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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땅의 맛’
부동산 디벨로퍼의 세계

by이코노믹리뷰

‘땅의 맛’ 부동산 디벨로퍼의 세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직은 부동산 디벨로퍼(Developer)다. 그는 뉴욕 맨해튼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굴지의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2003년 NBC 리얼리티 프로그램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에서 수십만명의 지원자 가운데 회사 경영자를 공개 채용하는 기업가로 등장한 그는 “당신 해고야(You’re Fired)”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전국적 인지도를 얻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호텔, 빌딩, 콘도, 골프클럽을 개발했다. 뉴욕의 랜드마크로 꼽히는 58층 마천루 트럼프타워에서 당선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펜트하우스에 거주하기도 했다. 서울 여의도의 트럼프월드 1ㆍ2차, 용산 한강 대우 트럼프월드, 부산 트럼프월드 센텀 1ㆍ2차, 부산 트럼프월드 마린, 대구 트럼프월드 수성 등도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운영 자문 등으로 참여한 국내의 고급 아파트들이다. 정치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가 대통령이 된 것도 이처럼 ‘트럼프’라는 이름의 수많은 부동산 자산들이 가진 상징성과 명성 때문이었다.

 

디벨로퍼라는 말은 아직 생소하지만 현재 한국에 등록된 개발업 등록사업자는 국가공간정보포털 기준 5207개 업체에 이른다. 한국 디벨로퍼 단체인 한국부동산개발협회는 스스로 ‘황량한 대지에 꿈과 도시를 디자인하는 예술가’라고 평한다. 빈 땅에 어떤 건축물을 지을지 기획하고 매입부터 택지개발과 계획, 사업 자금 동원, 분양과 사후처리까지 모든 업무를 아우르고 처리하는 민간 도시개발의 주체라는 설명이다.

 

도시가 고도화됨에 따라 ‘복부인’과 ‘떳다방’으로 대변되는 투기세력과 공급 주체인 대형 건설시공사들이 물고 물리며 투기판으로 만들어 온 한국 부동산 시장에도 토지의 잠재력을 이해하고 기획하는 조정자 ‘디벨로퍼’가 등장하고 있다.

한국의 디벨로퍼들

‘땅의 맛’ 부동산 디벨로퍼의 세계

국내 디벨로퍼는 1990년대를 중심으로 개발된 토지에 주택, 상가, 오피스텔 등을 공급하는 역할만을 담당하는 부동산 사업시행자로 활동이 국한됐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개발사업의 주체였던 대형 건설업체들이 개발사업을 포기하면서 다른 전기를 맞게 된다.

 

업황이 어려워지자 대형 건설업체들은 개발사업을 포기하거나 보유 토지를 매각하면서 단순 도급사업에만 치중하게 된다. 시행자로서의 건설사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이들이 담당하던 기획과 개발, 인허가 업무 등을 대행해주는 시행사, 한국형 디벨로퍼들이 전면에 나서게 됐다. 시행은 디벨로퍼가, 시공은 건설사가 맡는 것으로 역할이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부동산 경기 호황기를 맞은 디벨로퍼들은 공격적인 사업을 추진하면서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국내 1세대 디벨로퍼인 ‘한국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정춘보 신영그룹 회장, 부동산 개발업계 1위 업체 엠디엠(MDM)의 문주현 회장, 건실한 부동산 개발사로 평가받는 일레븐건설 엄석오 회장 등에 이어, 대규모 주택개발사업에 역점을 둔 피데스개발의 김승배 대표, 오피스ㆍ호텔 개발사업 디벨로퍼 이은호 시티코어 전무 등이 다음 세대 디벨로퍼다.

‘땅의 맛’ 부동산 디벨로퍼의 세계

정춘보 회장의 신영그룹은 지난해 연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1984년 소규모 빌라 공급업체로 시작해 현재 자산운용사를 비롯한 여러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부동산 종합회사 신영그룹의 지난해 매출은 1조4858억원으로 2015년(9556억원) 대비 55.4% 증가한 수치다.

 

과열 양상까지 보이던 주택시장에서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의 분양에 성공하면서 역대 최대 실적을 올린 것이다. 올해 상반기 1조2000억원대 프로젝트로 개발업계 최대의 관심사였던 여의도 문화방송(MBC) 부지 입찰에서도 신영이 포함된 NH투자증권ㆍGS건설ㆍ신영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가 선정됐다.

