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가 죽었다고? 카마시 워싱턴에게 물어봐

[컬처]by 한겨레

[서정민의 뮤직박스]


재즈바 스크린으로 만났던 ‘황홀한 14분’


별 홍보 없이도 첫 내한공연 매진행렬


재즈 바탕 위에 다양한 장르 버무려


‘21세기 음악의 미래’를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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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재즈가 싫어요.” 영화 <라라랜드> 속 미아(엠마 스톤)의 말에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그를 어느 재즈 클럽으로 데리고 간다. “재즈는 그냥 듣는 음악이 아니에요. 얼마나 치열한 대결인지 직접 봐야 해요. 저 친구들 보세요. 저 색소폰 연주자요. 방금 곡을 가로채서 멋대로 가지고 놀아요. 다들 새로 작곡하고 편곡하고 쓰면서 선율까지 들려주죠. 이젠 또 트럼펫이 할 말이 있군요. 서로 충돌했다가 다시 타협하고 그냥…. 매번 새로워요. 매일 밤이 초연이에요. 진짜 기가 막혀요. 그런데 죽어가고 있죠. 싹이 마르고 있어요. 수명을 다했다고 죽게 내버려두라지만, 나라도 지킬 거예요.”


미아와 함께 살게 된 세바스찬은 안정적인 돈벌이를 위해 음대 동기인 키이스(존 레전드)를 찾아간다. 그의 밴드에서 건반을 연주하려 하는데, 지금껏 해온 음악과 많이 다르다. 당황하는 세바스찬에게 키이스는 말한다. “알아. 좀 다르지. 넌 재즈를 지키고 싶다지만, 아무도 안 듣는 걸 어떻게 지켜? 재즈는 너 같은 사람이 죽이는 거야. 라이트하우스에서 90대 노인이나 상대하고, 애들이나 젊은 사람들은 외면하잖아. 네 우상인 케니 클라크나 셀로니어스 몽크는 혁명가였어. 전통만 고집하면서 어떻게 혁명가가 돼? 넌 과거에 집착하지만, 재즈는 미래에 있어.”


영화를 보며 세바스찬의 재즈론과 키이스의 재즈론 둘 다 흥미롭게 들었다. 키이스가 들려준 음악이 재즈의 미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얘기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16일 저녁 서울 서교동 무브홀에서 열린 카마시 워싱턴 내한공연을 보면서 나는 키이스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재즈의 미래를 열어젖히는 혁명가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카마시 워싱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마시 워싱턴을 처음 접한 건 올해 초 서울 강남의 어느 재즈바에서였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황덕호 재즈평론가는 디제이에게 카마시 워싱턴을 신청했다. 디제이는 그의 곡 ‘트루스’(Truth)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서 찾아 스크린으로 재생했다. 무려 14분이 넘는 대곡이었는데, 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하더니 뒤로 갈수록 웅장해지면서 한편의 대서사시처럼 전개됐다. 일상의 정적인 모습을 담은 영상은 볼수록 빠져들었다. 14분이 눈 깜빡할 새 흘러갔다. 화려한 기교 없이 그저 음악의 무드만으로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다.


