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86 40주년. 신화의 시작은 땜빵의 고독 속에서

[테크]by 김국현
x86 40주년. 신화의 시작은 땜빵

올해 여름은 x86의 40주년이 되는 해다. 사실 x86이라는 단어는 기술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컴퓨터를 쓰다 보면 프로그램 설치를 할 때 등등 이래저래 한 두어 번은 접해본 단어일 것이다.


40년 전 8086이라는 CPU가 세상에 나왔는데, 80286, 80386, 80486 등 세월이 흘러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 CPU의 명령어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기에 변치 않는 끝자리 86으로 뭉뚱그려 x86이라 모두들 부르고 있다. 보통 x86이라 하면 8086이라는 CPU의 명령어 집합을 말하는 것인데 요즈음의 최신 CPU도 40년 전과 결국 똑같은 말을 하고 있어, 그 시절 프로그램도 그냥 잘 돈다. 물론 세월과 함께 어휘도 늘어나고 두뇌도 팽창했다. 속도가 워낙 빨라지다 보니 이제 명령어들을 굳이 순차적으로 실행하지 않고 한꺼번에 우르르 실행해 버리고 쓰지 않게 된 걸 버리는 ‘투기적 실행’이라는 것도 기본이 된 지 오래다. 작년부터 한창 시끄러웠던 스펙터 버그 등은 이 투기적 실행의 결과물이 ‘유령’처럼 수습이 안 되거나 폭주하게 하여 벌이는 일이니 수정이 쉽지 않고 CPU 성능에 영향이 갔던 것.


1978년 여름. 어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고독에서 x86의 신화는 시작되었다. 인텔에게는 8080이라는 8비트 CPU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인텔 출신들이 인텔을 뛰쳐나가 만든 8080 호환 8비트 CPU Z80이 오히려 세상을 석권하기 시작했던 것. 우리에게도 후일 MSX 등으로 익숙해진 CPU다.


처음에 인텔은 이 일에 크게 신경을 안 썼다. 구상 중인 차세대 CPU 8800이 등장해서 세상을 점령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4004(사상 최초의 상용 마이크로프로세서, 4비트), 8008(8비트), 8080(알테어 등 일반소비자용 컴퓨터 시대를 개막)에서 다시 8800으로 이어지는 이름만 봐도 적통(嫡統)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차세대 프로젝트는 언제 끝날지 가늠되지 않았다. 인텔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다가는 신제품 출시조차 당분간 없을 듯해 불안해진 인텔은 하드웨어 기술자가 아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한 명에게 8080과 흡사하면서도 16비트인 CPU를 한번 짜보라고 시키게 된다. 이름도 그래서 성의 없게 808“6”이 된다. 어차피 8800이 세상에 등장하면 사라질 제품이었다. 후일 몇 명이 더 붙기는 했지만 적절한 무관심과 고독 속에서 그는 8086을 만들게 된다. 스테판 모스(Stephen Morse), 그가 아직 30대였을 때였다. 그 시절에는 청년들에게도 참 많은 기회가 돌아가곤 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Z80의 후속 16비트 버전은 그 호환성을 잃고 시장에서 좌초된다. 오히려 Z80과 유사성이 있던 8086이 그 후 40년간을 이어가는 전통을 만들어간다. 사실 이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냥 ‘땜빵’일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될 줄이야.


과거를 폐기하는 대신, 과거의 유산을 존중하는 일. 오히려 진보의 지름길이곤 한다. 나름 차세대 32비트 CPU였던 8800은 수년 만에 출시되지만(출시명 iAPX 432), x86과는 전혀 달라 호환성이 없었던 만큼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텔을 살린 것은 8086으로부터 이어진 80286, 80386이었다. 그럼에도 과거의 교훈을 얻지 못한 인텔은 64비트로 넘어갈 때도 아이태니움이라는 극단적인 변화를 추구했다가 좌초되고 만다. 그 자리를 채워준 것은 호환칩 업체에 불과했던 AMD가 만든 x86의 64비트 확장형이었고, 결국 인텔은 x64라는 새로운 전통을 AMD로부터 수혈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컴퓨터의 역사에서조차도 이처럼 과거를 존중하는 일은 중요하다. 오늘날 다양한 차세대 프로젝트가 하나같이 곤경에 빠지는 이유는 과거로부터의 저주와도 같은 일이다. 오히려 과거를 유지보수하는 땜질에서 새로운 신천지를 향한 신화가 펼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저 우연의 결과로 보일 뿐이다. IBM PC가 x86을 낙점한 것도, 빌게이츠가 그 시절 인텔 칩용 베이직을 만든 것도 우연으로 보이듯이.


올여름은 8086의 40주년. 지난주 인텔은 40주년을 맞이하여 출시한 속도 5GHz의 i7-8086K 리미티드 에디션을 8086 개를 경품추첨으로 호기롭게 뿌리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한국에 배당된 물량은 500여 개, 당첨된 분들 모두 8086 신화를 만든 우연과 행운이 함께 하기를.

20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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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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