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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원조 ‘스파이 영화’의
서글픈 쇠락

by한겨레

원조 ‘스파이 영화’의 서글픈 쇠락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위대한 왕국이 쇠락하는 건, 삼류 공화국이 붕괴하는 것보다 훨씬 서글프다’. <007 스펙터>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겉 먹자는 송편, 속 먹자는 만두’라는 고래의 경구로 비추어보아 007 시리즈는 단연 전자에 속하는 영화다. 다시 말해, 007 시리즈는 치밀한 이야기나 묵직한 주제의식 등이 아닌, 느끼미 및 섹시미로 무장한 남녀배우들과 그들의 딱 떨어지고도 화려한 의상과 그 조합에 걸맞은 슈퍼카들과 헬기와 경비행기와 모터보트와 각종 기발한 첨단 비밀무기, 그리고 그것들을 한방에 손괴 및 폭파시켜버린 뒤 ‘뭘 보나’란 듯 가볍게 털고 일어서는 유들유들 물자낭비형 액션 등등을 보자는 영화였고, 이런 송편 정책은 오랜 시간 동안 스파이 영화의 산업 표준으로 군림해왔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티머시 돌턴과 피어스 브로스넌으로 이어지는 007의 저조기를 틈타 영국산 스파이라는 제임스 본드의 태생적 약점을 파고든 미국산 스파이물 <미션 임파서블>시리즈와, 아예 기존 스파이 영화판 자체를 갈아엎어버린 제이슨 본 시리즈 사이의 좁은 틈새에 끼어버린 채 진퇴양난의 일대 도탄에 빠진 007은 결국 퇴출 위기에 몰린 채 어둡고도 진지한 세계를 홀로 방황하는 고독한 승냥형 스파이로 변모한다.


이에 전작인 <007 스카이폴>은 ‘M’으로서 확고한 카리스마를 구축해 온 핵심배우 주디 덴치 카드를 버리는 초강수까지 감행하고,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하여 더욱 밀도 있어진 ‘실바’라는 나쁜 놈을 가세시키며 다시금 위기 돌파에 성공한다. 즉 <스카이폴>이 찾아낸 것은 만두와 송편 사이의 미묘한 무게중심이었던바, 그것은 포클레인으로 기차 지붕을 꽁치깡통 따듯 뜯어내며 기차를 갈아타는 기상천외한 액션을 감행한 직후 셔츠 커프스를 매만져 의관을 정제하는 007의 순간동작을 통해 함축적으로 천명되었다. 그리고 그 성공은 <스카이폴>의 핵심 주최 측(특히 감독 샘 멘디스와 작가 존 로건)을 또 한번의 007 영화로 연결시켜 준다.


그런데 그사이, 제이슨 본 시리즈의 아류(심지어 그중엔 왕년 007 피어스 브로스넌을 기용한 영화까지 있었다)의 대거 출시로 인해 ‘진지하고 심각한 스파이 액션’의 단물이 마지막 한방울까지 적출되면서, 관객들 사이에서는 다시금 옛 007에 대한 그리움이 모락모락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런 정서는 “요즘 스파이 영화들은 너무 심각해요”라는 대사를 대놓고 앞세우며 옛 ‘젠틀맨’ 시대의 007로의 복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종의 007 팬 무비 <킹스맨>이나 영국 정보부의 우아하고도 액션력 드높은 여성 스파이를 앞세움으로써 007 시리즈보다도 더 007 시리즈스러워 보였던 <미션 임파서블 5>같은 영화들의 등장으로 가시화된다.


그리고 <스펙터>는, 왜 아니겠냐마는, 기다렸다는 듯 그러한 시장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이다만, 사실 이것이 스포일러라면 007 시리즈 전체가 스포일러)


하여 <스펙터>는 ① 애스턴 마틴에 지극히 아날로그스러운 복고풍 ‘비밀무기 스위치’를 장착시켜놓은 채, 이 시대에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무기인 불을 통해 상대의 람보르기니를 공격하고 있고, 제임스 본드는 하필이면 설산 꼭대기에 설립된 병원에서 근무하는 ② 본드걸을 만나, 난데없이 납치된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프로펠러 경비행기까지 대동한 ③ 알파인스키 경기 풍의 설원 활강 액션을 선보이고, 그렇게 구조해낸 본드걸과 함께 지극히 고풍스런 ④ 사막횡단 열차에 몸을 실은 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준비해뒀는지 알 수 없는 구김 한 줄 없는 드레스와 턱시도를 꺼내 입은 채 사랑과 낭만의 만찬을 벌이던 중, ‘죠스’(<나를 사랑한 스파이>)를 연상시키는 ⑤ 무식하게 힘만 센 나쁜 놈 측 행동대원과 육탄전을 벌이고, 그러다 결국 ⑥ “황당한 계획을 털어놓은 뒤 007을 죽이려는 나쁜 놈으로부터, 똑같이 황당한 방법으로 007은 탈출(따옴표 부분은 <킹스맨>의 대사)”하고 ⑦ 본드걸을 한번 더 구출하고 ⑧ 모터보트 추격전도 한판 벌여주는 등등등 옛 007 시리즈에 등장했던 각종 간판급 설정들을 부활시켜 옛 007의 정취를 오늘에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옛날 007 영화는 악당들이 먹여 살렸죠”라는 지극히 타당한 <킹스맨>의 지적을.


<스펙터>는 의자에 결박까지 해 놓은 제임스 본드를 갖고 무의미한 치과의사적 장난을 치며 깨작거리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자초하는 등등 머리도 좋지 않아 보이고 카리스마도 전혀 함유치 못한 함량 미달의 나쁜 놈 ‘오버하우저’를 크리스토프 발츠씩이나 되는 배우를 기용하여 등장시킴으로써, 결국 옛날의 광영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한 위의 모든 노력들을 한갓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대개의 위기상황을 차력 내지 염력에 준하는 람보력으로 해결해버리는 007 또한 만만찮고. 극도로 식상하고도 따분한 전체 줄거리까지 갈 것도 없이.

 

하긴, 무려 53년 동안 24편이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원조의 권위를 수호하기란 여왕폐하, 대영제국, 전 인류, 전 지구를 수호하는 것보다도 어려울지도 모른다. 알지만, 그래도 <스펙터>는 서글프다.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의 문구인 ‘위대한 왕국이 쇠락하는 건, 삼류 공화국이 붕괴하는 것보다 훨씬 서글프다’의 그 ‘서글프다’로.


한동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