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낮은 기념비

[컬처]by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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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나셰 카디슈만 ‘떨어진 나뭇잎들’, 1997∼2001년.

기념비는 뜻깊은 일이나 비극적 사건,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만든 조형물이나 건축물 등을 말한다. 20세기 가장 끔찍한 비극 중 하나였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기념비는 역설적이게도 전범국이자 학살의 주체였던 독일에 가장 많이 세워졌다.


2001년 베를린 중심부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유대인 박물관이 들어섰다. 대니얼 리버스킨드가 설계한 은색 티타늄의 박물관은 ‘독일인의 속죄의식을 담은 건축’이란 평가를 받으며 베를린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됐다. 폴란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건축가는 지그재그로 생긴 번개 모양의 건물 안에 텅 빈 ‘부재’의 공간 몇 개를 만들어 유대인들의 잃어버린 삶과 역사를 기리고자 했다. 그중 ‘기억 부재’로 불리는 곳은 이스라엘 미술가 메나셰 카디슈만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건물 꼭대기까지 뻥 뚫린 공간 안에 녹슨 강철로 만든 1만 개의 얼굴 조각상을 깔아 놓은 설치 작품으로, 둥글고 납작한 얼굴들은 모두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떨어진 나뭇잎들’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이는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예술작품은 원래 손대거나 밟으면 안 되지만 이 작품은 관객이 밟아야 완성된다. 작품 위를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발아래에서는 자글자글 쇠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마치 그 옛날 희생자들의 비명소리 같기도 하고 혼령들의 우는 소리 같기도 하다. 관객들은 본의 아니게 폭력의 가해자가 되면서도 피해자들의 고통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홀로코스트를 넘어 세상의 모든 폭력과 전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라고 말한다.


기념비 제작자들은 보통 크고 높은 걸 선호한다. 이슈를 만들어 주목받고자 한다. 하지만 카디슈만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기념비를 선택했다. 관객의 발에 차이고 밟히면서도 그것을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에겐 절대 잊지 못할 긴 여운과 감동을 준다. 해마다 70만 명이 자발적으로 이곳을 찾는 이유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2020.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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