카마시 워싱턴에 대해 알아봤다. 1981년생 미국 테너 색소폰 연주자로, 웨인 쇼터, 허비 행콕 같은 재즈 거장들과 협연했을 뿐 아니라 로린 힐, 나스, 스눕 독 같은 힙합 뮤지션과도 협연했다. 요즘 힙합의 대세 켄드릭 라마의 앨범 <투 핌프 어 버터플라이>(To Pimp A Butterfly)에 참여하면서 이름을 더 널리 떨쳤다. 2015년 발표한 첫 앨범 <디 에픽>(The Epic)은 제목처럼 러닝타임 170분에 달하는 대서사시였다. 32명의 오케스트라, 20명의 코러스 등 모두 60여명의 뮤지션이 참여해 거대한 사운드의 층을 축조해냈다. 평단은 극찬했고, 카마시 워싱턴은 ‘21세기 재즈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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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시 워싱턴은 2017년 앞서 언급한 ‘트루스’가 담긴 미니앨범(EP) <하모니 오브 디퍼런스>(Harmony Of Difference)를 발표한 데 이어, 지난 6월 정규 2집 <헤븐 앤드 어스>(Heaven and Earth)를 내놓았다. 14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에 ‘헤븐’과 ‘어스’ 두 파트로 나눠 각각 8곡씩 담았다. 이번에도 극찬이 이어지고 있다. 첫 곡 ‘피스츠 오브 퓨리’(Fists of Fury·분노의 주먹)부터 청자를 대번에 사로잡는다. 이소룡 주연 영화 <정무문>의 오프닝을 재해석한 곡인데, 동서양의 정서가 한데 뒤섞여 절묘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그의 음악세계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즈음, 첫 내한공연 소식을 접했다. 공연기획사는 홍보를 대대적으로 하지 않았다. 주로 에스엔에스로만 홍보했다. 음악 담당 기자인 나도 페이스북 광고를 보고서야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연장을 찾아가니 어디서들 알고 왔는지 사람들이 길게 줄서 있었다. 공연기획사 페이크버진은 700명 매진이라 했다. 무브홀에서 공연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들어찬 광경은 처음이었다. 음악깨나 듣는다는 음악업계 관계자들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다들 카마시 워싱턴의 무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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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올랐다. 그는 자신까지 포함해 모두 7명 편성의 밴드로 무대에 섰다. 자신이 연주하는 색소폰에다 트롬본, 건반, 콘트라베이스, 드럼 2대, 보컬을 더했다. 비좁은 무대가 가득 찼다. 새 앨범 수록곡 ‘스트리트 파이터 마스’(Street Fighter Mas)로 문을 열었다. 추억의 오락실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에 바치는 이 곡은 일순간에 공연장을 장악했다. 이어 <디 에픽>의 대표곡 ‘더 리듬 체인지스’(The Rhythm Changes)를 연주하자 사람들이 환호했다. 여성 보컬리스트의 노래가 아름답게 울려퍼졌다.


카마시 워싱턴의 색소폰이 중심을 지키는 가운데, 다른 연주자들도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뽐냈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베이시스트 마일스 모슬리가 직접 노래하며 베이스 솔로 연주를 들려주는 대목에선 뜨겁게 달아오른 힙합 공연을 보는 듯했다. 그의 베이스는 힙합 리듬을 연주하듯 그루브를 탔다. 그래미상을 받은 재즈 드러머 로널드 브루너 주니어와 이날 생일을 맞았다는 드러머 토니 오스틴의 드럼 듀엣 연주는 정교하면서도 자유로웠다. 묵직한 베이스 드럼을 풍부하게 깔아 흡사 힙합이나 이디엠(EDM) 비트를 만들어내는 것만 같았다.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카마시 워싱턴의 음악은 재즈라는 틀로만 한정 짓기에는 너무 광범위하다. 재즈를 바탕으로 하면서 클래식, 힙합, 리듬앤블루스(R&B), 솔, 펑크(Funk), 가스펠 등 다양한 음악 요소를 뒤섞고 버무린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재즈 팬이든 재즈 팬이 아니든 간에 대번에 사로잡고 만다. 실제 이날 공연장에는 재즈 팬도 있었지만, 재즈를 낯설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카마시 워싱턴을 이른바 ‘힙한’ 뮤지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그들에게 카마시 워싱턴은 최첨단 트렌드이자 미래의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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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순탁 음악평론가는 공연을 보고 이런 평을 남겼다. “그가 왜 재즈계의 아이콘을 넘어 대중음악 전체에서 ‘머스트 리슨’ 뮤지션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공연이라기보다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 제의에 참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거의 접신에 가까운 경지를 보여주면서도 절묘한 통제의 미덕을 준수하는 연주 하모니가 압권! 2018년 최고의 내한공연으로 꼽는 음악 팬이 적지 않을 것이다.”


카마시 워싱턴이 또 한국에 온다면 그땐 더 큰 공연장이 필요할 것이다. 재즈 팬뿐 아니라 그저 ‘음악 팬’들이 모여들어 축제처럼 즐길 것이다. 카마시 워싱턴 앞에선 재즈가 죽었니 안 죽었니 하는 논쟁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새로운 음악가와 새로운 음악 팬들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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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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