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었단 말 들으면 오히려 힘 빠지죠

[컬처]by 파이낸셜뉴스

'테크니컬 아트 스튜디오 셀'의 특수분장·세트 전문가

우리에겐 "몰라봤다" 이게 최고의 칭찬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박소담이 칼로 긁던 복숭아털

'암살'에서 나이 든 이정재의 늘어진 뱃살과 검버섯

'남산의부장들' 배우 이성민, 묘하게 박정희 느낌

'백두산' 특수소품 ICBM·핵폭탄 제어장치까지

한국영화를 세계 반열로 이끈, 말 그대로 숨은 주역

파이낸셜뉴스

극한직업-특수분장업체 셀 곽태용 대표 (2020. 01.14 사진=박범준 기자) /사진=fnDB

영화 '기생충'이 지난 13일 한국영화 최초로 제92회 아카데미상 작품·감독·각본·편집·미술·국제영화상 등 6개 부문에 오르는 새 역사를 썼다. 미국의 연예 매체 '버라이어티'는 오스카 최종후보작 발표 이후 "아카데미 회원들이 그동안 한국영화를 너무 무시했다"고 지적하면서 "(봉준호가 말했듯) 한국 영화계에는 수많은 장인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봉 감독은 앞서 넷플릭스 자본으로 '옥자'를 만든 후 "할리우드와 일해 보니 충무로 톱클래스 스태프는 세계에서도 톱클래스더라"고 말한 바 있다.


'기생충'이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데 일조한 장인들 중 유난히 손재주가 뛰어난 집단이 있다. 바로 박찬욱·김지운·류승완·최동훈·김용화·나홍진 등 충무로의 내로라하는 스타감독을 단골로 둔 특수분장 전문업체 '테크니컬 아트 스튜디오 셀'(이하 '셀')이다. 봉 감독의 작품은 '괴물'부터 '마더' '해무'(봉준호 제작), '옥자' 그리고 '기생충'까지 영화 속 특수분장·특수소품·특수세트를 제작했다. 1000만 영화 '괴물'을 비롯해 '광해' '신과 함께' '엑시트' '기생충' '백두산' 등 흥행작에도 빠짐없이 이름을 올린 셀은 앞서 '부산행'으로 제37회 청룡영화상에서 기술상을, '대호'로 제53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기술상을 받았다.


최근 경기 고양 일산 사옥에서 만난 셀의 곽태용 대표는 "한국영화 기술 스태프는 아시아권 최고"라며 "중국, 대만, 일본, 인도에서 활동하는 기술 스태프가 아주 많다. 할리우드와 비교해 가성비가 뛰어나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과의 인연은 '살인의 추억'부터 시작됐다. 그는 "같은 특수분장업체 동료였던 황효균 대표와 함께 셀을 만들었고, 이후 작업한 '괴물'부터 미국 제작진이 참여한 '설국열차' 빼곤 다 작업했다. '기생충'이 좋은 성과를 거둬 뿌듯하다"며 웃었다.

한국 영화계 특수효과의 산실로 '기생충' 작업

파이낸셜뉴스

영화 '기생충'의 주요 소품인 수석은 셀의 작품(CJ엔터테인먼트 제공) /사진=fnDB

2003년 창립해 올해 17년 된 셀은 황효균 대표가 이끄는 특수분장팀과 곽태용 대표가 책임지는 애니매트로닉스·특수소품·세트팀으로 크게 나뉜다. 곽 대표는 "미술팀 내 소품팀·세트팀이나 분장팀이 직접 표현하기 힘들거나 구할 수 없는 게 있으면 우리에게 일이 넘어온다"고 설명했다. '기생충'에서는 주요 소품인 수석과 복숭아를 만들었다. "영화를 찍을 당시 복숭아가 나는 철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기정(박소담)이 커터칼로 복숭아털을 깎는 장면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특수제작이 불가피했다." 극중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분위기가 반전되는 주요 장면으로, 기택 가족의 술수로 쫓겨난 가정부 문광(이정은)이 폭우를 뚫고 초인종을 누를 때, 문광의 부은 얼굴도 셀의 손길을 거친 것이다.


셀의 작업 영역은 상상 이상으로 다양하다. 시체더미 제작이나 괴물·좀비 등의 캐릭터 표현은 물론이고 '엑시트'의 유독가스 살포장치, '백두산'의 ICBM·핵폭탄 제어장치 같은 특수소품도 제작했다. 액션 신에서 흔히 사용하는 야구방망이나 각목, 쇠파이프 등도 만든다. 곽 대표는 "배우들의 안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이 연기할 때 다치지 않고 또 들 때 무겁지 않은 재질로 특수 제작해 소품을 완성한다"고 설명했다.

파이낸셜뉴스

영화 ‘해치지않아’는 사람이 동물 탈을 쓰고 동물 흉내를 낸다는 내용의 영화로, 북극곰, 사자, 기린, 고릴라, 나무늘보를 제작했다. 나무늘보는 (실제 크기가)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았으나, 크게 만들어 영화의 코미디 요소로 활용했다(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사진=fnDB

한국 영화 최초로 '말 애니매트로닉스'를 만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촬영용 말'은 곽 대표가 한 달 이상 말의 움직임을 연구한 끝에 완성한 것이다. '인류멸망보고서'나 '로봇, 소리'의 로봇도 기계 제작에 능한 곽 대표의 손길을 거쳤다. '미스터 고'의 고릴라나 '옥자'의 옥자, '대호'의 호랑이와 늑대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최민식 얼굴을 한 개, 일명 '백 선생 테리어'도 셀의 작품이다. 그는 "최근에는 '해치지 않아'의 동물 탈 작업이 재미있었다"고 부연했다.


