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팬 주름에 깃든 만고풍상의 강렬함

[컬처]by 동아일보

한국인의 원형 탐구한 권순철


터미널-기차역-장터서 마주친 촌로의 초연한 얼굴 속엔

고난의 역사 이겨낸 숭고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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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철의 ‘얼굴’(260×194cm·2010년)을 가까이서 보면 산맥처럼 겹겹이 쌓인 물감을 발견할 수 있다. 다양한 색채와 질감이 마치 추상 작품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몇 발자국 물러서면 캔버스 위에 떠 있는듯한 얼굴이 보인다.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인식에서 출발해 그림의 논리를 고려하며 쌓아올린 작품이기에 가능한 효과다. ⓒ권순철

《깊게 팬 주름과 소나무 껍질처럼 메마른 피부. 슬픔에 탄식하거나 때로 통곡하는 듯한 표정. K팝과 K뷰티를 자랑하는 한국인의 깊은 곳엔 이 얼굴들이 자리한다고 그림은 말한다. 한국 미술의 ‘딥 컷(Deep Cut)’, 숨은 보석인 권순철 화백(76)의 작품 세계를 지면에는 시원하게, 동아닷컴에는 심층적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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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철의 한국적 원형 찾기는 얼굴과 넋.산 시리즈로 이어져 왔다. 위부터 ‘형제―한국인의 얼굴을 찾아서 1’(1979년), ‘수인선 할머니’(2007년), ‘얼굴’(2009년), ‘넋’(2001년)‘몸―넋’(2003년), ‘넋-손’(2009년).

정체성은 동시대(컨템퍼러리) 미술에서 여전히 중요한 화두다. 짐바브웨의 코끼리 똥으로 작품을 만든 크리스 오필리는 1998년 영국 저명 현대미술상인 터너상(賞)을 받았다. 독일 작가 안젤름 키퍼(75)는 나치와 전쟁의 역사를 직시한 작품들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는 미국의 인종주의를 고발한 아서 자파(59)에게 황금사자상을 주며 ‘흑인의 삶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를 예견했다. 국제 미술계를 주도하는 미술관들은 유럽 백인 중심의 미술사를 반성하고 지역 미술사 발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한때 ‘우리 것’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맹목적인 국가주의나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사대주의의 이분법에 빠지고 말았다. 세계적 보편성을 바탕에 둔 한국의 정체성 탐구는 소수의 영역이었다.


권순철은 이런 척박한 토양에서 1960년대부터 수십 년간 한국인의 얼굴과 넋, 산을 그리며 원형(原型)을 찾아갔다. 병원 기차역 시장 같은 길거리 스케치로 시작한 얼굴에 6·25전쟁, 4·19혁명 등의 역사가 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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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90년대 거리에서 이어진 얼굴 스케치. 초기에는 해부학적 골상에 집중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인물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권순철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 자연스러운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며 몰래 스케치를 했다. 자신이 모델이 되고 있다는 걸 알아챈 행인이 그의 스케치북을 뺏으려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림 속 얼굴은 ‘불쌍한 이웃’이 아니라 고된 역사를 겪어낸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1일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일제강점기부터 역사를 몸으로 겪은 얼굴에는 숭고함이 있다”고 말했다. “과거 서울의 터미널이나 기차역에 가면 지방에서 자식들 보러 상경한 촌로들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들을 겪으면서도 땅과 가족을 지키며 살아온 초연한 얼굴엔 압도적 기운이 있다. 이 얼굴의 겉모습뿐 아니라 정신까지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적인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권순철의 ‘얼굴’은 한국인의 고통 기쁨 울분 즐거움, 그 모든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보편적 인류의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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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철 화백::


▽1944년 경남 창원 출생

▽1984년 서울대 미술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9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

▽2003년 프랑스 트루아 현대미술관 개인전

▽2006년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 미술관

‘경계선: 소나무협회 그룹전’

▽2016년 대구미술관 개인전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020.06.1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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