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 불태워달라"던 당부 거스르고 15년 만에 나란히

[컬처]by 이데일리

환기미술관 '문미애·한용진 직관과 교감' 전

화가 문미애, 조각가 한용진 부부 예술세계

뉴욕시절 김환기 인연, 사별 전 일화 담아

'문' 회화 60여점 '한' 조각·드로잉 200여점

조각그림 '회화설치', 투병아내 드로잉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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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미애의 ‘무제’(1980년대·위)와 ‘회화설치’(2019). 캔버스에 앤코스틱 기법으로 작업한 작가의 회화작품에 환기미술관 학예사들이 제작한 회화설치를 연결했다. 문미애가 캔버스 작업에서 잘라낸 가로세로 20~30㎝ 정도의 자투리 조각그림 수천 점 중 선별해 구성한 회화설치는 학예실의 몇주 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완성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여자는 화가고, 남자는 조각가다. 그림 그리는 여자의 재능은 일찌감치 빛을 냈나 보다. 서울예고 시절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낸 작품이 입선하며 천재소녀로 불렸다니. 이 ‘사건’은 엉뚱하게 국전에 출품하는 작가나이를 제한하는 계기가 됐단다. 남자는 경기고에 다니던 때 한국전쟁이 터지자 책 대신 총을 들고 전쟁에 참전했다. 생사고비가 왜 없었을까. 무사히 학교로 돌아온 그는 서울대 미대에 진학한다. 뒤따라 진학한 여자가 남자를 처음 만난 곳이다.


두 사람은 잘 통했나 보다. 자신의 예술을 꿰뚫는 ‘직관’, 서로의 인생을 보듬는 ‘교감’이란 게 말이다. 1962년 예술가 부부가 되고 1967년 미국 뉴욕에 정착한 뒤 각자의 작품세계는 단단해져 갔으니. 여자는 망설임 없는 대담한 붓질로, 당시 한국작가가 쉽게 시도하지 못한 추상회화의 길을 다져나갔다. 남자는 1963년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조각작품을 내놓은 이후, 한국의 돌인 화강석·판마석으로 현대추상조각을 본격화했다.


두 사람만의 세상이 기울어진 건 여자가 남자를 떠나면서다. 향년 67세, 폐암에서 전이한 뇌종양·척수암 때문이었다. 지극정성으로 여자를 간호하던 남자는 정과 망치 대신 종이와 펜을 들고 부처가 돼 가는 여자의 얼굴을 매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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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미술관이 연 ‘직관과 교감’ 전 전경 부분. 전시장은 문미애의 회화작품을 한용진의 조각·회화·드로잉들이 고즈넉이 감싸고 있는 구조다. 문미애의 ‘무제’(1980년대 중반) 두 점 뒤로 멀리 한용진의 조각 에스키토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환기미술관이 특별기획전 ‘직관과 교감’을 열고 부부작가 문미애(1937∼2004)와 한용진(85)의 생애를 더듬는다. 환기미술관의 기획전이라면 아무래도 김환기(1931∼1974)의 예술세계와 연관이 있을 터. 김환기 예술의 가치와 영향력을 보존하자고 미망인 김향안(1916∼2004)이 1978년 설립한 환기재단이고 1992년 개관한 환기미술관이 아니던가. 미술관은 “1960년대부터 김환기·김향안 부부의 예술여정에 동행했던 문미애·한용진의 작품세계에 보내는 오마주”라며 이번 전시에 아련한 의미를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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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미애의 ‘무제’(1974). 모노크롬의 색감으로, 마치 비를 흘려내듯, 캔버스 위쪽에 두텁게 유화물감을 얹고 나이프 등으로 부드럽게 지워가듯 작업했다(사진=환기미술관).

김환기·김향안 부부와 각별했던 문미애·한용진

세월에 촘촘히 박힌 그들만의 사연을 다 알 수도, 알아낼 방법도 없다. 하지만 문미애·한용진의 뉴욕생활에 김환기의 뉴욕시대가 오버랩되는 건 분명하다. 그 분기점은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 김환기가 한국대표로 처음 참가했던 비엔날레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 김환기가 ‘섬의 달밤’(1959) 등 3점의 회화를 낸 이 비엔날레에 한용진도 참가했던 일은 많이들 모르는 듯하다. 전시는 한용진이 상파울루비엔날레에 냈던, 주철조각 ‘무제’(1963)를 공개하는 것으로 김환기와 한용진 사이에 엮인 고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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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진의 회화와 조각. 앞쪽 조각이 1963년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출품했던 ‘무제’(1963·주철)다. 뒤쪽 회화는 캔버스에 오일·안료를 섞어 완성한 ‘무제’(2002)(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실 김환기·한용진의 인연은 그 이전부터다. 경기고 3학년이던 한용진이 홍익대가 주최하는 ‘국제학생미술대회’에서 입상을 했는데, 상을 수여한 인물이 당시 홍대 미대 교수 김환기였다는 거다. 그 끈 덕이었을까. 상파울루비엔날레 후 김환기는 귀국을 포기한 채 뉴욕으로 날아가 타계할 때까지 뉴욕시대를 펼쳤고, 4년 뒤 문미애·한용진이 뉴욕에 정착하면서 양 커플의 관계가 각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때 분위기는 국내 최고령 화가인 김병기(103) 화백의 회고담에서 엿볼 수 있다. “뉴욕에서는 김환기·김향안 부부, 한용진·문미애 부부, 김창열 그리고 나까지 여섯이 주로 모였다. 모두 청운의 꿈을 안고 뉴욕에 오기는 했지만,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현대미술에 익숙한 시절도 아니었다”(한겨레 2017. 11. 2). 끈끈했던 이들의 교류는 김환기의 이른 타계가 막아섰는데, 그 섭섭함을 한용진은 김환기 묘소에 비석을 만들어 세우는 것으로 대신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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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절 조각가 한용진(뒤)과 화가 문미애 부부(사진=환기미술관).

