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 고갈 소동 20년, IPv6 20년. 자원 고갈에 대한 우리의 자세.

[테크]by 김국현

지난달 말, 유럽의 IP 주소 할당 재고가 전부 소진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잊을만하면 몇 년에 한 번꼴로 들려오는 이 IP 주소 고갈 뉴스는 너무나도 오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뉴스라 마치 양치기 소년의 외침처럼 들릴 때도 있다.


전 세계의 인터넷 주소 할당을 맡은 기구인 IANA(Internet Assigned Numbers Authority)는 이미 2011년에 가지고 있는 IPv4 신품 물량은 전부 뿌려버려 남은 것이 없는 상태. 이를 받아서 재할당을 해주는 곳이 세계 곳곳의 RIR(Regional Internet Registry)인데, 이제 이곳들에서 또한 하나둘씩 고갈이 진행되고 있다. 올 11월에는 유럽이 탕진 상태가 되었다.


마치 지구 온난화 뉴스처럼 위기가 천천히 진행되면 긴장감을 잃어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연 자원과 달리 이 주소 자원이란 그저 숫자다. IP 어드레스란 소모품이 아니기에 회수만 가능하다면 전화번호처럼 재활용이 가능하니 다행인 일이다. 지금의 고갈 문제란 그저 편히 할당해 온 신규 자원이 없어졌다는 뜻이고, 재활용이든 뭐든 어떻게든 사람들은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대표적인 재활용 방법은 바로 NAT(Network Address Translation)였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공유기’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다. 공인 IP 하나를 얻은 후, 이를 가지 치듯 192.168.*.*와 같은 사설 주소로 나눠서 수십, 수백 대가 함께 쓴다. 영리한 일이다. 지난 10년간 IP 주소 고갈 문제라는 오랜 뉴스가 아예 식어 버린 뉴스가 된 이유는 바로 이 주소의 공유경제 덕분이었다. 일상적 사용자로서의 인터넷을 소비하는 사용 패턴이라면 NAT 만으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웹서버라도 돌리려면, 그러니까 여하 간의 가치를 생산하여 세계에 공표하자는 인터넷 사상에 걸맞은 인터넷 사용을 위해서는 세계에 공인된 내 번호가 있어야 세계인이 내게 찾아올 수 있다. 하다못해 P2P도 그렇다. 자기 존재를 내건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공인 IP가 필요하다. 


인터넷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즉 클라우드에 가상 머신이라도 하나 만들려면 IP를 하나씩 쥐여줘야 한다. 그런데 가상이든 실상이든 머신 개수는 점점 늘고 있다. 사람들의 머릿수보다 기계의 쪽수가 증가하는 속도가 걱정되는 일이다.


지금이야 가정집마다 공인 IP를 하나씩 나눠주지만 (심지어 브릿지 모드로 설정하면 모든 단말마다 나눠주는 호기로운 업자도 있지만), 앞으로는 알 수 없다. 희소성은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든다. 이미 주소 재활용 및 경매 시장도 형성되어 있는 마당, 통신사가 옛 전화국 건물로 짭짤한 비즈니스를 하려 하듯 일단 확보한 자원을 그냥 놔주지는 않을 터다.


클라우드 업자 중에는 구글처럼 명시적으로 IP 비용을 책정하기 시작한 곳도 등장했다. 다른 곳도 가격표에 적지는 않더라도 다 원가에 녹여놓았을 것이다. 발행량이 고정되었으나 수요는 증가하는 시장이라니, 이런 시장을 기다리는 것은 쟁탈전뿐이다.

IPv6라는 대안을 찾아 헤맨 지 어언….

다른 자원도 아니라 겨우 숫자에 불과한 주소가 모자라 인터넷이 성장할 수 없다면 이처럼 허무한 일도 없다. 인류는 이런 생각을 실은 수십 년째 해오고 있다.


이 고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차세대 인터넷 주소 IPv6 초안이 작성된 지도 벌써 20주년이 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존 IP주소 IPv4는 32 비트로, 약 43억 개의 주소를 표현할 수 있다. 6, 70년대 처음 인터넷을 만들 때만 해도 32비트 주소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2비트는 여러모로 참 애물이다. (여담이지만 IPv5도 있었다. 실시간 스트리밍 통신용 IP를 고안한 것이었는데 그냥 v4로 하면 되었기에 실용화는 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v7~9도 이미 등록되어 결번 상태.)


이제 v6에서 128비트가 되므로 사실상 무진장 무제한의 주소를 아무리 하찮은 미물에게도 아낌없이 할당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 방대하냐면 지구를 1cm 단위로 쪼갠 다음에 그 1cm 평방의 구역마다 6.67 곱하기 10의 19승 개의 주소를 할당할 수 있을 정도니, 미생물의 인터넷 시대가 도래해도 당분간은 무탈할 정도다. 그 규모와 확장성으로만 보자면 세상 삼라만상 모든 사물이 인터넷에 연결될지도 모르는 그 미래를 위해서라면 확실히 가야 할 길인 것 같다.


