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잠시 멈추면 젖어드는… 문향

[여행]by 동아일보

여행|경북 안동 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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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안동호에 위치한 월영교. 국내에서 가장 긴 목책교로 다리 한 가운데에 월영정(月映亭)이 있다. 강변을 따라 산책한 뒤 인근의 안동민속박물관을 둘러보면 좋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여행 상품도 덩달아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대표적인 게 지역에 깃든 역사와 이야기를 체험하는 이른바 ‘인문여행’이다. 인문여행의 추천지로 최적화된 곳 중 하나가 경북 안동 하회(河回)마을 일대다. 수백 년간 문화·권력의 핵심이었고, 마지막까지 유림의 지도력을 발휘했으며, 옛 모습을 간직한 곳들이 적잖아 인문여행지로서 요구되는 조건을 다 갖췄다.


1일 오전 8시,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 주차장에서 안동행 버스에 올랐다. 곧이어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백발 사내가 나타났다. 소설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을 쓴 김훈 작가(71)다. ‘제1회 백두대간 인문캠프’에 참가한 그는 1박 2일간 안동과 예천 일대에서 강연을 열고 참가자들과 소통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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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은 집과 집들이 서로 비스듬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오전 11시 반. 두통이 일 정도로 굽이진 산세를 지나 월영교(月映橋)에 닿았다. 짙은 파랑과 녹색 물감을 섞은 듯한 안동호 위로 길이 387m의 목책교가 의연히 떠 있다. 달빛이 비추는 야경으로 더 유명하다.


그윽한 선비의 고장


“안동은 가장 좋아하는 고장이에요. 선비 정신, 문학, 학맥의 기운이 그윽하게 흐르지요. 그 전통이 근대와 잘 접목되지 못해 아쉽습니다.”


김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20여 분간 버스로 산길을 돌아 병산서원에 닿았다. 오늘로 치면 향교는 공립학교, 서원은 사립학교다. 병산서원은 도산서원과 더불어 경북 지역 2대 서원으로 꼽힌다. 건축미가 뛰어나 건축학도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작가님, 이번 ‘연필로 쓰기’는 주제가 친숙해서 좋았어요. 특히 똥 부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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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만대루 위의 김훈 작가.

서원의 만대루(晩對樓)에 오르자 캠프 참가자들이 작가를 반갑게 맞는다. 널찍한 마루에 지붕만 얹어 사방의 경치가 기분대로 드나든다. 이곳에서 글공부 하던 선비처럼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가부좌를 트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오후에 찾은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가 600년간 대대로 살아온 집성촌이다. 마을 건너편 부용대에 오르니 강이 마을을 휘감아 도는 S자 곡선이 또렷하다. 과거엔 나룻배를 타야 했으나, 최근 섶다리가 생기면서 이동이 간편해졌다. 만송정에서 진행된 강연에서 작가는 “하회마을은 산과 물, 마을과 집, 집과 길, 인간과 인간 등이 직접 대면하지 않고 비켜가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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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조성한 하회마을의 섶다리 위로 관광객들이 강을 건너는 모습. 앞에 보이는 암벽이 부용대.

비슷해 보이지만 고택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정사, 겸암 류운룡 선생의 위패를 모신 화천서원, 최초의 류씨 대종택 양진당, 서애 류성룡이 기거한 충효당이 필수 코스로 통한다.


체험거리도 풍부하다. 전통 그네, 각종 체험시설, 그리고 쇼핑까지 가능하다. 미니 빗자루, 종이인형, 주걱 등을 2000원에 판다.


병암정 초간정


‘저러쿠러 순한 예천 사람들 눈 좀 들이다 보소.…예천이 이 나라 땅의 눈동자 같은 우물 아이껴?’(안도현 ‘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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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 권문해 선생이 지은 정자 초간정(草澗亭). 대청마루 아래로 계곡이 흐른다.

둘째 날 예천군으로 발길을 튼다. 안동은 권문세력가인 반면 예천은 소외된 선비들이 기거했던 곳이다.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펴낸 초간 권문해 선생이 있다. 권씨 가문은 초간의 할아버지 대에 다섯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며 꽃을 피웠다. 화려한 시절은 길지 않았다. 무오사화로 한 명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나머지 넷은 귀향을 갔다.


가문은 스러졌지만 절경을 품은 정자 두 곳을 남겼다. 병암정(屛巖亭)과 초간정(草澗亭)이다. 병암정은 용문면 성현리 병풍바위 위에 걸쳐 있다. 정자에 오르니 대수마을과 금당실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버드나무가 하늘거리는 4월, 설경이 눈부신 1월에 특히 아름답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버스로 20분 거리의 초간정에 도착하니 ‘인생 비경’이 펼쳐진다. 막돌을 쌓은 기단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정자 코앞으로 계곡물이 흘러든다. 규모가 아담해 자연의 치마폭에 웅크린 갓난아기 같다. 수풀이 우거진 앞마당에서 작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한옥은 공간과 층이 매우 두껍고 깊은 데가 있습니다.…아파트는 민자 평면이지요.…이런 공간에서는 마음과 상상력이 납작해져요. 지금 우리는 다 납작해져 있습니다.”


정자 옆 흔들다리에 오르자 시냇가에서 송사리를 잡는 아이들이 보인다. 과거 하인들이 살던 고택에서는 민박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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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가는 법: 대부분 여행지가 산속 깊숙이 자리해 자동차 이용을 추천한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9월 27일∼10월 6일. 경북 안동시 육사로 239 탈춤공연장 일대. 입장료 7000원. △안동유교랜드: 조선시대 체험+키즈카페. 경북 안동시 관광단지로 346-30. 입장료 어른 9000원, 어린이 7000원.


맛집: △맛50년헛제삿밥: 헛제삿밥 1만 원, 선비상 1만8000원. 경북 안동시 석주로 201. △목석원: 안동찜닭 3만 원, 명인숯불고등어정식 3만 원(2인). 양이 푸짐해 어른 3, 4명이 먹기에 충분하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전서로 159. △용궁단골식당: 전통막창순대 9000원, 오징어불고기 9000원. 경북 예천군 용궁면 용궁시장길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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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책: ‘이육사 시집’(이육사 지음)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안동에서 태어난 시인의 정신이 담겼다. △영화 ‘스캔들’(사진)의 촬영지인 하회마을에서 선비의 마음으로 사색하며 걸어보자.


세대 포인트 △연인·신혼부부: 초간정·병암정에서 호젓한 데이트를 즐겨 보자. △중장년층: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병산서원 만대루. △어린이가 있는 가족: 사군자 체험, 선비 체험, 감자·고구마 캐기 체험 등을 경험해보자. 하회 정보화마을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안동·예천=이설 기자 snow@donga.com



2019.07.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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