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립PC의 낭만이여, 다시 한 번만.

[테크]by 김국현
PC를 조립하는 일은 추억이 되어 가고 있다.


PC를 사는 일이란 당연히 조립하는 일이었던 시절은 세운상가와 용산전자상가의 쇠락과 함께 스러져만 간다. 요즈음에는 PC를 조립한다는 것이 인건비도 빠지지 않는 불합리한 선택인 경우가 많다. 잘 모르면서 부품을 하나하나 끼워 맞추느니, 대기업 제품을 완제품으로 주문 제작하는 편이 싸게 먹히는 경우도 있다.


경제적 이유보다도 소비자의 관심이 PC에서 스마트 단말로 완전히 이행해 버려서일 수도 있다. 스마트폰 덕에 컴퓨터가 점점 필요 없어지고, 산다고 해도 노트북을 사버린다. 애플의 맥에서처럼 PC란 이제 폰처럼 빈틈없이 만들어져서 절대 스스로는 뜯어보려는 생각도 해서는 안되는 제품이 되어버렸다.


PC는 물론 노트북도 메모리나 하드디스크쯤은 스스로 업그레이드하던 시절은 가버렸다. 이제 폰을 기변하듯이 PC도 그냥 통째로 버리고 새로 사라는 것 같다. 아니 이제 웬만하면 망가지지 않는 한 버릴 일도 없다. 2010년 이후에 등장한 CPU라면 아직도 건재해서다. 예를 들어 세대가 어찌 되었든 i3, i5나 i7라고 불리는 CPU 정도가 꽂혀 있다면 지금도 일상 업무는 무난히 처리한다. 과거에는 3년만 지나도 쓰기가 힘들어지는 것이 PC의 발전 속도였는데, 이제는 내용연수 6~7년이 지나도 관리만 잘하면 아직도 현역이다. 어느새 PC는 10년은 무난히 버티는 자동차 같은 내구성소비재가 되어주었다.


성숙시장에 접어들고 있는 것은 PC뿐만이 아니어서 스마트폰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능이 지난 3년간 일정 수준을 상회해 버렸다. 이제 업그레이드는 종래와 같은 드라마틱한 기변 체감 현상을 주기 힘들다.


하지만 자동차 애호가가 폐차가 멀었어도 차를 바꾸듯 컴퓨터 애호가들도 몸이 근지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PC 조립 시뮬레이터’라는 게임이 작년에 등장해 화제가 되었다. 비행기를 모는 일이 일상에서의 환타지였기에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를 즐겼듯이, 컴퓨터를 조립하는 일도 이제 일상에서 멀어진 환타지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만들고 싶어한다. 이는 우리의 본성이다. 인류가 농사보다 먼저 시작한 것이 만드는 일이었으니까.


필요가 아니라 만들고 싶기에 만드는, 만드는 일에 경제적 합리성이 없더라도 굳이 그렇게 하고 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기에, 조립PC 또한 훌륭한 취미가 될 수 있다.


‘드레스업’이라는 말은 차를 번쩍이게 하는 것 정도를 뜻했으나, 이제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PC를 번쩍이게 하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 각 부품에 LED가 곁들여져 정말 말 그대로 투명 케이스 너머로 번쩍번쩍하며 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하드코어한 취미까지는 아니더라도, PC 조립은 나만의 ‘개러지'를 꾸미는 일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창고에서 혁신이 피어나듯, 든든한 PC를 갖는 일은 훌륭한 생산 공간을 확보하는 일과 같다. 특히 요즈음처럼 8코어 16스레드의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고성능 두뇌와 함께라면 PC 한 대 안에서 여러 기계를 가상으로 돌릴 수도 있으니, 댁내 전산 센터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컴퓨팅이 점점 클라우드로, 심지어 스타디아(Stadia) 등처럼 게임마저 클라우드로 훌쩍 넘어가려 하고 있는 시대다. PC는 성능 따위 떨어져도 화면만 크고 네트워크만 좋으면 되는 시대가 곧 올 것만도 같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컴퓨팅이란 있을 수 있다. 내 생활과 역사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는 보고(寶庫) 같은 상자 하나쯤은.


살다 보면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저 뭔가 해보고 싶은 때가 있다. 생활의 발견은, 업무의 혁신은 그렇게 손을 꼼지락거린 다음에 찾아오곤 한다. 예를 들면 이럴 때다.

 

1. 초고성능 하드웨어에서만 가능한 초고성능 게임을 목격하고 싶을 때 (예: 레이 트레이싱)


2. 5GHz 속도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괜히 보고 싶을 때. 


3. 딥러닝 인공지능 등 묵직한 두뇌 활동을 의뢰하고 싶을 때.


4. 4~8TB 하드디스크 여러 개를 핫스왑하는 NAS를 구성하여 중요한 데이터가 있는 듯 느끼고 싶을 때.


5. 한 대의 PC 안에 구형 윈도우에서 리눅스까지 여러 운영체제를 동시에 써보고 싶을 때.


6. 아니 그냥 뭔가 만들어 보고 싶어 레고나 프라모델에 눈이 가지만 그보다는 다소 생산적이고 싶을 때. 

사실 요즈음은 조립하기 좋은 날들이다. 전 세계적 스마트폰의 수요 감소로 메모리 반도체의 단가 하락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꽤 저렴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암호 화폐 유행의 퇴조로 그래픽 카드 등의 부품가도 안정화되었다. 또 AMD 라이젠, 9세대 인텔 등 경쟁으로 인해 CPU 시장도 풍성해졌고, PCIe화가 일어난 M.2 SSD, USB 3.1 Gen2의 대중화, DDR4의 정착 등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구조적 변화 들이 마무리되기도 해서 새로운 기술을 들이는 보람도 있다.


그리고 근래의 가정용 초고속 인터넷은 80 포트를 대개 열어주고 있으므로(만약 열려 있지 않다면 전화를 걸어 항의하자), 집에서 웹서버를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성은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 하다못해 PC라도 만들고 나면 시간도 잘 가고 무엇보다 보람차고 개운하다.


그리고 PC가 남는다. 남다른 애착은 덤으로.


201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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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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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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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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