하지만 32비트의 v4와 128비트의 v6는 사실상 호환성이 없는 별개의 존재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나 혼자 열심히 저쪽으로 넘어간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단적인 예로 홈서버를 선진적 기분으로 IPv6로 구현해 놓더라도 동네 카페에 들어가 IPv4 와이파이로 접속했다면 집으로 연결할 수조차 없는 일이 발생한다.


물론 터널링이니 듀얼 스택이니 어떻게든 호환과 공존을 위한 방편은 마련되고 있지만, 문제는 결국 IPv4가 주류이고 IPv6가 비주류임을 강조하게 되고 만다는 점이다.


IPv4를 지금 잘 쓰고 있다면 특별히 불편한 점이 없기에 미래를 향해 내가 구태여 나서서 나아가야 할 필연성도 메리트도 찾기 힘들다. 잘 돌고 있는 네트워크를 건드리는 리스크에 합당한 동기조차 없다.


물론 차세대 주소 체계에 여러 기술적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또 뭐 그렇게 결정적이지도 않다. 네 개의 십진수로 암기할 수 있기에 인지적으로 직관적인 현재의 IPv4에 비해, IPv6는 어딘가 사람이 다뤄서는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주소의 느낌마저 든다.


모든 이행이 그렇듯이 새로운 인터넷 주소로의 이행이라니 처절하고 힘든 일이다. 피하고 싶다면 피하는 편이 좋다고 느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게다가 지금의 주류는 여전히 v4, 내가 아직 v4의 세상에 있다면 버티고 싶다.


구글 사용자의 IPv6 통계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도 아직 IPv6는 30%에도 채 못 미친다. 10여 년 전 0%에서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참 많이도 올라왔다고 볼 수 있지만, 지수함수를 그리곤 하는 다른 신기술 채택 곡선하고는 또 다른 양상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은 현재 10%도 미치지 못해, 30%를 넘긴 일본이나 미국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에는 시사점이 있다. 바로 IT(중에서 통신망) 강국이면서도 저성장 시장이라는 특수성이 주는 여유다. 한국의 대중 인터넷은 여느 나라보다도 이른 시기에 집중적으로 성장했다. 후행적 IP 수요가 확보해 둔 공급량을 크게 웃도는 일도 없었다. 또 소비성 사용자가 대다수이기에 공인 IP를 더 달라는 압박도 크지 않았다. 또 고인물 국내 통신 3사가 IP 자원의 65% 이상을 확보하고 있고, 신규 사업자에 의한 지각 변동도 그다지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인구가 늘어날 리도 없기에 가입자 수도 심하게 증가하지도 않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애써서 IPv4를 탈피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반면 인도나 중국처럼 후발로 성장해야 하는 곳에서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인도가 IPv6의 선두주자로 앞서나가고 있는 이유는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그 절실함 때문이다. 반면 중국은 1%대로 나오는데, 중국에서 차단된 구글의 통계임을 참작해도 매우 낮은 수치다.


중국으로서는 인터넷의 모든 인민에게 IP를 하나씩 부여하여 세계와의 통로를 만들어줄 필요를 못 느꼈을 수도 있다. 대신 대규모로 사설 IP를 할당하는 Large Scale(Carrier Grade) NAT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아니 IPv6의 성숙 이전에 급증하는 인터넷 사용자를 확보된 IPv4 주소만으로는 애초에 도저히 커버할 수 없는 인구 대국이다 보니 그 방법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하면 통신사가 마치 거대한 공유기처럼 작용하며 효과적으로 사용자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죽(竹)의 장막 중국에서도 최근 2020년 말까지 IPv6를 인터넷 사용자의 50%에 도달하게 하겠다는 공산당의 계획이 발표되었다. 어차피 IPv6 역시 IPv4와의 호환성을 위해 통신사들은 거대 NAT 내부에 넣어두곤 하니 크게 달라질 일도 없다.)


한국도 지금은 여유롭지만, 앞으로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통신사들은 친분 있는 일부 제조사 신제품 기종부터 IPv6를 적용해 보고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앱에서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인터넷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IPv6로 함께 달려줄지다. 운영체제는 이미 XP 시절부터(제대로는 비스타 이후) IPv6를 지원하고 현재 가동 중인 디바이스들 대다수도 이미 지원 중이지만 여전히 앱과 각종 소프트웨어들은, 특히 서버의 세계는 IPv4 인터넷이 기준이다.


iOS 9부터는 새롭게 검수를 신청하는 앱들도 IPv6 망 대응을 의무화하는 등 여기저기서 나름의 혼돈과 난리는 있었지만, 아직 클라우드 사업자들조차 IPv6 대응을 끝마치지 않은 상황이니 갈 길이 멀다. 여기에 당장 스위치 켜듯 넘어갈 수도 없기에 IPv4와 위화감 없이 공존 가능한 IPv6를 만들어 내야 하니 더 힘들다.


어쨌거나 저곳이 미래라며 다 함께 가자고 그래서 가기는 가고 있지만 다들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저 너머에서 어떤 예기치 못한 복병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확실히 발등에 불 떨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다. 모든 변화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20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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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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