리서 온 사람은 우리 둘뿐인 것 같았다. 전라도, 충청도 말투들이 들리는 걸 보니 등산객 대부분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로 보였다. 케이블카 요금은 성인 기준 왕복 1만1500원, 편도 8500원이다. 운행 기간은 약 5분. 운행 시간만 생각해 보면 비싼 편이지만, 그냥 묵묵히 타고 올라가는 게 보통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보이는 대둔산은 그야말로 초록의 향연이다. 그리고 케이블카에서 올려다 보이는 대둔산에는 아까 멀리서 보았던 전라도, 충청도 산신령들은 오간데 없고 오직 잘 생긴 큰 바위들만이 뻐기듯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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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50m의 구름다리라고 우습게 보면 안된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금 걷자 곧 금강구름다리가 나온다. 요즘은 흔하디 흔한 게 산행길 구름다리이지만, 대둔산 금강구름다리를 보는 마음은 조금 다르다. 대둔산 금강 구름다리는 1985년에 준공됐다. 요즘 구름다리들의 길이가 보통 100m 이상 되는 게 흔한 것에 비해 금강구름다리는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연결하는 50m에 불과하다. 누가 보아도 짧다. 그러나 촘촘하지만 구멍이 숭숭 난 철판 아래로 아득히 보이는 81m 절벽 아래 풍경은 아찔하다. 구름다리를 건너기 전 임금바위의 소박한 전망대에 서서 산바람을 맞아본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르는 무더위가 선선하게 날아간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동심바위 윗쪽 동심길(대안길) 바위를 오르는 릿지등산(암벽등반)객들이 내려다 보인다. 어떤 사람은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절벽을 오르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상에 올라가 대둔산 정상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니다.


금강구름다리는 짧은 다리이지만, 뒤에 따라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다리가 흔들거리자 잠시 얼음 땡이 된 채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척 서 있었다. 바로 아래에 정규 등산로가 눈에 잡힌다. 궁금해진다. ‘대체 임금바위 바로 아래에 멀쩡한 등산로가 있는데, 왜? 굳이 구름다리와 계단을 만들었을까?’ 보통 다른 산들의 구름다리들은 계곡이 너무 깊어서 등산에 어려움이 있거나, 별도의 등산로를 개척하기에 산의 구조가 복잡하거나 특이할 경우에 건설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등산의 묘미라 생각해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무섭지만 재미있는 삼선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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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계단 뒤로 보이는 바위들이 삼선암이다, 1985년에 준공된 삼선계단, 128계단의 삼선계단을 오를 땐 가급적 앞만 보고 한발한발 올라야 안전하다. 삼선계단 정상에서 내려다 본 대둔산 아랫 세상 모습. 구름다리, 케이블카, 출발 지점까지 보이는 아찔한 풍경이다.

잠시 어지러웠던 구름다리를 건너 입석대를 딛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조금 전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았던 정규 등산로가 나왔다. 바위산 대둔산을 오르는 탐방로는 바위를 자르고 쌓아 만든 계단길 아니면 철판으로 이뤄져 있다. 바위가 많으니 손 작업이 가능한 곳은 우묵우묵한 돌계단으로 이어지고, 바위와 바위 사이가 넓은 곳이나 경사가 가파른 구간은 어김없이 철제 난간에 철판 바닥이 설치되어 있다. 결국 둘 다 흙이 아니기 때문에 바닥이 딱딱하고 탄력도 없어서 걷는 내내 조심할 수 밖에 없다. 미끄러져 자빠질 경우 흙에 넘어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래서 대둔산 등산길은 탐방로 바닥에서 눈을 돌릴 틈이 없다. 힘겨운 돌계단을 오르다 고개를 들어보니 천막 상점이 문을 열고 있다. 생칡즙, 얼음생수, 막걸리와 각종 전을 파는 곳이다. 예전에는 산에 올라가면 이런 가게들이 심지어 즐비했었다. 하지만 국립공원이 늘어나고 지자체의 환경 관리가 깔끔해지면서 이제 유명한 산길에서 이런 주막 형태의 매점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곳에서 김밥을 팔지는 않을까 기대감에 기웃거렸지만 역시 상하기 쉬운 김밥은 이곳에도 없었다.


낯설기도 하고 정겹기도 한 풍경을 지나자 곧 삼선계단이 아찔한 모습으로 서 있다.


