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키나와 종군위안부였다” 그녀가 고국에 못돌아온 이유는…

[컬처]by 동아일보

‘나는 종군위안부였다.’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1924~1997)가 이처럼 아픈 과거를 공개 증언해 큰 반향을 불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1975년 10월 일본 오키나와(沖繩)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힌 배봉기 할머니(1914~1991)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1970년대에 야마타니 데쓰오(山谷哲夫·71) 감독이 그를 인터뷰한 기록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아는 사람은 더 드물다. 7월 7일 이 영화가 도쿄 시부야의 소형 극장에서 상영됐다.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오키나와 종군위안부였다” 그녀

1978년 감독과 인터뷰하는 배봉기 할머니. 할머니의 거처는 사탕수수밭 안에 세워진 두평도 되지않는 작은 헛간이었다. 할머니는 이 집의 월세가 2000엔이라고 했다.

배봉기 할머니는 원해서 과거를 드러낸 건 아니었다. 1944년부터 오키나와의 외딴 섬 도카시키(渡嘉敷)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다가 종전을 맞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 남았다. 글을 모르는 처지라 호적도 없이 떠돌다가 1975년 불법체류로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자 당국에 자신의 사연을 밝히고 그곳에 살게 해달라고 탄원했다.


결국 특별영주자격을 얻은 할머니는 당시 현지 신문에 가명으로 응한 인터뷰에서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1978년 야마타니 감독이 배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는 이듬해까지 4차례에 걸쳐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할머니는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두 평도 안 되는 헛간 같은 집에서 질병과 싸우며 홀로 살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일 별로 안 하고 돈 버는 곳에 가지 않겠느냐고 해 속은 거지요. 일러주는대로 부산에 갔는데 숙소에 여자들이 잔뜩 있더라구요. 70여 명은 됐어요. ‘곤도’라는 사람이 여자들을 계속 모으며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했습니다.(배 할머니)”


일본어를 전혀 모르던 그는 배를 탄 뒤에야 오키나와로 간다는 걸 들었다고 했다. 함께 간 6명의 조선여성들과 함께 도카시키섬의 위안소에서 지내는 동안은 ‘아키코’라 불렸다. 할머니는 “다들 19~20살 전후였고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고 했다.


“병사들은 일요일에 몰려왔어요. 모두 용무만 처리하고 갑니다. 입구에서 다른 병사들이 ‘빨리 나와라, 나와라’ 하는데….” 할머니는 병사들 중 가끔 팁이나 비누를 주는 사람은 있었어도 관리자로부터 돈을 받아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오키나와 종군위안부였다” 그녀

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는 자막처리조차 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영상이다. 영화의 도입부 제목부분. ‘오키나와의 할머니 -증언· 종군위안부’라 쓰여 있다.

영화에는 배봉기 할머니가 지냈던 도카시키 섬의 위안소 흔적도 담겼다. 1978년 감독이 찾은 이곳에는 위안소 옆집의 가족이 여전히 살고 있었다.


43세 중년이 된 옆집 아들은 “난 그때 8, 9살 때여서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병사들이 늘 놀러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한참 지나서 그게 위안소였다는 걸 알고 나니, 그 누나들이 정말 안됐더라”고 말했다.

“나는 오키나와 종군위안부였다” 그녀

최창규 전 한국건축가협회 회장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육군 엔지니어로 중국에 보내졌다. 당시 그곳에서 직접 위안소를 짓는 일도 하면서 조선에서 끌려온 위안부 여성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던 경험을 야마타니 감독에게 생생하게 증언했다.

69세가 된 그의 어머니는 위안소의 조선인 위안부 7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으며 그들이 “이런 게 아니었는데”라며 자주 울었다고 전했다. “식당 일 돕는 줄 알고 왔는데 이런 일이었다니, 정말 불쌍했다.”


