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시의 작품을 사려는 ‘바보’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컬처]by 한겨레

‘소더비 파쇄 쇼’ 벌인 뱅크시의 예술세계


‘얼굴 없는’ 거리화가 뱅크시

소더비에서 팔린 15억짜리 작품

낙찰된 순간 파쇄되는 ‘퍼포먼스’

정치메시지 담은 낙서미술로 유명


“예술은 불안한 자들을 편안하게

편안한 자들을 불안하게 해야”

자본주의 체제·권력 비판할수록

작품값 오르는 아이러니한 상황

뱅크시의 작품을 사려는 ‘바보’들은

지난 6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 나온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왼쪽). 이 작품은 이날 경매에서 약 15억원에 낙찰된 직후 저절로 파쇄돼 절반쯤 찢어졌다.(중간) 뱅크시는 파쇄장치를 자신이 설치했음을 밝히며 애초 전부 파쇄할 계획이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연습에서는 항상 제대로 작동했다”며 액자를 만든 직후 리허설을 하는 모습도 공개했다.(오른쪽) 뱅크시 인스타그램 갈무리

지난 6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약 15억원에 팔린 뱅크시의 작품이 경매 직후 저절로 파쇄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직후 뱅크시는 이 파쇄가 자신이 계획한 것임을 밝혔다. 절반 정도 파쇄된 이 작품의 낙찰자는 이 작품을 그대로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얼굴 없는 거리 예술가’로 불리는 뱅크시의 예술세계를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이 분석한 글을 싣는다.

“예술은 불안한 자들을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자들을 불안하게 해야 한다.”―뱅크시

지난 5일 영국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에서는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가 낙찰됨과 동시에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스스로 파쇄되는 광경이 펼쳐졌다. 104만파운드(약 15억4천만원)에 낙찰된 이 그림은 여러 갈래로 찢어지다가 중간 즈음에서 멈췄다.(뱅크시는 완전히 찢어지는 것이 애초 계획이었다고 나중에 밝혔다.) 반쯤 찢어진 작품은 적당한 위치에서 멈추면서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이 사건은 즉시 언론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주최 쪽은 작품 훼손의 범인을 색출하기에 나섰다. 다음날 뱅크시는 경매장에서 발생한 일이 본인의 소행임을 알리는 동영상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그는 이 작품이 경매에 올라갈 것을 알고 미리 파쇄장치를 액자에 설치했다고 말했다. 이 동영상에는 수개월 전에 액자 뒷면에 파쇄장치를 부착하는 순간부터 경매장에서 파괴되기까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이 영상은 한편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였다.


그동안에도 자본주의와 미술시장을 비판하는 작업을 해왔던 그였기에 사람들은 이번 사건도 그 맥락에서 이해했다. 구매자도 오히려 이색적인 그의 퍼포먼스가 결합된 이 작품을 낙찰된 가격으로 그대로 구매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뱅크시의 콘셉트를 흉내 내서 자신의 작업을 파괴하는 작가까지 생겨났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 거리미술가이자 예술행동주의자인 뱅크시가 미술시장에서 벌인 성상 파괴적인 이번 해프닝은 여러 질문을 유발시켰다. 어떤 이들은 ‘역시 뱅크시다운 발상’이라고 극찬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이 또한 뱅크시가 자신의 작품값을 올리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쇠락하던 그라피티 전환시켜

뱅크시의 작품을 사려는 ‘바보’들은

뱅크시가 2015년 12월 프랑스 칼레의 난민캠프에 그린 그라피티. 아버지가 시리아 출신인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쓰레기봉투와 매킨토시 컴퓨터 초기 모델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AP 연합뉴스

