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녀도 아닌 ‘그대’… 배역의 ‘성벽’을 허물어라

[컬처]by 한겨레

공연계 ‘성 중립 캐스팅’ 바람


패션에서 시작…세계적 흐름으로

남녀옷 구분 없애며 성 경계 탈피

MTV어워즈, 남-여우주연상 통합

국내선 2012년 여성 헤롯왕 등장


공연계 변화 불지핀 미투운동

남성중심 사고 퇴색 고정관념 탈피

‘창문 넘어 도망친…’ ‘록키호러쇼’ 등

남녀 배역 ‘기울어진 운동장’ 해소


한국 젠더프리캐스팅, 갈길 멀다

스토리상 캐릭터 이미지 표현 한계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각본수정으로

조연 넘어 주연 바꾸는 인식변화 필요

그도 그녀도 아닌 ‘그대’… 배역의

현재 대학로에서 상연중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선 주인공의 젊은 시절인 ‘알란3’, ‘알란4’ 역할을 남녀 배우가 번갈아 맡는다. ‘알란4’를 연기하고 있는 권동호(왼쪽 사진 가운데)와 장이주. 연극열전 제공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시도를 하지 않을까?” 2015년 국립극장에서 영상으로 보여준 영국 연극 <프랑켄슈타인>을 보던 김태형 연출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흑백 인종구분 없이 배우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할을 백인이 했는데, 아버지는 흑인이더라고요. 당연히 가족사가 있겠거니 했는데, 그런 것 자체를 구분짓지 않은 시도였어요. 뭔가 한방 맞은 느낌이었죠.” 배역의 성별에 따라 남녀 배우를 나누는 것을 당연시하는 한국의 무대 관행을 바꾸고 싶다는 고민을 하던 그는 이 공연을 본 뒤 용기를 내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한국 공연계를 발전시키려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남녀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9월2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선보이고 있는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젠더 프리 캐스팅’(성 중립 캐스팅)은 바로 이런 고민으로부터 비롯됐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100살 노인 알란의 젊은 시절인 ‘알란3’, ‘알란4’ 역을 남녀 배우가 더블 캐스팅되어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알란3은 이형훈-손지윤, 알란4는 권동호-장이주. 캐릭터에 성별을 없앤 것이다. 김태형 연출은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남녀를 떠나 이 상황에 놓여있는 이 캐릭터가 무슨 이야기를,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공연에서는 100살 알란도 남녀를 번갈아 캐스팅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근 젠더 프리 캐스팅이 한국 공연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외에도, 8월3일 개막하는 뮤지컬 <록키 호러 쇼>(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도 지난해까지 여성 배우가 전담했던 ‘콜롬비아’ 역을 이번엔 남녀가 번갈아 맡았다. 지난 1월 끝난 뮤지컬 <광화문 연가>도 3500년 살아온 연애의 신 ‘월하노인’ 역을 차지연과 정성화 두 남녀 배우가 번갈아 맡아 화제를 모았다. 지난 1월 끝난 뮤지컬 <에어포트 베이비>는 이태원에서 바를 운영하는 ‘딜리아’ 역을 강윤석과 박칼린이 연기했고, 2017년 연극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선 주인공 ‘조제’의 동생 ‘다나카’ 역에 류경환과 김아영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창극 <적벽>은 2017년 공연에서는 책사 주유 역을 남녀 배우가 번갈아 연기했는데, 2018년에는 주유, 제갈량, 정욱까지 모든 책사를 여성 배우가 연기했다. 캐릭터를 무성의 존재로 바라보고 남녀 누가 해도 상관없다는 젠더 프리와 함께, 캐릭터 성별을 바꾸는 ‘젠더 벤딩 캐스팅’도 최근 공연계에서 활발해지는 시도다.


2016년 패션업계에서 남녀 옷 구분을 없애는 젠더 프리가 화두에 오른 이후, 성 경계를 허무는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엠티브이(MTV) 무비 앤 티브이(TV) 어워즈>에서는 ‘젠더 뉴트럴(성 중립적)’ 부문을 마련해, 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을 성별 구분 없는 최우수 연기상으로 통합했다. 지난해 일본 장난감 업계에선 사내아이용, 여자아이용이라는 구분 자체를 없애 주목받기도 했다. 최근 한국 공연계가 시도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은 이런 세계적 흐름과 맥이 닿아 있다.