배 할머니는 인터뷰에서 늘 “내가 가난했던 탓”이라거나 “내 팔자가 그렇다”고 말했다.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7세 때부터 남의집살이를 시작했고 17세에 결혼했지만 실패한 뒤 조선 각지와 만주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고생이 많았던 탓에 여생을 무서운 두통과 신경통,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두통이 심해지면 며칠을 집안에 틀어박혀서 소리를 질러 동네 아이들은 ‘미친 할머니’라 불렀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침묵하는… ”

“나는 오키나와 종군위안부였다” 그녀

5일 도쿄 근교에 사는 야마타니 감독과 만났다. 수년전 병마로 쓰러진 이래 휠체어를 타고 있는 그는, “촬영 당시 첫 1주일간 만남을 거절했던 배봉기 할머니가 나중에는 자신에게만 친근감을 가져줬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야마타니 감독이 이 영화를 찍던 1978년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종군위안부 문제는 관심을 끌기 전이었다.


“우연히 종군위안부 관련 사진을 본 뒤 작품 주제로 정했다. 몇 번이나 한국에 가서 피해자를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한국인이 유력한 증언을 해줬다.”


1978년 서울에서 만난 최창규 전 건축가협회 회장이 바로 그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육군 엔지니어로 중국에 파견돼 직접 위안소를 지은 적도 있다고 했다.


“주로 뒷탈이 없을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이 속아서 갔다. 14~40세의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을 모았다. ‘대동아전쟁을 위해 남자는 모두 징용 나갔는데 여자는 가만히 있을 거냐. 군대 가서 세탁도 해주고 야전병원에서 붕대도 감고 하면 된다. 돈도 준다’며 꼬드겨서 대부분 위안부로 집어넣은 거다.”(최창규)


다큐멘터리에 담긴 그의 목격담은 처절할 정도로 생생했다.


“위안소라 해도 가설주택이다. 한 평 반 정도의 방이 닭장처럼 이어져 있다. 병사들이 번호표를 사서 바깥에 일렬로 줄을 서서 순서대로 그 방에 출입하는 거다. 각기 시간이 5분에서 10분 정도. 한줄로 서서 ‘으으’하며 바깥에서는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자도 있을 정도다. 지금 우리들의 윤리라거나 이성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특별한 환경에서의 남자들의 동물적인 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실전이 있거나 부대이동이 있을 경우 심할 때는 여성 한명이 하루 17시간, 200명 이상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감독이 위안부 피해자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최 회장은 “지금(1978년) 그들이 살아 있다면 50~60대다. 한국은 유교의 영향으로 도덕 윤리관이 강하다. 아무도 그런 부끄러운 얘기를 나서서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유감인 것은 일본의 제 나이 또래 남성들이 진상을 알면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경제대국이 됐지만 정말 대국이 되려면 이런 것들을 오픈하고 당당히 인정해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우롱당한 삶

영화에서 할머니는 패전 당시를 회상할 때 “일본군이 져서 분했다”고 하는 등 거대한 운명의 굴레 속에서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모르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1989년 쇼와(昭和) 일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사과도 안하고 죽어버렸느냐”고 말하는 등 전쟁과 자신, 역사에 대한 의식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만년에는 현지의 조선총련 사람들이 할머니를 많이 도왔다고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우롱당한 할머니는 늘 고독했다. 1991년 10월 세상을 떠날 때도 혼자였다. 잠든 듯 세상을 뜬 할머니는 며칠 뒤에야 발견됐다.


‘오키나와의 할머니’는 최소한의 편집만 된 다큐멘터리로 자막조차 없다. 초점이 맞지 않거나 화면이 흔들리는 건 예사다. 하지만 지금도 영화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7월 7일 열린 상영회는 58석 전석이 매진됐다. 지난해 10월과 올 4월에 이은 세 번째 상영이다. 영화를 본 관객 도야마 고이키(外山小粹 ·23) 씨는 “전쟁이 여성에게 어떻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고, 그 폭력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자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도토리 다쿠야(都鳥拓也·35) 씨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고 아직도 보러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랍다. 영화의 기술적 수준과 무관하게 찍힌 사람과 역사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볼 기회가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쿄=서영아특파원 sya@donga.com

2018.08.1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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