삼선계단은 삼선암 맨 오른쪽 바위에 설치된 철계단이다. 삼선암에는 전설 하나가 남겨져 있다. 고려 시대가 저물어갈 무렵, 당시 고려의 재상을 지냈던 한 선비가 국가의 쇠락을 아쉬워하다 홀로 이곳 대둔산 자락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딸 셋이 그만 갑자기 대둔산의 바위로 변했는데, 그 모습이 선인이 능선 아래를 바라보는 모습 같다 해서 삼선바위, 삼선암으로 불리게 되었다. 삼선바위 중 맨 오른쪽에 있는, 셋 중 가장 맨질맨질한 바위에 위로 향하는 계단이 연결되어 있다.


삼선계단은 올려다 볼 때도, 올라갈 때도, 다 올라가 내려다 볼 때도 ‘무섭다’. 백 스물 여덟 계단을 오를 땐 절대 옆이나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안된다. 계단은 실제 높이가 40m로 그다지 길지는 않지만, 그 아래로 아찔하게 전개되는 700여m의 지상 장면에 걸려들면 몸이 굳어지는 수가 있다. 실제로 이 계단을 오르던 등산객이 중간에 눈길을 옮겼다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굳어져 결국 헬리콥터로 구조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등산 초짜에 쫄보과인 나는 공포 극복법의 1순위인 ‘오직 눈 앞만 보며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기’를 지키며 이윽고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두세 번 위를 올려다 보았지만 그때마다 계단 꼭대기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대둔산 1코스 등산은 출발점인 느세골부터 걷기 시작해 오로지 등산로만 통해 정상인 마천대에 다다르는 코스가 제대로 된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금강구름다리 입구까지 간 경우라면, 구름다리와 삼선계단을 오른 뒤 만나는 등산로가 실질적인 등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산이 그렇듯 정상에 가까워질 수록 경사는 더욱 가파를 수밖에 없다. 대둔산 역시 정상 능선에 가까워질수록 허리는 더욱 굽어지고 숨은 더욱 가빠지며 단단해지는 다리 근육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등산을 자주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경사 각이 높은 언덕을 오를 때 반응하는 근육의 꿈틀거림은 고산을 찾게 되는 즐거운 이유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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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있는 개척탑은 대둔산 등산로 개척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산 수락리마애불

정상 능선을 조금 더 걷자 해발 878m 마천대가 드디어 등장했다. 꼭대기에는 어쩐지 산과 썩 어울려 보이진 않는 금속 느낌의 탑이 있다. 이름은 ‘개척탑’. 한자로 쓰여진 개척탑을 올려다 보았다. 철판을 밟으며 올라오는 내내 생각했던, ‘도대체 대둔산 등산로는 누가 개척한 거지?’라는 감탄 어린 궁금증이 되살아나며 실버 컬러의 둥근 탑과 개척 등산로 대둔산의 의미가 연결되었다. 대답은 이미 나와 있다. 삼선계단이 준공된 시기는 1985년 전후. 대둔산을 명산으로 만들어 더 많은 등산객, 관광객을 오게 하기 위한 완주군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천대에서 바라보는 깊은 내륙의 모습은 광활했다. 금산군이 있는 동쪽으로는 월봉산, 마이산, 백마산 등에서 연결되고 뻗어나가는 봉우리와 능선들이 우뚝우뚝 서 있고, 남쪽으로는 천둥산, 불명산, 백암산이 켜켜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끝날 것 같지 않는 능선과 고갯길 태고사 가는 길

다음 목적지를 향해 마천대를 떠났다. 지금까지의 등산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길이다. 그 길 끝에 ‘태고사’가 있다. 정상에 오르면 ‘이제 내려갈 길’만 남아야 하는데, 마천대에서 다시 태고사를 향하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게 다소 부담스러웠다. 길이는 끽해야 1.6km 남짓. 그러나 이 1600m의 능선길은 평지 또는 다듬어진 등산로와는 달랐다. 일단 능선길이 온통 눅눅하게 젖은 흙길 아니면 바위를 타고 지나야 한다. 거친 길이다. 마천대 등정 때보다 더욱 긴장해야 하는 상황이다. 능선 오른쪽으로는 산이, 왼쪽으로는 숲이 막고 있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 아무것도 없는 험한 산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능선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왕관바위를 지나 칠성봉–신선암을 거쳐 지상으로 내려가는 2코스로 하산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했다.


