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권하는 사회

[컬처]by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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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1769년경.

노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푹신푹신하고 큰 쿠션에 등을 기댄 채 왼쪽 팔은 나무 팔걸이에 얹었다. 뒤로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는 보라색 리본으로 묶었고, 시선은 오른손에 쥔 책에 완전히 고정돼 있다. 소녀는 대체 누굴까? 무슨 책이기에 저리 열중해서 읽는 걸까?


‘책 읽는 소녀’는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프랑스는 귀족들의 향락과 사치가 극에 달해 지성과 교양 있는 생활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프라고나르는 세속적이고 관능미 넘치는 그림으로 귀족들의 총애를 받던 화가였지만, 이 그림에서만큼은 독서라는 주제를 통해 도덕적 메시지를 주고자 했던 듯하다. 화려한 소녀의 의상에 비해 주변 배경이 매우 검소하게 그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소녀가 읽고 있는 작은 책은 당시 엘리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볼테르의 ‘캉디드’ 같은 사회 풍자 소설로 보인다.


궁금했던 소녀의 정체가 풀린 건 비교적 최근이다. 이 그림은 프라고나르가 37세에 제작한 18점의 ‘판타지 인물’ 연작에 속하는데, 2012년 이 연작을 연습한 드로잉이 발견됐다. 종이 한 장에 18명의 초상이 엄지손톱만큼 작게 그려진 드로잉이었다. 그림에는 신녀, 가수, 작가, 악기 연주자, 배우, 장군, 귀부인 등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하는데, 그중 독서하는 소녀가 가장 먼저 나온다. 주목할 점은 이 소녀만 빼고 나머지 인물 아래에는 주문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실제 모델이 존재하는 다른 그림들과 달리, 이 소녀만이 화가의 상상에서 나온 진짜 ‘판타지 인물’인 거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을 이를 때 ‘판타지’라는 말을 쓴다. 상류계급의 사치와 방탕이 극에 달하던 시대에 책 읽는 지성인은 그야말로 판타지 인물처럼 여겨졌을 터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2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책을 권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은화 미술평론가

2020.09.1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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