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치료 대신… 익명 단톡방 찾는 정신질환자들

[라이프]by 동아일보

“헐크 같은 나, 어떻게 해야 하나”

소문 걱정 없고 상담비 안들어 서로 고민-치료법 나누기 활발

전문가 “잘못된 처방 거를수 없어… 되레 질환 악화시킬 가능성 높아”

동아일보

“언제 변할지 모르는 헐크가 된 것 같다. 이성의 끈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겠다.”


24일 오전 1시경, 정신질환자 60여 명이 참여한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 편집형 정신분열증(조현병)을 앓는 20대 남성이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나도 비슷한 상황이다. 약을 먹는 게 낫다”는 다른 참여자의 충고가 뒤따랐다. 약 1시간 동안 이 대화방에서는 수백 건의 대화가 오갔다.


안인득(42·구속)이 일으킨 ‘진주 방화·살인’ 사건으로 정부의 정신질환자 관리 시스템에 허점이 드러난 가운데 적지 않은 정신질환자들이 병원 치료보다는 익명의 온라인 대화방에 의지하고 있다. 28일 카카오톡 익명 대화방 검색창에 ‘조현병’을 입력하자 약 50개의 방이 검색됐다. ‘우울증’을 입력하자 100개가 넘는 대화방이 떴다. 적게는 두세 명부터 많게는 60∼70명이 모인 방까지 다양했다. 각 대화방에서는 각자의 상태를 하소연하듯 얘기하면 이를 위로하는 메시지가 올라오고, 효과를 본 치료 방법을 공유하는 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정신질환자들이 익명으로 운영되는 대화방을 찾는 이유는 다양했다. 10대 정신질환자를 위한 대화방을 운영하는 사회공포증 환자 이모 군(16)은 “같은 증상을 지닌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는 직장인 정모 씨(27·여)는 “회사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소문이 날까봐 병원 치료는 엄두를 못 낸다”며 익명의 대화방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우울증 환자 이모 씨(30)는 “정신병 탓에 일을 못하니 수입이 없어 한 번에 10만 원이 넘는 정신과 상담을 받을 형편이 안 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속형 망상장애 등 조현병 관련 질환에 대해서는 산정특례 제도에 따라 치료비의 본인 부담 비율을 10%로 낮춰주고 있지만 다른 정신질환에 대해서는 의료비 지원 혜택이 없다.


전문가들은 익명의 대화방에서 환자들끼리 공유하는 정보나 대화는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권준수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환자들만 모인 대화방에선 누가 이상한 얘기를 해도 ‘그건 아니다’라고 바로잡아주는 견제장치가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며 “대화가 자칫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 오히려 질환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정신질환으로 치료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안인득의 담당 의사였던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 김모 씨는 “‘감기 걸려서 감기약 먹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조현병 치료약 먹고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이 생겨야 환자들이 숨지 않고 치료를 받는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가 22일 발표한 ‘정신건강 현황 4차 예비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지역사회 재활기관에서 정신건강 상담을 받은 고위험군 환자의 정신건강의학과 치료연계율은 4%에 불과하다.


한성희 기자 chef@donga.com

2019.05.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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