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겐 치명적, 자연엔 치유 기회?…코로나가 바꾼 풍경들[전승훈 기자의 도시산책]

[컬처]by 동아일보

‘신종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로 인간의 발걸음이 봉쇄된 지구촌 곳곳에 뜻밖의 손님들이 나타나고 있다. 인도 북부지역에서는 맑아진 하늘 덕에 30년 만에 히말라야 설산이 보인다고 하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인적이 드물어진 해변 자동차 도로에서 바다사자가 누워 자기도 한다. 유람선 운항이 중단된 이탈리아 베니스의 운하에는 물고기 떼가 돌아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울릉도에 멸종된 줄 알았던 독도강치가 나타났다는 소식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의 건강에는 치명적이지만, 자연에게는 치유의 기회로 다가오는 역설이다.


지난 3일부터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갤러리마리에서 열리고 있는 재프랑스 화가 홍일화의 개인전 ‘임시풍경’(Ephemeral landscape)은 신종코로나를 계기로 우리에게 불쑥 다가온 원시적인 자연과 치명적인 인공적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전시다.


●화가로서의 삶을 바꾼 제주살이


2003년 프랑스 파리 에꼴 데 보자르를 졸업한 홍 작가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TGV를 타고 1시간 정도 거리인 르망에서 살고 있다. ‘르망 24’라는 모터스포츠의 메카로 알려진 도시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해왔던 그는 지난해 작품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맞았다. 보그 패션잡지 모델같은 서양여성의 이미지를 주로 많이 그렸던 그는 제주 곶자왈의 원시림에서 받은 강렬한 감정과 공포를 화폭에 담아냈다. 그는 12만 평 규모의 서귀포 제주조각공원 내 천연곶자왈 숲 속에서 두달 반 동안 컨테이너하우스에서 혼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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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 숲 속 나무 사이로 퍼지는 아침 햇살을 보고 있으며 황홀경처럼 아름다워요. 그런데 컨테이너 집에서 10m 만 벗어나면 뱀과 지네, 한 번도 보지 못한 벌레가 득시글거리는 야생 그 자체입니다. 해가 떨어질 때부터는 공포의 순간으로 뒤바뀌어버리죠.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동물이 우짖는 소리, 귀신의 노래소리같은 바람소리… 노루가 개짖는 소리처럼 ‘컹컹’하고 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잠을 자려고 불을 끄면 손바닥 길이 만한 검고, 노란색 지네가 침대 위로 기어다녀 기겁을 하기도 했어요. 무서워서 밤에는 불을 켜고 작업을 하고, 낮에 잠을 자야할 정도였죠.”


그는 곶자왈을 경험한 뒤로 그동안 숲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났던 ‘힐링과 영감’의 원천이라고 칭송하던 숲은 바로 인간에 맞춰 정렬시킨 인공적인 수목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곶자왈의 숲에는 흙이 없다. 대신 나뭇잎과 가지가 썩어서 만들어진 부엽토가 있다. 그래서 나무들은 뿌리를 흙에 내리지 못하고 현무암 돌덩어리를 둘둘 감싸고 있다. 때문에 태풍이 불면 나무가 흔들리면서 숲 속에서 현무암이 움직이는 괴이한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곶자왈 숲 속에서는 모든 것이 뒤얽혀서 꿈틀거리는 풍경이예요. 고목나무가 쓰러져 있고, 그 옆으로 덤불과 이끼에 뒤덮힌 바위가 우거져 있지요. 부엽토에 발이 푹푹 빠져 발목이 부러질 뻔한 적도 많아요. 그래서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서 기다시피해서 다녀야 합니다. 관광용으로 길을 만든 곶자왈이 아니라 천연 곶자왈 숲 속에서는 반드시 전문 가이드가 필요해요. 길이 없어 마치 인디아나존스처럼 칼로 덩굴을 치면서 앞으로 나가야 하죠.”


그는 날 것 그대로의 곶자왈 숲 속에서 ‘공포와 설레임’, ‘두려움과 희열’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체험했다고 했다. 그는 “야생의 숲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어떤 빌딩 숲보다 조화로웠고, 장엄하고 숭고하고 엄숙함에 대한 전율을 돋게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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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을 체험한 후로 그의 붓터치는 달라졌다. 그가 그린 나무나 꽃, 연못을 가까이서 보면 온통 구불구불하거나 동그란 것 투성이다. 벌레, 지렁이, 지네, 뱀처럼 보이기도 하고,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한 모습 같기도 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몇 걸음 떨어져서 보면 3D 화면으로 보는 듯이 생생한 숲 속 정경이 또렷이 살아난다. 마치 프랑스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1859~1891)가 색채를 분할해 점으로 풍경과 인물을 표현한 ‘점묘법’과 비슷한 효과를 준다. 홍 작가 특유의 이 터치를 ‘지렁이묘법’이라 불러야할까? 그가 제주에서 그린 해녀 얼굴에도 어김없이 꼬불꼬불한 선이 살아 있다. 동그란 수경을 오랜세월 써서 생기는 해녀 특유의 주름살은 마치 요즘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들의 얼굴에 남은 고글자국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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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번 전시 ‘임시 풍경(Ephemeral Landscape)’에는 언제든지 소멸가능한 원시적인 자연, 하루살이처럼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제주를 떠나 프랑스의 집에서 그린 풍경화는 곶자왈인지, 알프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숲 속이다. 깊은 숲 속에 뜬금없이 양초처럼 녹아내리는 분홍색 덩어리가 있기도 하고, 연못 가에는 뭔지 모를 짐승의 형체가 영혼처럼 흰색으로 어른거리기도 한다. 왜 분홍색 덩어리일까.