뱅크시는 잉글랜드 브리스틀에서 1974년께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처음 등장할 당시에는 그에 관한 어떤 신상정보도 알려지지 않아서 ‘얼굴 없는 화가’로 불렸다. 그는 1990년 초반 그의 고향에서 그라피티 갱 ‘드라이브레즈 크루’(DryBreadZ Crew)와 함께 낙서미술(그라피티 아트)을 시작했다. 다른 화가들과 비교해서 그림 그리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 경찰에 단속된 이후로 그는 빠른 속도로 그림을 제작하고 자리를 피할 수 있는 특유의 스텐실 방식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사실 뱅크시가 낙서미술을 시작할 무렵의 그라피티는 1960년대 ‘저항문화’의 상징이라거나 ‘낙후된 도시에 문화적 활력을 부여하는 거리예술’로 환영받기보다는 아마추어들의 한물간 퇴행미술이나 거리를 더럽히는 범죄행위로 취급되고 있었다. 더욱이 뉴욕을 배경으로 거리화가로 성장한 키스 해링이나 장미셸 바스키아 같은 작가들이 거리미술의 독창적인 미학 세계를 바탕으로 주류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오히려 저항성을 잃어버리고 자본주의와 기득권에 영합하는 거리예술가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유행에 빠진 들쥐처럼 쏟아져 나와 아무 곳에나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서명 같은 낙서를 그려놓고 달아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라피티가 많이 그려진 지역 도시들은 슬럼화돼 갔다.


뱅크시는 이처럼 자조적이고 손재주를 자랑하는 그라피티를 버리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에 개입해서 반향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거리미술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는 또한 아무 곳이나 빈 벽이 있으면 그림을 그려대는 낙서미술 화가들과 달리, 자신이 그리는 그림의 정치적 메시지와 그 그림을 담아내는 장소와의 관계를 면밀히 고려했다. 그가 찾아낸 장소들은 개인 소유의 건물이나 문짝, 경찰서나 공공관청 건물의 벽, 공중전화부스 근처나 시시티브이(CCTV)가 설치된 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경계에 설치된 벽 등으로 자신의 풍자화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렇게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지자들이 생겨났고, 반면 그의 그림을 특히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가 상상한 이미지는 그려지고 나서 곧 지워지거나 변형되는 거리미술의 속성을 잘 보여주었다. 뱅크시가 유명해지다 보니 거리에는 뱅크시의 작품으로 오인할 만한 유사한 그림들이 생겨났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작품을 위작들과 구분하기 위해 에스엔에스(SNS)에 포스팅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아가 ‘페스트 컨트롤’(Pest Control)도 운영하였는데, 이는 뱅크시의 작품을 흉내낸 위작 방지용 사조직이다. 사람들은 뱅크시의 작품을 실제로 보기보다는 에스엔에스나 언론을 통해서 주로 접하게 되는데, 그의 작품은 거의 실시간 보도가 되곤 했다. 그의 벽화가 그려진 영국 브리스틀시의 거리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그가 권력자들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거리에서 생겨나서 일정 기간을 살다가 사라지는 ‘거리미술’은 그 공간적 태생적 한계 때문에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걸리는 제도적인 미술과 구분된다. 그는 현대미술을 ‘부당한 기업연합체계’로 규정하고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부르주아지 취향의 부당한 상업주의 미술에 대해서 비판한다. 뱅크시는 전동드릴을 들고 있는 쥐나, 대량살상무기를 들고 있는 원숭이, 꽃다발을 투척하는 시위자, 오줌 누는 근위병 등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이미지와 재기발랄한 풍자로 이루어진 텍스트, 도발적이고 선동적인 의견이나 진술을 적절한 장소에 밀어넣는다.

뱅크시의 작품을 사려는 ‘바보’들은

지난 6월2일 러시아 모스크바 센트럴하우스오브아티스트에서 열린 ‘더 뱅크시’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뱅크시의 작품 <분노, 꽃을 던지는 자>를 보고 있다. EPA 연합뉴스

그는 “예술은 불안한 자들을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자들을 불안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권력자들을 공격했다. 그에게 있어서 거리미술은 이와 같은 논쟁을 발생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그의 모든 작업 과정은 하나의 수행적인 퍼포먼스처럼 읽힌다. 그는 현실비판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개입하고자 하는 사건을 효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를 차용해 사용한다.


