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디스크의 추억

[테크]by 김국현
광디스크의 추억
금방 사라질 것 같았는데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광디스크다. 2004년 칼럼 “위기의 광디스크 몰락의 전주곡”에서 이미 혁신이 멈춘 광디스크와 그 대체재로서의 네트워크를 다뤘는데 2017년 현재의 풍경이 묘사된 듯하니, 몰락의 전주곡이 참 길고도 길다.

 

최근 방 정리를 하면서 그 시절의 날짜가 찍힌 DVD와 CD 백업 디스크를 발견했다. 생각해 보면 백업을 디스크에 하던 마지막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하드디스크를 수시로 비워줘야 할 정도로 매체 단가가 비싸던 시절, 용량 확보를 위해 철 지난 자료 들을 광디스크로 대피시키곤 했는데 광디스크가 영원할 리 없다는 것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CD나 DVD에 백업하는 순간만큼은 낙천적이었다.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열어보니 세월 앞에 장사 없는지 4분의 1이 판독 불가. 10년도 못 버티는 합성 물질에 무엇을 그리 열심히 기록해 댔던 것일까. 매직으로 또박또박 꼼꼼히 써놓은 레테르만이 볼 낯 없이 그대로였다. 몰락의 전주곡이 들리던 날들, 왜 그 몰락의 미디어에 데이터를 퍼담았던 것일까.

 

2010년의 칼럼 “백업학개론”에서는 백업 매체로서의 하드디스크의 허약함을 다룬 적이 있다. 하드디스크의 용량이 충분히 커지면서 광디스크로 옮기는 수고는 하지 않았지만, 하드디스크 역시 연약한 미디어였다. 그 용량을 생각해 볼 때 까딱하면 궤멸적 파국이 온다.

 

다시 7년이 지난 요즈음, 중요한 것은 데이터를 오래오래 손에 꼭 움켜쥐는 것보다 어떻게 제때 데이터를 놓아주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명도 결국 우리 이전에 있던 정보를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 정보로 바꿔 가는 과정. 인생도 잠시 정보 처리를 하고 스러져 가는 것뿐이다.

 

세월이 흘러 조금은 지혜로워진 탓인지,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 곳에 소중한 정보가 깃들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수도 없이 모으고 백업을 해 보아도, 이 세상을 로그오프하는 날, 아마도 그 정보를 다시 열람하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르고 떠나갈 것이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것은 남아 있는 이들에게 오히려 부담스러운 짐이 될 정보를 무심코 남겨버리는 일일 것이다.

 

남아 있는 이들이 떠난 이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가슴 속에 정리하던 도중 모르는 편이 좋았을 폴더를 열어 본다거나, 판도라의 상자가 될만한 DVD를 발견해서 벌어지는 일. 좋은 영화 소재가 될 법하다.

 

연구가 끝났다던 광디스크는 꿈을 놓지 않은 후학들이 연구를 계속했는지, 작년 울트라HD 4K 블루레이가 등장했고, 1000년을 버틴다는 M-Disc도 양산중이다. 몰락의 전주곡은 여전히 들리지만 은근히 안단테라서 시장 축소율은 10% 내외. 이렇게 신제품이 주기적으로 나와주면, 대개는 하위호환을 지원하므로 그 어떤 CD나 DVD도 현역으로 살아남게 된다. 사랑받는 컨텐츠를 담고 있는 음반(音盤)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 것이었다. LP판이 아직 서바이벌하는 것처럼.

 

음반이든 정보가 담긴 정반(情盤)이든 광디스크는 플로피 디스크처럼 급사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저장 아이콘이라는 상징만 남긴 채 절멸, 서랍 속의 매체를 확인할 길이 플로피 디스크. 내 서랍에 여전히 들어 있는 100MB 집(ZIP)디스크 한 장, 뭐가 들어 있는지 왜 그곳에 그 한 장만 있는지 여전히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광디스크가 읽기 오류가 나버린 세월이 흐른 지금, 더 오래된 자기디스크가 버티고 있을지 별 기대는 되지 않는다.

 

기록도 기억처럼 생각보다 빨리 희미해져 무너져 간다. 그리고 그 속도가 빨라지면 기록도 기억도 그 자체가 추억이 되곤 한다. 

201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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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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