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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누가 베를린구상을
‘허황된 꿈’이라고 했나?

by이데일리

대북특사단 北과 획기적 합의…남북정상회담·北비핵화·북미대화

지난해 5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최대 외교적 성과

‘동네북’ 베를린구상, 애물단지서 옥동자로 화려한 부활

남북관계 획기적 개선 북미대화 통한 한반도 비핵화 시동

누가 베를린구상을 ‘허황된 꿈’이라고

2017년 7월 6일 오후 독일 베를린 옛 시청. 문재인 대통령이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문 대통령은 독일 통일조약 협상이 이뤄진 역사적 장소인 ‘알테스 슈타트하우스’에서 열린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한반도 평화비전과 대북정책 구상을 집대성한 ‘베를린 구상’을 발표했습니다. 200자 원고자 100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한 5대 정책방향과 4대 실천과제를 제시했습니다. 핵심은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우리가 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 그저 집권을 했으니 대북구상을 발표한 것이겠지 하고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날 사회를 맡은 쾨르버재단 노라 뮐러 국제관계 이사의 발언이었습니다. 뮐러 이사는 문 대통령의 연설과 질의응답이 마무리된 후 “더 붙잡고 싶지만 일정 차질로 늦어질까봐 보내드린다”며 의미심장한 작별인사를 남겼습니다. 뮐러 이사는 “한국어로 ‘문’이 도어(door)라는 뜻이라는 걸 배웠다. 대통령을 위해 ‘대화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원한다”고 밝혔습니다. 재치만점 인사에 문 대통령도 환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문’이 ‘달(moon)’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대화의 문(door)’ 이색 표현에 만족감을 표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더는 베를린구상이 허황되다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북특사단의 파격적인 방북성과가 이를 증명합니다.

文대통령 야심작 ‘베를린구상’ 동네북 신세…北 무시, 美 의심, 野 조롱

베를린구상은 긴 세월동안 문 대통령의 애물단지였습니다. 말 그대로 속 썩이는 자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미국의 군사적 응징 경고가 이어질 때마다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비아냥과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문 대통령이 냉엄한 국제사회의 질서와 현실을 무시한 채 민족적 감성에 휩싸여 허황된 대북접근법을 내놓았다는 게 비판의 골자입니다. 실제 그런 면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한반도 문제에서 대한민국 소외현상을 뜻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라는 표현은 유행어가 될 정도였습니다. 베를린구상은 요원해보였습니다. 정부의 대북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과 미국 등 한반도 문제 핵심 당사국들도 뭔가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우선 북한은 우리 정부를 전혀 상대하지 않고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요구하는 이른바 ‘통미봉남’식 태도를 줄기차게 고수했습니다. 미국 역시 “한미동맹은 튼튼하다”는 외교적 수사와는 달리 우리 정부의 대북유화적 태도에 내심 적잖은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국내로 시선을 돌리면 더 엉망이었습니다.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한다는 이른바 ‘한반도 운전자론’에는 맹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야당에서는 연일 문 대통령이 운전석은 고사하고 조수석에도 앉지 못한다는 조롱섞인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한반도 현실을 외면한 채 설익은 이상론에 치우친 베를린구상의 남은 운명은 사실상 폐기 수순밖에 없었습니다.

‘참고 또 참고’ 文대통령의 전략적 인내, 베를린구상의 화려한 부활

새해 벽두부터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온갖 조롱 속에서 ‘참고 또 참고’ 문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가 빚어낸 열매는 달콤했습니다. 한반도 전쟁불가론과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담대한 구상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외교안보 분야 난맥상이 순식간에 풀리는 분위기입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의 파격적인 신년사 이후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 남북 해빙무드가 이어질 때만 해도 설마설마 했습니다.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이용만 당할 것이라는 우려도 팽배했습니다. 그러나 김여정·김영남·김영철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올림픽 개폐막식 참석차 방남과 문 대통령 대북특사단의 방북 이후 상황은 180도 변했습니다. 베를린구상은 애물단지 신세에서 벗어나 옥동자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북미관계 역시 ‘대화의 문(door)’을 열 조짐입니다.

 

대북특사단은 6일 파격적인 선물꾸러미를 들고 귀환했습니다. 이날 오후 8시 정각 춘추관 2층 브리핑룸. 수석 대북특사였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특사단의 방북활동에 대한 언론발표문을 차분히 읽어 내려가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남북은 국내외의 크고작은 우려에도 6개항의 획기적인 합의를 이뤘습니다. △4월말 판문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정상간 핫라인 설치 △북측의 비핵화 의지 표명과 체제안전 보장시 핵포기 의사 △비핵화·북미관계 정상화 위한 북축의 대화 용의 표명 △대화국면 속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중지와 핵무기 대남 불사용 확약 △남측 태권도시범단과 예술단의 평양 방문 초청 등 하나같이 놀라운 합의였습니다. 이상에 치우친 순진한 정세인식이라는 비판을 받던 베를린구상의 부활을 알리는 서막이었습니다.

누가 베를린구상을 ‘허황된 꿈’이라고

文대통령 인식변화 ‘기대→낙담→희망→부활’…한반도 운전자론 재시동

남북관계는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상징하듯 유례없는 대전환의 시기에 돌입했습니다. 북미대화 역시 미국의 반응에 따라 급물살을 탈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합의 등 남북관계 진전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내비친 것과 관련, “수년 만에 처음으로 진지한 노력이 모든 관련 당사자들에 의해 펼쳐지고 있다”며 “북한과의 대화에 있어 가능성 있는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입니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이 탄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창올림픽 기간 동안 남북대화 및 김여정·펜스 라인의 북미대화 중재 노력으로 외교적 승자로 등극했던 문 대통령이 평창 이후 국면에는 더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분야 인식은 취임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우선 취임사에서는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겠다”며 “필요하면 곧바로 워싱턴으로 날아가겠다. 베이징과 도쿄에도 가고 여건이 조성되면 평양에도 가겠다”고 각오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두 달 뒤인 지난해 7월 독일순방 이후 국무회의에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해결할 힘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무력감을 토로했습니다. 불과 5개월 뒤에는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2일 신년인사회에서 “이제는 우리 스스로를 강대국의 주변부처럼 바라보면서 왜소하게 인식하는데서 벗어나 강한 중견국가로서 좀 더 주체적이고 당당해질 때가 됐다고 느낀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기대→낙담→희망을 거쳐 문 대통령의 대북인식과 구상은 부활을 이야기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베를린구상 여전히 엇갈리는 전망…노벨평화상 vs 군사적 충돌

베를린구상이 세상에 나온 지 8개월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실현불가’를 외쳤던 인식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실제 문 대통령이 베를린구상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은 하나하나 현실화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베를린구상의 끝은 어디일까요? 전망은 여전히 엇갈립니다. 일부에서는 베를린구상이 남북정상회담, 북미대화 재개와 한반도 비핵화라는 성과물을 남기면서 궁극적으로는 노벨평화상을 향해 내달릴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는 장밋빛 전망에 불과하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베를린구상이 문 대통령의 뜻대로 현실화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만일 베를린구상이 실패하면 한반도 정세는 지난해 하반기 군사적 충돌 일보 직전의 상황보다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노벨평화상과 군사적 충돌. 베를린구상의 마지막이 어디를 향할지는 이제 지켜볼 일만 남았습니다.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