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20주년. 스타의 추억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

[테크]by 김국현
스타크래프트 20주년. 스타의 추억이

#1. PC방


어린 시절 오락실에는 늘 고수가 있었다. 50원 동전 하나로 세상을 주무르는 고수의 무용담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영광을 놓치기 싫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다지 크지도 않던 당시 게임기의 브라운관 주위로 아이들은 병풍을 만들곤 했다. 최종 보스와의 결투가 주던 서스펜스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게이머의 재능은 타고나야 한다.”라는 존경심만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모든 유희가 그렇듯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하나의 도(道)가 되고 예(藝)가 된다.


어느새 세월은 흘러 오락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대신 훌쩍 자라 양복을 입게 된 젊은 아저씨들, 또는 IMF 한파 속에 잠시 쉼터를 찾던 청춘들이 모인 곳이 있었으니 바로 PC방이었다.


그들이 일상은 허드렛일투성이일지라도 팀웍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야근 뒤에 우르르 몰려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세기말의 그들에게 PC방은 80년대의 당구장, 70년대의 기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유흥가 이면도로에서 동네 골목길에서 읍내 꼬마빌딩 반지하까지 PC방 간판은 "IT 강국"을 상징하는 네온사인이 되어 갔다. 자칭 IT 강국이라는 칭호를 외국이 특별한 거부감 없이 불러준 이유 중 상당 부분은 바로 이 PC방 덕분이기도 했다.


전국 방방곡곡 빈틈없이 퍼져나간 초고속인터넷이 이 사이버펑크 문화공간을 만들었는데, 세계의 상식으로 생각하는 인터넷 카페와 달리 이 한국적 ‘방’은 카페가 아니라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 모두가 전투에 몰입하는 벙커와 같은 공간이었다. 당시 PC방의 모니터에는 하나같이 한 가지 게임이 돌고 있었다. 한국 인터넷 문화는 견학 코스가 되기도 했는데, PC방에 놀란 외국인들이 연실 셔터를 눌러댔던 기억이 난다. IMF의 황무지 위에서 PC방 창업은 대유행을 했었고, 스타크래프트가 등장한 1998년 PC방 증가율은 30배에 달하기도 했다. 주위에 PC방 창업한 사람 한 명쯤 있던 시절이었다.


#2. e스포츠


PC방을 석권했던 그 한 가지 게임이란 바로 스타크래프트였다. 스타크래프트는 워크래프트로 이미 명가(名家)의 반열에 오른 당대의 유망주 블리자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너무 집착하다가 완전히 들러 엎고 새로 만드는 장인 정신까지 발휘에서 만든 기대작이었다. 히트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작품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만든이들조차도 한국에서 벌어지게 될 일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PC방에서 벌어지는 본격적인 팀플레이 문화, 그리고 이 플레이를 가지고 대회를 개최하고 심지어 이를 중계방송하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어느 무엇도 블리자드가 기획한 바도 예측한 바도 아니었다. 심지어 한국어로 로컬라이즈도 안되었으니, 한국은 애당초 타겟 마켓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는 그때를 위해 준비된 것만 같았다. RTS(Real Time Strategy), 즉 실시간 전략 게임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자원을 채굴하고 어떤 캐릭터(유닛)를 어떤 순서로 만들어 내 진지와 공격부대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즉 전략적 사고가 승패를 좌우한다. 하지만 APM(Actions Per Minute, 분당행동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략을 순식간에 정확히 수행하는 게이머로서의 전술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 바둑이나 장기처럼 내 차례(턴)에 한 번의 행동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손놀림만 빠르고 키보드의 탄성만 좋다면 얼마든지 많은 액션을 정해진 시간에 해낼 수 있으니, 묘기가 가능하다. 호나우두의 폭발적 드리블을 넋 놓고 보듯이 임요환의 도발적 경기운영에 감탄했다.