 

문주현 엠디엠 회장은 부동산신탁업계 1위인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해 코스피에 상장시켜 화제가 됐다. 문 회장이 이끌고 있는 엠디엠, 엠디엠플러스, 한국자산신탁, 한국자산캐피탈, 한국자산에셋운용 등은 서로 시너지를 내며 종합 부동산기업으로 성장했다. 문 회장은 현재 한국부동산개발협회장이기도 하다.

 

김건우 회장과 함께 피데스개발을 설립한 김승배 대표는 아파트 사업을 중심으로 고급 빌라, 주상복합단지. 오피스텔 등 다양한 주거형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대우건설 출신인 그는 민간 도시개발사업과 도시재생, 역세권 개발 사업 등에 집중하고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에서 부동산 본부장을 지냈던 이은호 시티코어 전무는 서울 센터원 빌딩, 포시즌스 호텔, 코트야드 서울판교, 중국 상하이 미래에셋빌딩 등을 개발했고 현재는 서울 도심 내 마지막 대형 개발 프로젝트가 될 종로구 공평동 공평 제1ㆍ2ㆍ4지구에 ‘센트로폴리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영국계 부동산 컨설팅사 세빌스 출신인 그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디벨로퍼로서의 오랜 경험을 설계에도 반영시켰다. 이 전무는 “빌딩 이용자들의 이용 편의를 위해 화장실 공간 확충, 주차장 입출차, 동선 최소화, 리테일 시설 축소 등을 설계사에 직접 요구했다”고 말했다. 디벨로퍼는 이처럼 사업의 총괄 프로듀서로서의 역할도 해야 한다.

‘오래된 미래’ 일본

디벨로퍼들의 영역이 넓어지고 역할이 주목받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시장의 변화 때문이다. 그동안 공급 등 양적확대에만 치중할 수 없었던 국내 부동산 시장도 인구구조와 경제 상황이 변화했고 그 사이 주택보급률은 100%를 초과했다. 과거 난개발된 도심은 노후화 과정에 들어섰다.

 

우리나라 전국 3470개 읍면동 중 2239개소(65%)에서 도시 쇠퇴가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보다 앞서 역도시화를 거친 선진국들은 버려진 도심 지역으로 사람들이 다시 모일 수 있게 도시재생사업을 해왔고, 디벨로퍼들은 도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냈다. 미국의 트럼프 기업, 일본의 미쓰이 부동산그룹, 중국의 최대 부동산 기업인 완다그룹과 안방그룹 등이 이 같은 대표적인 디벨로퍼 업체다.

 

이웃나라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우리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할 만큼 유사함 점이 많다. 기후와 문화가 비슷해 민간 업체와 정부가 부동산 정책과 트렌드를 자주 연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땅의 맛’ 부동산 디벨로퍼의 세계

일본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대형 디벨로퍼들이 많다. 1941년 설립된 일본 미쓰이 부동산그룹은 일본의 대표 디벨로퍼 업체다. 2015년 기준 영업이익이 2.2조원으로 추정되는 기업으로, 도쿄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시를 운영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일본 내에 프라임급 오피스 빌딩의 매각과 이전거래 등은 모두 미쓰이와 관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쓰이 부동산그룹은 주택건설에서 운영까지 포괄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쓰이 디자인테크라는 인테리어 업체를 가지고 있고, 리스업체, 세입자 관리 대행 등도 도맡아 해준다. 과거 우리 국토교통부도 미쓰이 부동산그룹과 같은 선진적인 종합 부동산 회사를 국내에 도입하겠다고 했다.

 

한국 특유의 선분양 제도 아래서 수급 불균형은 주기적으로 나타났고 이에 따라 시장 호황기를 제외하면 실제 주택사업의 사업성은 앞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고령화가 시작되면서 신규 주택이 예전만큼의 수요를 담보할 수도 없고, 소유에서 주거로 주택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업계가 일본과 같은 장기 운용형 수익 구조 모델을 연구하게 된 이유다.