남루한 차림의 스님 세 분이 저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합장을 하고 인사를 드린다. “안녕하세요! 어느 절에 계신 스님들인가요?” “예, 태고사에 있습니다, 혹시 불자이신가요?” “아닙니다만 절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저희 태고사에도 한번 오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태고사에 가는 길입니다.” “아, 산길 조심하시고 기도 많이 하십시오.”


요즘 스님들은 무언가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 승복 모습으로 보이는 게 보통인데, 산중에서 만난 태고사 스님들은 옷깃이 죄 헤진 승복 차림이었다. 수행에 몰두해서일까? 몸도 야윈 모습이었다. 태고사를 향한 발길을 재촉하게 된 것은 바로 스님들이 그런 모습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고사 가는 길에 만난 ‘논산 수락리 마애불’이 발목을 잠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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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는 온통 이끼 투성이로, 올라가던 1코스 바위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낙조산장과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서 900m를 더 가면 태고사가 나온다. 초짜에게 만만치 않은 루트였다,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초록빛 태고사 가는 산길.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대둔산 서쪽 논산시 수락계곡길에는 ‘낙조산장’이 있고 산장 뒤 언덕에 바로 이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이란 암벽에 새긴 부처나 보살상을 말하는데, 한반도 7세기 전후 백제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는 마애불은 그 조각 작업을 누가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스님의 청을 들어 석공이 정과 망치를 잡았는지, 아니면 스님이 직접 조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조각한 사람의 능력과 풍화 상태에 따라 어떤 마애불은 최초의 모습이 형형하게 남았고, 또 어떤 마애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기도 하다.


‘논산수락리마애불’은 불상 조각 기법을 볼 때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 있는 부처의 모습이 아직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존되어 있다. 발목까지 내려간 옷과 손가락을 편 채 가슴에 댄 왼손, 허벅지까지 내려가 있는 오른손 등 마애불의 전체 형상을 희미하게나마 제대로 볼 수 있다. 풍화에 의해 본래의 형태가 많이 마멸되었지만 오랜 시간 이곳 마애불 앞에서 기원했던 우리의 부모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태고사 가는 본격적인 길은 바로 이곳 마애불에서 출발하는 또 하나의 고개를 넘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태고사까지의 거리는 약 900m. 케이블카가 있는 1코스가 온통 바위로 이뤄진 산세라면, 태고사 가는 고갯길은 온통 초록과 습기로 가득한, 그러나 길은 여전히 돌 투성이였다. 바위엔 이끼가 가득했고, 고대로부터 살아온 이름 모를 고사리를 닮은 풀들이 빈틈없이 솟아 있었다. 마치 9km 같은 0.9km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태고사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게 어쩐 일! 태고사는 또 다시 가파른 아스팔트를 낑낑거리며 2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태고사 역시 절벽 사찰의 일종이었다. 가파른 절벽을 깎아 지은 사찰 말이다.

원효대사를 춤추게 한 명당 태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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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글씨 석문. 이 석문을 지나가면 복이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태고사를 만날 수 있다,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는 태고사 전경. 원효대사가 춤추며 좋아했다는 명당이 바로 이곳이다, 태고사 금강문, 불두화가 피어있는 계단을 오르면 있는 지장전에서는 한 스님의 지장보살 독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태고사는 가람 배치와 형태가 여느 절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절을 지을 때 건축 소재는 당연히 주변의 자연 소재를 사용하게 된다. 대둔산은 바위산이다. 돌이 많은 곳이기 때문일까? 태고사의 가람은 목조 한옥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절벽을 받쳐주는 축대는 모두 석재를 사용했다. 이왕이면 건축물들도 모두 돌로 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일어났다. 절로 향하는 일주문이, 건축물이 아닌 돌 틈이라는 것은 아주 흥미로웠다. 태고사를 향한 가파른 길을 끙끙 걷다 보면 사람 한 명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갈라진 큰 바위가 나오고, 그 왼쪽 옆에 ‘석문’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큰 바위가 태고사 일주문이다. 기둥도 없고 지붕도 생략했지만, 바위가 기둥과 지붕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석문’이라는 글자는 태고사에서 한때 공부했다는 송시열이 쓴 글씨라고 전해지는데, 확정적 기록은 없다. 단지 그가 조선 후기 성리학의 거두로 살았으며 고향이 충청도인 관계로,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던 것을 미루어 볼 때 그 글자가 송시열의 것이라 짐작할 만도 하다. 석문을 지나 언덕을 더 오르면 태고사 가람 몇 채가 보이지만, 아직 대웅전의 모습은 볼 수 없다. 맨 먼저 만나는 곳은 ‘금강문’. 역시 목조 건물이 아닌, 돌 기둥과 담장에 기와를 올린 구조물이다.