공연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우리나라 공연계에서 젠더 프리 캐스팅이 첫 조명을 받은 것은 2015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헤롯왕 역할을 여성 배우 김영주와 남성 배우가 동시에 맡았을 때다. <록키 호러 쇼>를 만드는 오루피나 연출은 “당시만 해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클래식한 작품이어서 줄곧 헤롯왕을 남성 배우가 맡아왔기 때문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놀라운 시도였다”며 “한 역할을 저렇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구나 싶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연계가 워낙 ‘정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어서 배역의 성별을 허무는 것에 불편해하는 시선도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연출은 “당시에 어떤 배역이 특정 성에 고정된 것이 문제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성별 구분에 철옹성 같았던 공연계가 최근 1~2년 사이 젠더 프리 캐스팅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달라진 사회 분위기와 공연계 위기의식이 맞물렸다. <적벽>을 만든 정호붕 연출은 “성평등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등 달라진 분위기가 영향을 끼쳤다”며 “굳이 남녀로 구분 지을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의식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김태형 연출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 혐오에 관련한 문제들이 끝없이 이야기되며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 등으로 이어져왔다. ‘여자이기 때문에 이렇다’, ‘남자이기 때문에 이렇다’ 같은 말들을 들으면서 공연에서라도 성별에 따른 말과 행동을 구분하지 않고 보여준다면, 남녀를 떠나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로써 이야기한다는 느낌이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지난 1년 전 공연계에 미투운동이 휘몰아치면서 공연계에 남아 있던 남성중심적 사고가 옅어지고 남녀를 구분짓지 말자는 움직임이 조심스럽지만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도 그녀도 아닌 ‘그대’… 배역의

뮤지컬 '광화문연가'에서 월하노인 역을 맡은 차지연(왼쪽), 정성화.

젠더 프리 캐스팅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도 있다. 한국 공연계는 주요 관객인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남성 배우들에 치우진 캐스팅을 해왔다. 업계에서는 남녀 배역 비율을 7대 3 정도로 잡는다. 2인극의 경우엔 아예 대부분 남성들로만 채운다. 김태형 연출은 “여성 배우들이 남성 배우들보다 설 자리가 부족하고, 역할 자체도 적어졌다. 숫자로든 분량이로든 넓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여성 배우를 한명이라도 더 캐스팅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시도는 결과적으로 작품의 다양성에 기여한다. 정호붕 연출은 “한 인물의 캐릭터를 만들 때 여러 인물들의 세계관이 반영되면 캐릭터가 더 풍부해진다. 관객 입장에선 같은 역할이지만 성별이 다른 배우들을 비교하며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외국에서도 이미 5~6년 전부터 이런 시도가 싹을 틔워 최근엔 본격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영국에선 2012년 <줄리어스 시저>가 젠더 벤딩 캐스팅으로 눈길을 끌었고, 2016년 <헨리 4세>에선 여배우 미셸 테리가 남성 배우가 하던 주인공 ‘헨리 4세’ 역을 맡았다. 2017년 11월 미셸 테리는 영국 런던 셰익스피어스 글로브 극장 새 예술감독으로 지명된 이후 글로브 극장에서 올리는 공연은 성별, 인종, 출신지, 장애 유무의 차별을 없애고 남성과 여성의 캐스팅 비율을 반반으로 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수진 공연칼럼니스트는 “독일 등에서는 성중립성이 국가 과제로 떠오르면서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모범적인 캐스팅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도 그녀도 아닌 ‘그대’… 배역의

8월3일 개작하는 '록키 호러 쇼'에서 콜롬비아역을 맡은 전예지.

그도 그녀도 아닌 ‘그대’… 배역의

8월3일 개막하는 '록키 호러 쇼'에서 콜롬비아 역을 맡은 송유택.

젠더 프리 캐스팅은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도 일조한다. 남녀가 같은 역을 동시에 맡을 때도 캐릭터를 특정 성에 따라 변화시키지 않는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알란도 남성 배우가 엄마 역을 하고, 여성 배우가 아빠가 되기도 하지만 굳이 엄마처럼 목소리를 가늘게 바꾸지 않는다. <록키 호러 쇼>에서도 통통 튀는 성격의 콜럼비아 캐릭터 자체를 살렸을 뿐이지 남성 배우한테 여성처럼 행동하라는 주문 등은 하지 않았다. 오루피나 연출은 “남녀가 번갈아 해도 대본은 똑같다. 단지 지난해에 썼던 대사 ‘그녀’를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대’라고만 바꿨을 뿐이다”고 말했다. 김태형 연출은 “경찰은 남자, 간호사는 여자라고 나누거나,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캐릭터의 고정 관념을 깨는 것도 젠더 프리 캐스팅에서 의미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젠더 프리 캐스팅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광화문 연가>는 헬레나를 남성과 여성의 인연을 이어주는 연애의 신, 무성으로 봤지만, 헬레나가 여성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고통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사라졌다는 관객들의 비판도 나왔다. 젠더 프리 캐스팅이 여성 배우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려는 뜻도 담겨 있는 만큼, <록키 호러 쇼>에서 여성 배우가 맡아오던 역할을 굳이 남성 배우에게 나눠준 것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록키 호러 쇼> 오루피나 연출은 “캐릭터를 분석하는 다양한 방법의 확장으로 봐달라”고 말했다. 이수진 공연칼럼니스트는 “아직 한국에서는 진정한 젠더 프리 캐스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젠더 프리는 작은 역할이 아닌 주인공을 바꾸는 식의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다. 젠더 프리 캐스팅이 제대로 정착되려면 ‘왜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우선시 돼야 하며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2018.08.0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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