관객을 감쪽같이 속인 경우도 많다. '도둑들'에서 '마카오 박' 김윤석의 변장가면,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침·뜸 치료 장면의 이병헌 더미가 대표적이다. "이병헌 더미는 살아 있는 캐릭터와 같아야 했어요. 코로 연기를 흡입하도록 기계장치를 만들어 더미 속에 넣었죠. 당시 남나영 편집기사마저 더미인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뻤죠. 잘 만들었다고 하면 실패한 거예요. (우리의 작업 결과가) 특수분장인 줄 모르는 게 우리에겐 최대의 칭찬이죠."

파이낸셜뉴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정희대통령을 연기한 이성민은 실존 인물과 싱크로율을 높이기위해 신체 특정 부위를 특수분장했다(셀 제공) /사진=fnDB

특수분장은 갈수록 정밀해지고 있다. '암살'에서 화제가 됐던 이정재의 뱃살 늘어진 복근도 셀의 결과물이다.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예상치 못한 곳에 특수분장이 적용됐다. "박정희 대통령을 연기한 이성민 배우를 특수 분장했죠. 얼굴을 닮게 한 게 아니고 신체 특정 부위를 닮게 만들었죠. 어느 부위인지 한번 맞혀보세요."

"잘 만들었다" 평가 받으면 실패, 감쪽같이 속여야 성공

셀에 근무하는 직원은 총 15명. 20대부터 40대까지 학력과 전공도 천차만별이다. 미국에서 특수분장학교를 수료하고 돌아온 유학파도 있고, 중국영화에 특수분장사로 참여하다 합류한 조선족 출신 스태프도 있다. 대졸 비전공자에 고졸 스태프도 있다. 어릴 적부터 모형 만들기가 취미였던 곽 대표 역시 비전공자다. 대학 전공이 영 적성에 맞지 않아 관두고 다양한 경험을 쌓다 우연히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곽 대표는 "학력보다 포트폴리오를 중심으로 본다"며 "전공은 상관없다. 창의성과 응용력이 중요한 분야다. 늘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기 때문에 응용을 잘해야 한다. 주 40시간 근무를 준수하는 것도 퇴근 후 자기개발하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이 고도화되고 있으나 여전히 수작업이 필요하다. "CG의 비중이 높아져도 '옥자'나 '괴물'과 같이 영화적 캐릭터의 경우 카메라가 클로즈업하거나 배우들이 더욱 실감나게 연기하기 위해 실물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수분장·특수소품도 영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중 하나로 특수효과팀, CG팀과의 긴밀한 업무분담을 통해 얼마나 실감나는 영상을 자연스럽게 만들지가 중요합니다."

파이낸셜뉴스

극한직업-특수분장업체 셀 곽태용 대표 (2020. 01.14 사진=박범준 기자) /사진=fnDB

이 분야의 성장 가능성을 물었다. 그는 "있다"고 답했다. "손재주나 경험은 계속 쌓입니다. 실력을 인정받으면, 그 이후는 안정적이죠. 다른 분야로 뻗어나갈 여지도 많습니다." 셀은 1년에 20편 정도 작업하는데 국내 영화를 최우선으로 한다. "늘 그렇듯,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한번 같이 작업한 감독님들이 다음에도 우리를 찾게 만드는 게 셀의 모토죠. 한국영화 작업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셀에는 계약직 직원이 단 한 명도 없다. 모두 정규직이다. "짬 나면 중국·대만 영화, 홍콩 CF도 합니다. 재작년에는 싱가포르 유니버설스튜디오에서 공룡 제작 의뢰가 들어왔어요. 삼성전자 개발 시제품으로, 대장내시경 의료기기를 위한 인체모형도 만들었습니다."


우연한 재능 기부로 보람을 느낀 적도 있다. "영화 '무사'를 찍을 때 한 중국인 스태프의 손가락이 하나 없는 것을 발견하고 가짜 손가락을 만들어줬습니다.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이후 부탁을 받고 발가락 달린 샌들을 만든 적도 있다. "어떤 남자가 자신의 아내가 오른쪽 발가락이 하나 없는데, 샌들을 신어보는 게 소원이라며 수소문해왔죠. 피부와 같게 보이는 재료로 발가락을 만들어 샌들에 부착해 드렸더니 정말 고마워해 뿌듯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파이낸셜뉴스

극한직업-특수분장업체 셀 곽태용 대표 (2020. 01.14 사진=박범준 기자) /사진=fnDB

늘 맨땅에 헤딩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다는 곽 대표는 "의뢰한 일은 뭐든 다 한다"며 웃었다. 기대되는 차기작으로는 "최동훈 감독의 SF영화"를 꼽았다. "한국영화가 그동안 쉽게 도전하지 못한 장르잖아요. 늘 그렇듯, 스스로 만족하는 제작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영화는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만드는 제작물은 덜 중요할 수 있죠. 영화에 잘 녹아들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을 지향하죠. 그러니까, 우리의 속임수를 자세히 알려하지 마세요. 비밀입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0.02.04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