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피해자들 “판사님이랑 대통령님이랑 이렇게 한 게 참말이오?”

[이슈]by 한겨레

징용소송 지연 피해자들의 울분

‘다 이긴 싸움’이라 믿었건만

‘일제 강제징용 재판 거래’로

70여년 기다림 배신한 법원에

“소원은 죽기 전 사과받는 것

나라서 우리를 못 도와주면

누가 우리를 도와줍니까?”


광복 73주년을 하루 앞둔 14일, 검찰은 2013년 12월 ‘박근혜 청와대-대법원-외교부’가 한자리에 모여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을 지연시키기로 ‘합의’한 정황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실제 소송은 5년째 대법원에 묶여 있다. 하급심 재판도 멈춰섰다. 그 사이 피해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한 맺힌 징용 피해자와 유족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징용 피해자들 “판사님이랑 대통령님이

■ 수난의 두 자매


“이번에도 속을 것이다.” 2013년 2월, 한국 법원에서 전범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내자는 변호사들의 말에 김정주(87)씨는 손을 내저었다. 지난 10년간 일본 법원에서 후지코시와 싸우고도 끝내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한 김씨는 지쳐 있었다. “다른 어르신들도 이겼어요. 절대 그렇게 안될 겁니다. 저희가 도울게요.” 변호사들의 설득에 김씨는 법원을 찾았다. 그의 생애 마지막 싸움을 결심한 참이었다.


김씨에게 13살 이후 평생이 전시상황이었다. 1944년 5월, 언니 김성주(90)씨가 미쓰비시로 끌려갔다. 이듬해 2월, “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일본인 교사의 말에 집을 나섰다가 도착한 곳이 선반을 만드는 후지코시 공장이었다. 키가 140㎝밖에 안되는 김씨는 사과상자 위에 선 채 종일 일했다.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처럼, 해방 전 마지막 겨울은 유독 추웠다. 시린 발을 감싸 쥐다 끝내 신발을 신고 잠들었는데, ‘덕분에’ 간밤에 공습 소리가 나면 더 빨리 숨을 수 있었다. 같은 시기 언니는 미쓰비시 공장에서 청춘을 보냈다. 수난의 두 자매였다.


일본군 ‘위안부’나 근로정신대가 구분되지 않던 시절, 김씨는 ‘더럽다’는 말을 이름 석 자보다 더 자주 들었다고 했다. 결혼 생활은 6년도 못가 깨졌다. 남편에게 뺏긴 큰아들은 가슴 속에 멍에로 남았다.


애초 한국 법원은 그를 “속이지” 않았다. 2014년 10월 서울중앙지법은 후지코시가 김씨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약 70년만의 승리였다. 민사소송 재판은 매번 몇십분도 안돼 끝났지만, 김씨는 법원에 가는 날이 기다려졌다.


하지만 이후 재판은 4년째 답이 없었다. 2016년 5월 예정됐던 항소심 선고기일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어째서 재판이 안 되는 거요.” 처음에는 “조금만 기다리시면 된다”고 답하던 변호사들은 “법원에서 소식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그를 법원으로 이끈 변호사들이, ‘죄인’이 됐다.


“우리나라 판사님이랑 대통령님이랑 이렇게 한 게 참말이요?” 텔레비전 뉴스는 ‘법원이 재판을 일부러 미뤘다’고 했다. 그 사이 판사들은 해외로 나갔다고 했다. 김씨는 믿을 수 없어 뉴스를 보고 또 봤다. “재판이 ‘고작 4년’ 미뤄졌다고 합니까? 나는 70년을 기다렸어요. 또 속은 기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를 못 도와주면 어느 나라에서 도와줍니까?”