 

실제로 미쓰이 부동산 그룹은 다양하고 전문적인 부동산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도쿄의 구시가지 재생에도 참여했고 일자리를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왔다. 문재인 정부가 대선 당시 공약으로 강력하게 내세웠던 ‘도시재생’과 ‘일자리’도 미쓰이에서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도쿄 롯폰기 힐스 개발을 주도한 일본 부동산업체 모리빌딩도시기획 박희윤 한국지사장은 “도시재생 사업의 주체는 ‘디벨로퍼’다”라고 말했다. 일방적인 대규모 개발이 아니라 역사, 문화, 예술 등 도시를 이해하는 주체가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도시재생의 시대, 디벨로퍼의 진화

저금리 기조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고 도시의 쇠퇴가 빠르게 일어나면서 부동산 산업도 분양 중심에서 도시 재생과 임대사업 중심으로 바뀌었다. 기존 시행사들과 건설사도 ‘종합 부동산 서비스 회사’로 진화한다고 선언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도 ‘공공 디벨로퍼’를 자처하고 있다.

 

정부는 양적 팽창 중심의 도시정책에서 쇠퇴한 기성 시가지 재생으로 도시정책을 전환하는 국가 차원의 도시재생정책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진행됐던 도시재생 사업 선도지역에서의 사업도 정부 재정에 대부분 의존했다. 민간사업자인 디벨로퍼들의 적극적으로 참여를 끌어내 수익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정부의 고민이다.

 

한 도시재생사업 관계자는 “도시재생 사업의 주체가 주민이 되면 서로의 이해관계가 자주 충돌해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어렵고, 정부가 주체가 되면 수익성이 나빠져 기금만 낭비되고 마는 결과를 낳는다”면서 “민간사업자이면서 도시계획 전문가인 디벨로퍼들의 역할이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땅의 맛’ 부동산 디벨로퍼의 세계

시중에 유동자금이 많아져 개인 투자자를 상대로 한 공모형 부동산 펀드와 리츠가 빠르게 성장 중이다. 이들은 부동산 실물 자산에 투자하는 금융상품으로, 이들 시장의 확장은 임대주택과 오피스 빌딩 등 수익형 부동산에 대한 수요를 자연히 증가시킨다. 오피스나 상가 등에 참여하는 비주택 시장 디벨로퍼 수는 많지만 대부분 영세한 수준이고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업체는 SK디앤디, 엠디엠, 롯데자산개발, KT에스테이트 등이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여가시간이 중요해짐에 따라 호텔과 리조트, 골프장 개발도 주목받고 있다. 리조트 전문 개발업체 에머슨퍼시픽은 10년이 넘게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남해 갯벌에 해변 골프코스를 지었다. 에머슨은 고급 브랜드 ‘아난티’를 가지고 설계에만 5년이 넘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끝에 서울 시내에 최고급 회원제 리조트인 ‘아난티 펜트하우스 서울’을 완성했다. 지난달 에머슨퍼시픽은 총 518실 규모의 특급 호텔과 회원제 리조트 복합단지 ‘아난티 코브’를 부산 해운대에 개장하기도 했다.

 

공공시설의 지방 이전과 건물 노후화로 재건축 사업지로 등장한 도심의 땅들이 디벨로퍼들의 주된 관심사다. 서울 여의도 MBC 옛 사옥 부지 개발 입찰에 주요 개발업체인 디엠, 피데스개발, 신영, 시티코어 등이 건설사와 컨소시엄을 만들어 달려들었다. MBC가 매물로 내놓은 여의도 사옥의 부지 면적은 1만7795㎡로 업무용ㆍ주거용ㆍ판매용 시설을 함께 짓는 1조2000억원 규모의 복합 재개발 사업이다.

 

용산개발 재개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 유엔군사령부 부지 매각 입찰에도 6개 사업자가 참여해 각축전을 벌인 결과, 부동산개발회사인 일레븐건설이 1조552억원에 매입하기로 했다.

 

30대의 젊은 디벨로퍼 문인식 어반웨이브 대표는 “도심 집중화 현상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도시 재생과 콘텐츠 개발로 디벨로퍼의 영역이 확장될 것으로 내다봤다. 문 대표는 “공기업을 통한 택지 공급 방식의 신도시 개발 사업은 더 이상은 불필요하다. 앞으로는 기존의 도시를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재생할지가 가장 큰 이슈”라면서 “부동산의 용도 변경, 주택 재건축과 리모델링 활성화, 운영자 중심의 상권 형성, 개발 사업 규모의 다양화 등이 최근 업계에서 두드러진 트렌드다”라고 했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불법 인허가, 브로커, 사기꾼, 시행사 비리, 정치권 로비 등 이들에게 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업계 관계자는 “수요자와 변화된 부동산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 예전처럼 개발 수익만을 좇으며 편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디벨로퍼에 대한 인식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개발사업자들의 운신의 폭만 스스로 줄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