“숲 속에서 가장 보기 힘든 색깔이 분홍색입니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색이죠. 산업폐기물일 수도 있고, 인공적인 개발의 흔적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흰 눈이 쌓인 겨울에서 봄으로 오는 숲 속을 잘 관찰하다보면, 봄은 분홍색에서 온다는 걸 알았습니다. 새 순이 나올 때 노랑이나 초록보다 먼저 나오는 게 분홍색입니다.”


그의 분홍색 덩어리는 현대사회의 편견과 오해를 담은 색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중세유럽에서는 핏빛에 흰색을 더한 분홍색이 남성과 권력의 상징이었는데, 현대에서는 남녀를 구분짓고,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색깔로 쓰이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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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연 원시림은 가장 훼손되기 쉬운 곳이기도 하다. 당장 관광객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개발한 일부 곶자왈은 길을 내고, 외부에서 가져온 흙을 덮고, 햇빛이 들어 음지식물이 없어지고 양지식물이 자라나는 등 생태계가 크게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홍 작가의 그림 속에는 야생동물의 모습이 희끄무레한 색으로 그려져 있다. 무슨 동물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와 함께, 언제든 멸종해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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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가 그린 ‘임시풍경’에는 수많은 버섯이 등장한다. 버섯은 여인을 장식하는 장신구가 되기도 하고, 숲 속에 거대한 나팔모양의 화려한 버섯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비밀의 통로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숙주로부터 영양을 빨아들이고, 번식을 하는 과정에서 숙주를 병들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버섯은 살아 있는 나무 영양을 주고 받고, 수많은 곤충의 먹이가 되기도 합니다. 버섯은 균이지만 생태계와 ‘공존’ 한다는 점에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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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를 예견한 듯한 마스크 시리즈


‘임시풍경’의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처음 마주치는 작품은 갖가지 동물과 새모양, 기하학적 패턴의 무늬로 된 마스크를 쓴 여인들의 모습이다. 제작연도를 살펴봤더니 홍 작가가 2017~2018년도에 그린 그림이다. 작가는 코로나 사태를 미리 예견한 걸까? 그는 “SF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며 영화 속 미래가 불쑥 다가온 현실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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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부리 마스크

마스크 그림은 동물의 모습과 인간이 합쳐진 토템 형상을 띄는가 하면, 기하학적 패턴으로 만든 패션 마스크도 있다. 특히 베니스의 카니발에서 볼 수 있는 ‘메디코 델라 페스테(Medio della peste)’ 마스크를 쓴 여인이 눈에 띄었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했던 페스트를 치료하던 의사들이 쓰던 마스크. 새처럼 긴 부리 모양이 특징으로 요즘 말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고안한 마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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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쪽에 있는 붉은실로 된 마스크를 쓴 중국 여인의 눈동자가 애처롭다. 중국에는 결혼할 운명의 남녀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이 연결시켜주는 붉은실로 연결돼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남녀간의 인연을 맺어주고 액운을 막아주는 붉은실이 코로나의 전염병까지 막아주길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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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한편에 그려진 그림에는 온 산과 들판, 강 위에 분홍색, 흰색, 노란색 물방울 같은 것이 떨어져 내린다. 마치 비말로 전염되는 코로나 바이러스나 미세먼지, 황사, 산성비와 같은 오염된 대기와 물방울이 온 산천에 내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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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소름끼치는 그림은 홍 작가가 2017년에 그린 그림이다. 세상에는 마치 바이러스를 전자현미경으로 본 색깔같은 이물질이 감싸고 있다. 한 가운에는 마스크를 낀 한 여인이 누에 고치에 감싸인 듯 온통 흰색털로 뒤덮고 있다. 마치 코로나 19와 싸우는 의료진의 보호복 차림을 연상시킨다. 홍 작가는 “요즘 태어나는 어린이들을 부모가 유해한 외부 환경을 피해서 수십 겹으로 된 보호복을 입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했다.


홍 작가는 “지구의 환경이 점차 파괴되고 오염되는 현실에서 치명적인 호흡기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다가온 경고”라며 “자연과의 ‘공존’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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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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