금강문 아래 돌계단을 오르자 부처님 머리를 닮았다는, 그리하여 모든 절에서 보리자 나무와 함께 꼭 챙겨 심는 불두화가 피어있고, 또 다시 계단을 오르니 ‘지장전’이 맞아준다. 지장전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마침 지장전 안에서는 스님 한 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지장보살을 독경 중이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끊임없이 지장보살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어찌나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는지, 감히 전각에 들어가 절을 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장전 옆에는 ‘대웅전’이 아담한 마당과 넓은 전망을 담고 있었다. 대웅전의 건축 형태가 독특했다. 적어도 내 경험에 사찰 대웅전은 단순한 ‘일(一)’자형 맞배지붕 형태를 띠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태고사 대웅전은 ‘ㄷ’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붕도 솟을 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대웅전이 태고사 창건 때의 건축물이 아니고 1976년에 중창된 것을 생각하면 당시 건축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일단 색다른 대웅전을 보는 마음은 유쾌, 그것이었다.


태고사 대웅전에 들어가 아홉배를 올린 후 마당을 통해 저 멀리 하늘과 봉우리가 맞닿은 넓은 풍경을 감상했다. 정말 대단한 명당이 아닐 수 없다. 뒤에는 산이요, 가까운 곳에 물이 흐르고 있고, 하늘과 산이 활짝 열려있으며, 사람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니 더 이상 좋은 자리가 또 어디에 있을까.


태고사는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는데, 당시 원효는 이 절터에 첫눈에 반해 ‘세세생생 도인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무려 삼일 동안 춤을 추며 지냈다고 한다. 모든 절이 그렇듯, 태고사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낡아지고 무너짐을 거듭하며 중창에 중창을 이루었다. 고려 때는 태고화상이, 조선 때는 진묵대사가 중창과 삼창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한국전쟁 때 몽땅 불 타 버렸으나 1962년 도천대사가 작은 집을 지어 부처님을 모셨으며, 지금의 건축물은 앞서 얘기한대로 1976년에 새로 지었다. 당시 무량수전, 관음전도 함께 건축되었다.


태고사는 앞으로 펼쳐진 풍광이 대단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복전함 외에, 불자의 헌금을 받는 그 어떤 시설도 없다는 점이 아쉽기도, 고맙기도 했다. 절 구경을 끝내고 내려가는 길, 한 노파가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지팡이에 의지해, 그것도 부지런하게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보며 태고사에 대한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기어오르듯 태고사를 향하는 중생의 몸짓이 태고사의 수행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고사가 다시 찾고 싶은 사찰로 가슴에 각인된 것은 내 일생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석문을 빠져나가 속세로 돌아간다.

어쩌다 등산 후 찾은 ‘황토집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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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출발점과 하산 지점이 완전히 다른 루트를 걸은 우리는 어렵게 택시 전화번호를 알아내 이동을 해결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웃통만 갈아입은 우리에게 그동안 까먹고 있던 허기가 다시 찾아왔다. 검색 끝에 ‘황토집사람들’이라는, 다소 숙소 이름처럼 느껴지는 ‘맛집’을 발견했다. 돌솥밥이 나온다는 정보와, 집으로 되돌아 갈 길이 꽤 멀다는 생각이 들자 바로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그래야 돌솥밥이 조금이라도 일찍 불판에 올라갈 게 아닌가. 황토집사람들은 건축, 음식 모두가 한식으로, 수육, 청국장정식, 영양돌솥밥, 꽁보리밥정식, 황태구이정식, 묵은지돼지갈비찌개, 묵무침, 야채전 등을 하는 식당이다. 쌈과 함께 고등어조림 등 열 가지 정도의 반찬과 돌솥밥이 나오는데,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음식이 신선하고 맛도 좋아 후딱 밥그릇을 비우게 된다.

  1. 위치 : 충남 금산군 진산면 대고사로 444
  2. 운영 시간 : 09:00~21:00 *연중무휴

글 이영근(여행작가) 사진 안동수(다큐PD)

2020.08.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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