게다가 어느 세력·종족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게임의 제약 조건이 전혀 달라졌다. 바둑은 흑과 백의 돌의 역할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장기도 초나라의 졸이나 한나라의 병이나 하는 일은 똑같다. 그러나 스타크래프트는 달랐다. 내가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달라야 하고, 내 장점에만 안도하다가는 상대의 특기에 허를 찔렸다. 모두 다르지만 모두 의미 있는 사회. 이 밸런스의 미학이 이 게임에서 드디어 완성된 것이고, 이는 장수하는 게임, 그리고 스토리가 나오는 스포츠의 비결이 되었다. 


이 스토리가 재미있었다. 하는 재미와 다른 보는 재미가 컸다. 동네 축구의 재미와 프로 축구의 재미가 다른 종류인 것처럼 깊이가 있었다. 그렇게 e스포츠가 태동한 것이었다.


최전성기인 2004년 광안리에는 10만 인파가 몰렸다. 큰 문화의 흐름이 한국에서 시작했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으면 공군은 상무팀처럼 공식 게임팀을 만들어 입대를 받기도 했다. 한편 게임 왕국 일본은 도박과 조직 범죄로부터 시민을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규제를 붙들고 있던 탓에 e스포츠가 태동할 수 없었던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우리는 대범했다. 대단한 일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3. 인공지능


e스포츠가 2022년 중국 아시안게임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고,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거론되는 요즈음. 게임은 확실히 스포츠가 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시안게임이야 e스포츠에 한국 이상으로 과열된 중국에서의 종목채택이고 그 이후는 갈 길이 멀다.


우선 근본적 한계가 있다. 그것은 상업기업이 만든 세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경기라는 한계다. 유희야 그래도 상관없지만, 스포츠의 룰과 문화란 비즈니스에 속박되지 않는 표준과 전통을 기대한다. 어떤 특정 회사가 만든 공으로만, 특정 회사가 만든 운동장에서만, 특정 회사가 만든 말판에서만 벌어지는 운동경기를 사람들은 어디까지 허락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상품이 지닌 한계가 운동 종목의 한계가 되기도 하는데, 종목의 수명이 상품의 수명이 되어 버린다. 영원할 것 같은 스타크래프트도 2016년에 프로 리그는 폐지되고, 각 기업팀도 해체되었다. 생각해 보면 게임의 수명이란 보통 얼마나 짧던가.


어른들은 누군가가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하면, 게임의 수명만큼이나 게이머의 수명도 걱정해주곤 했다. 하지만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하나의 도가 되고 예가 된다.


오리올 비냘스(Oriol Vinyals)의 경우도 그랬다. 소년기에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스페인 챔피언을 지닌 그는 스타크래프트 AI 봇을 직접 만들며 이로 박사학위를 딴다. 알파고 이후 한 창 물이 오른 딥마인드는 블리자드와 함께 공식 AI 연구를 시작하기도 했는데, 그 주역이 바로 그였다. 전지전능해 보이는 알파고도 바둑판을 벗어나면 스타크래프트에서조차 사람을 이기는 것이 힘든 일이다.


바둑과 달리 스타크래프트는 조금 더 현실에 가깝다. 인공지능이 강화학습을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가 비교적 명쾌해야하지만, 스타크래프트 게임 도중 누른 키 하나의 결과란 애매하다. 세상은 바둑처럼 내 차례의 행동이 다음 결과로 바로 나타나는 턴 방식이 아니다. 프로게이머는 분당 수백회의 행동을 하고, 인공지능의 경우 지난 대회에서 19000 APM을 찍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시야가 좁다. 바둑판처럼 세상을 전지적 시점에서 전부 볼 수는 없다. 잠깐 보고 온 적진의 상황을 기억해 내야 한다. 어차피 베일에 가렸기에 어느 정도 블러핑이 필요하기도 하다. 세상만사처럼 감정이 개입한다. 호르몬이 솟구치고 프로게이머의 심박수는 프로농구선수 수준인 160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프로게이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 추억의 게임 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을 적립해왔던가.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이 잔고를 잃어가는 일이다. 어느새 20년이 흘러 버렸다.

201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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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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