‘자투리그림 설치’ ‘투병 아내 드로잉’ 등 260여점 걸어

전시는 문미애가 1960∼1990년대 작업한 회화 60여점을 앞세우고 한용진이 2010년대까지 작업한 조각·수채화·드로잉 등 200여점을 아우른다. 특히 1988년 개인전을 끝으로 2008년 한 차례의 추모전 이전까지 세상이 미처 돌아보지 못한 문미애의 대작이 중심을 이루는데. 모노크롬의 색감으로, 마치 비를 흘려내듯, 캔버스 위쪽에 두텁게 물감을 얹고 나이프 등으로 부드럽게 지워가듯 작업한 ‘무제’(1974), 어느 풍경에서 따온 듯 파스텔톤 전경을 날카로운 붓터치로 빼낸 ‘무제’(1980년대 중반), 끈으로 캔버스를 분할한 뒤 부직포에 엔코스틱(송진이나 밀납을 섞어 만든 물감) 기법으로 작업한 조각그림을 콜라주한 ‘무제’(1990년대)까지. 추상표현주의의 기운이 스멀스멀 뻗쳐나오는 작업, 계산하지 않고 탁월한 감각만으로 뽑아냈다는 문미애 회화의 스펙트럼은 기대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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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미애가 1990년대 엔코스틱 기법으로 작업한 ‘무제’(윗줄 가장 왼쪽) 한 점과 1970년대 유채로 그린 ‘무제’ 나머지 8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깊이가 담긴 색조와 대담한 화면구성이 눈길을 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 중 백미는 ‘회화설치’(2019)라 이름 붙인 10여점. 한용진이 보관해온, 가로세로 20~30㎝ 정도의 자투리 조각그림 수천 점을 받아 미술관 학예사들이 몇주에 걸쳐 회화퍼즐로 완성했다는 그것이다. 문미애가 고민했을 예술적 화두를 현재로 끌어내 큐레이션을 입힌 형태. 이를 두고 성민아 학예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캔버스에서 잘라낸 수천 점의 조각에 대해 문 작가는 어떤 플랜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답습하는 걸 늘 경계한 작가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새로운 조형언어로 채우고 분석하고 해체하려 한 게 아닐까 한다.” 결국 회화설치는 ‘문미애 연구에 내놓은 제안이면서 결과’였다는 얘기다. 작가의 작품이면서 작가의 작품이 아닌, 드문 시도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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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미애의 ‘회화설치’(2019). ‘직관과 교감’ 전에는 환기미술관 학예사들이 제작한 ‘회화설치’ 10여점이 나왔다. 한용진이 보관해온, 가로세로 20~30㎝ 정도 되는 문미애의 자투리 조각그림 수천 점을 받아 미술관 학예사들이 몇주에 걸쳐 회화퍼즐로 완성한 것이다. 문미애가 고민했을 예술적 화두를 현재로 끌어내 큐레이션을 입힌 형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문미애의 다채로운 회화에 대한 한용진의 답은 다채로운 드로잉이다. 1978년부터 2012년까지 작업한 조각 에스키토(작품에 앞서 간단묘사한 초벌그림)가 수십 점. 작업노트·수첩에 빼곡히 박아낸 예술과 인생의 편린은 셀 수 없을 만큼 촘촘하다. 그중 가장 특별하다면 ‘미애 얼굴’ 연작. 투병하는 아내를 일기처럼 그려낸 것이다. 노트에서 뜯어낸 건 그나마 양호한 것. 쪽지나 티슈에도 마다하지 않은 연작은 가족이자 동지였던 한 여자에게 바친 종교적 신념처럼도 보인다. 어느샌가 아내의 얼굴은 부처를 닮아가고 있으니. ‘내일이면 새해. 새해는 건강해서 같이 또 일하자 응! 오늘도 잘자 미애야’(2003. 12. 31). 드로잉에 단 이 간절한 한 토막은 끝내 아쉬운 약속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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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진의 ‘미애 얼굴’ 연작 중 한 점. 투병하는 아내 문미애의 얼굴을 매일 일기처럼 그려낸 것이다. 완쾌를 비는 남편의 간절한 바람도 무심하게 몇달 뒤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생전 문미애가 한용진에게 부탁한 일이 있단다. “그리던 그림과 끝낸 그림들 모두를 불태워 달라.” 그럼에도 지금껏 문미애의 작품이 남아 있는 건 그 당부를 냉정히 거절한 한용진의 용단 덕이었을 테고. 이 일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땐 한바탕 다투기부터 할지 모르겠지만, 그거야 두 사람의 사정이 아닌가. 15년 만에 작품으로 해후한 그들을 마주한 우린 그저 다행이지 싶다. 전시는 10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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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진의 ‘한 조각의 돌’(1970년대·화강암). 조각가 한용진의 조각작품을 넉넉히 볼 수 없는 것이 ‘직관과 교감’ 전의 옥에 티라고 할까. 전시장에서의 섭섭함은 미술관 앞마당에서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다. ‘한 조각의 돌’을 비롯해 ‘서 있는 돌’ 두 점(1998·화강암/ 1992·화강암) 등 세 점이 서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019.08.2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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