이제 그는 어느덧 유명해져 제도적 미술시장에서 통용되는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고자 하는 화상이나 소장가들을 비판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MB 풍자 쥐그림’ 계기 국내 유명세

뱅크시가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11년 이명박 정부가 개최한 G20 행사 포스터에 그려진 ‘청사초롱을 든 쥐’ 그림 때문이었다. 이 ‘쥐’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풍자와 이 행사 이름 ‘지’(G) 발음과 연관되어 있었는데, 그 그림을 그린 박정수씨는 공용물건 손상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항간에는 쥐를 자주 그리는 뱅크시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루머가 떠돌았고, 이를 알게 된 뱅크시는 팬사이트에 ‘한국 쥐에게 자유를’이란 이름으로 구명운동을 벌였다. ‘쥐’는 그의 작업에서 매우 상징적인 존재이면서 그를 대신해서 사회와 미술계를 도발하거나 성가시게 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뱅크시는 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들은 허가 없이 존재한다. 미움을 받고 쫓기고 잡히고 학대당한다. 그들은 더럽고 불결하고 조용한 절망 속에서 산다. 그렇지만 마음만 먹으면 완전한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당신이 지저분하거나 존중받지 못하거나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의 결정적인 역할 모델은 바로 쥐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쥐들은 소외된 사람들의 의인화된 상징이며, 권력자들은 이들에 의해서 공격당하거나 조롱당한다. 그는 야생쥐처럼 도시공간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그가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실행에 옮겼다. 언젠가 그는 “허락받는 것보단 용서받는 게 언제나 쉽다”고 말했다. 2005년을 전후하여 뱅크시는 대영박물관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설치하였는데, 일부 작품들은 발견되어 폐기되었고 몇 작품은 미술관에 소장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뱅크시의 행동은 때로 자기모순적이다. 자신의 작품이 미술시장에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이 싫어서 파쇄했더니 오히려 소장가가 그것을 더 좋아하고, 때로는 작품 가격이 더욱 상승하기도 한다. 미술관에 걸린 어떤 작품을 조롱하기 위해 몰래 패러디해 걸어놓은 그의 작품이 역으로 미술관에 소장되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2005년 어느 날 뱅크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세워진 분리장벽 위에 그림을 그렸다. 분리장벽에 대한 비판적인 그림이었는데, 그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분리장벽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작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들은 뱅크시에게 작업을 중단하고 떠나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장벽이 더 유명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에 뱅크시는 분리장벽 근처에 자신의 작품들로 꾸며진 호텔을 열고 ‘세계에서 전망이 가장 나쁜 호텔’이라고 명명하였다.


뱅크시는 자신의 행위가 가지고 있는 자기모순적인 속성을 작업에 응용하기도 했다. 런던의 사우스뱅크에는 뱅크시가 ‘여기서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다’(This is not a photo opportunity)라는 텍스트를 써놓았는데, 사람들이 이 작품 앞에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이 에스엔에스를 떠돌고 있다. 2013년에는 뱅크시가 뉴욕 센트럴파크 근처에서 수천만원을 웃도는 그의 캔버스 작품들을 고작 60달러에 판매하는 세일 이벤트를 벌였다. 그는 하루 종일 8점을 팔아 420달러를 벌었는데, 그렇게 팔린 그의 작품들은 최하 2만5천달러를 호가하는 것들이었다. 이 행각은 미술시장의 상업성을 비판하기 위해서 벌인 것으로, 일부 지역 주민들이 횡재를 하게 되는 이벤트였던 셈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2007년께 그의 작품 가격이 나날이 치솟게 되자 <모론>(Moron·바보)이라는 작품에 “이 쓰레기들을 사는 바보 같은 당신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썼다. 150개가 프린트된 이 작품은 옥션에서 개당 2만5천달러(2800만원)에 거래되었다. 그의 작품을 사려는 바보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셈이다.


백기영/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2018.10.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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