징용 피해자들 “판사님이랑 대통령님이

■ 지켜지지 못한 약속


요사이 양금덕(87)씨 전화벨은 도통 울리지 않는다. 063(전북), 062(광주), 061(전남). 곳곳의 지역번호가 찍히던 휴대폰은 양씨 만큼이나 ‘노쇠’해졌다. “생전에 미쓰비시한테 사과 한마디 꼭 들읍시다.” 2012년 말, 주름진 손을 다잡고 소장에 함께 이름을 올렸던 할머니들의 건강이 하나둘씩 나빠졌고, 서로 주고받던 전화 통화도 어렵게 된 것이다. 뜸한 연락 탓에 양씨의 하루는 길어졌지만, 여생은 속절없이 짧아졌다.


1944년 5월, 초등학교 6학년 양씨는 미쓰비시 공장에 동원됐다. “중학교 가게 해준다는” 일본인 담임교사의 약속은 거짓말이었다. 1년 5개월을 컴컴한 비행기 공장에서 보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본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물을 뒤지는 게 일상이었다.


“그동안 쏟은 눈물만 해도, 배 한척은 띄우고도 남았을 겁니다.” 2012년 말,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며 쓴 소장을 광주지법에 접수하며 양씨는 평생 삼켜온 말을 쏟아냈다. 같은해 5월 다른 징용 피해자들이 먼저 낸 소송에서 대법원이 배상 책임을 인정해줬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얻었다. 소송을 낸 지 1년 만인 2013년 11월, 법원이 처음 미쓰비시의 패소를 선언했다. 미쓰비시가 항소했지만, 2015년 6월 광주고법도 그가 옳다고 했다. 양씨는 2009년 광주에서 먼저 잠든 피해자 김혜옥씨의 묘를 찾았다. “여기 누워 있어도 네 몫까지 이겨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


하지만 2015년 7월 대법원에 접수된 재판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의 약속은 3년째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양씨는 “면목이 없어서” 김씨 묘도 다시 찾지 못했다. “나는 바라는 거 없어요. 미쓰비시가 잘못했다고, 죽기 전에 인정받고 싶어요. 돈 받으면 나처럼 학교 못간 애들 보태주고 싶고요. 판사님들이 안하면 누가 해줍니까?” 양씨는 오늘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 잃어버린 18년


고 박창환(1923-2002). 1944년 히로시마에 끌려갔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미쓰비시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했지만 손에 쥔 돈은 매달 20엔. 그마저도 일부는 ‘저금’ 명목으로 빼앗겼다. 이듬해 핵폭탄이 터지며 얼굴도 망가졌다. 얼굴이 망가졌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박씨 손으로 일궜던 3000여평의 농지는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다. 망가져 버린 삶으로, 박씨는 들어왔다. 심근경색으로 숨지기 두해 전 미쓰비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아들 박재훈(72)씨는 소송을 이어받으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생을 이해하게 됐다. 박씨 기억 속 아버지는 늘 아팠다. 하루가 멀다고 잔기침을 토했고, 고름에 잠을 설쳤다. 동원 후유증과의 싸움이었다. 미쓰비시에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았다.


2007년 2월, 원고 패소(부산지법). 2009년 2월, 항소기각(부산고법).


유언은 오랫동안 지켜지지 못했다. 그러다 2012년 처음 대법원이 그들의 손을 잡아줬을 때 박씨는 12년 만에 웃었다. 조용히 아버지 산소를 찾아 판결문을 읊어드렸다.


2013년 9월 사건이 소송절차에 따라 대법원에 접수됐다. 박씨는 어느새 아버지만큼 늙어버렸다. 귀가 안 좋고, 거동도 힘들다. “판사님들이 알아서 잘 판결해주겠거니 생각했죠.” 재훈씨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5년간 물음표를 삼켰다.


‘재판거래’ 의혹이 나온 최근에서야 의문은 풀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승소 판결을 안냈으면 좋았겠어요. 한번 이기게 해놓고, 18년을 기다리게 한 거잖소. 공부 잘해서 판사 됐다는 사람들이 일본 사람보다 못한 거 아니요. 머지 않아 아버지 뵐 때 좋은 소식 하나는 들고 가야 하지 않겠소.” 수화기 너머 박씨는 또한번 울음을 삼켰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2018.08.1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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