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춤 이들에게는 전쟁

[컬처]by 한겨레

‘댄서스 잡 마켓’ 오디션 현장

공연 갈증·생계 고민 무용수들

연습비는 꿈도 못꾸는 무용단들

직접 연결해주는 ‘합동 오디션’

전문무용수지원센터, 19회째 개최

‘단체당 5명’ 출연료 100만원씩 지원

상반기에만 121곳·365명 참여 호응

해외 중소규모 발레단 국내 초청

단원 선발 ‘아시아 댄스 오디션’ 등

국외서 안정적 일자리 찾는 시도도

누군가에겐 춤 이들에게는 전쟁

화려한 무대 위에서 나비처럼 사뿐히 날아오르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고혹적이지만, 현실 속 그들은 대부분 ‘춤을 추기 위해 생계 대책을 고민하는’ 고된 일상을 산다. 한 무용수는 “가느다란 목을 곧추세우고 물살을 가르는 고고한 백조가 물 밑에선 두 다리를 쉴 새 없이 버둥이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무용수들은 늘 무대를 꿈꾼다. 그들의 꿈을 지원하기 위한 국내외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다. 무용단과 무용수를 직접 연결해주는 대규모 ‘합동 오디션’ 현장을 <한겨레>가 살짝 엿봤다.


“147, 148, 149, 150, 151번입니다.”


5명의 현대무용 오디션 참가자들이 들어서자 행사장에는 잠시 긴장 넘치는 정적이 감돌았다. 5명의 심사위원과 수십명의 무용단 관계자들이 둘러앉아 ‘매의 눈’으로 참가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출 때 들릴 법한 잡음, 불균질한 사운드와 현악기 음색이 매혹적으로 교차하는 매튜 허버트의 ‘쿨 노이즈’(cool noises)가 흘러나오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그동안 연습한 동작들을 쏟아냈다. 팔이 공중을 휘저었다가 떨어지고, 바닥을 뒹굴던 몸이 일순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오디션 1주일 전에 공개된 출제 영상에 따라 모두 같은 음악에 맞춰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지만, 박자를 타는 느낌과 움직임의 템포는 각각 달랐다. 2분30초의 짧은 음악이 끝나고 나서도 무용수들의 몸짓은 끝나지 않았다. 음악 없이 20~30초 동안 준비한 추가 안무가 이어졌다. 참가자 각자의 장점과 개성을 확인하기 위해 주어진 일종의 ‘과제’다. 누군가는 막춤을, 누군가는 브레이크댄스를, 누군가는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진행자의 말을 끝으로 참가자들은 꾸벅 인사를 하고 퇴장을 했다. 안도감, 아쉬움, 만족감, 안타까움 등 여러 감정이 한 공간 안에서 뒤엉겼다. 오디션장 밖에서도 ‘치열한 연습’은 이어졌다. 차례를 기다리며 좁은 복도에 줄을 선 참가자들은 작은 몸짓으로 안무 순서를 맞춰보며 몸을 풀었다.


지난 17일 일요일 서울 광진구 능동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열린 ‘2019 댄서스 잡 마켓’ 오디션 현장은 300여명이 넘는 참가자들로 북적였다. 3층에서는 발레, 2층에서는 현대무용, 1층에서는 한국무용 오디션이 동시에 펼쳐졌다. 이날 행사는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재단법인 ‘전문무용수지원센터’가 개최한 공개 오디션 자리다. “무용인들의 창작 환경을 돕고, 무용단에게 역량 있는 무용수를 연결해주기 위해” 지난 2007년부터 1년에 1~2회씩 비정기적으로 진행돼 온 ‘댄서스 잡 마켓’은 올해로 19회째를 맞았다.

누군가에겐 춤 이들에게는 전쟁

무용단 재정난-무용수 취업난 동시 해결

“무용만 해서는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다. 대부분 생계를 위해 중·고교생이나 성인을 대상으로 레슨을 한다. 요즘엔 필라테스나 요가 자격증을 따서 강의하는 경우도 많다.” 현대무용수 이재영(36)씨는 ‘댄서스 잡 마켓’이 열린 첫해부터 거의 매년 빠지지 않고 오디션에 참가했다고 했다. 소속 무용단이 있지만, 1년 내내 고정된 레퍼토리를 갖고 공연을 하는 것은 아니어서 무대에 대한 갈증과 생계에 대한 고민을 동시에 짊어져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의 무용단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현대무용을 하는 엘디피(LDP)무용단 김동규 대표는 국·공립무용단을 제외하곤 사설무용단의 재정난이 심각하다고 토로했다. 김 대표는 “사설무용단은 국고 등의 지원금을 받아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무대·의상·음악 등 필수 제작비를 제외하면 인건비로 지출할 수 있는 액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최소 2~3개월 연습을 해야 하는 작품을 하면서 무용수들에게 연습비는커녕 최저임금보다 적은 교통비 명목의 출연료를 지급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문체부가 내놓은 ‘2018년도 공연예술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국내 무용 단체는 2015년 353개에 견줘 2018년 382개로 다소 늘었지만, 무용단원 수는 5717명에서 3975명으로 크게 줄었다. 또 2018년 기준으로 382개 무용단 가운데 4대보험 및 안정적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국·공립무용단체는 전국에 27개(국립 3개, 광역 12개, 기초 12개)로 전체의 약 7%에 불과하다. 한해 쏟아지는 무용전공 졸업생이 줄잡아 1700명(한국무용협회 2018년 통계)에 달하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이 생계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춤 출 수 있는 곳을 찾기란 ‘바늘구멍 뚫기’와 같다.


전문무용수지원센터가 개최하는 ‘댄서스 잡 마켓’은 이런 무용단과 무용수들의 어려움을 동시에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 프로그램은 한 단체에 최대 5명의 무용수를 선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무용수 1인당 100만원의 출연료를 지급한다. 최근 5년 간의 통계를 보면, 2014년 무용단 71개와 무용수 240명이 참여했던 것에 견줘 2018년엔 무용단 169개와 무용수 360명이 지원해 호응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에는 이번 상반기 오디션에만 121개 무용단, 365명의 무용수가 참여했다.

누군가에겐 춤 이들에게는 전쟁

한국무용 부문 지원자 이진주(31)씨는 “한국무용은 인기 장르도 아니라서 공연 기회가 늘 부족하다. 그래서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은 무용수들에게 너무 소중하다. 앞으로도 지원사업이 확대돼 오랫동안 걱정없이 춤을 출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센터가 2018년 실시한 ‘만족도 조사결과’에서도 “지원사업이 도움이 된다”(도움+매우 도움)는 응답이 90.7%나 됐다.


무용수와 무용단이 서로 어울려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도 ‘댄서스 잡 마켓’의 중요한 역할이다. 와이즈발레단 김길용 대표는 “개성과 실력을 갖춘 많은 무용수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고, 공연 쪽 일을 하는 다른 단체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플랫폼”이라며 “다만, 특정 공연에 한정해 지원이 되다 보니 실력 있는 무용수를 정규 단원으로 고용할 수 없다는 점이 늘 아쉽다”고 말했다.

국내 일자리가 없다면 국외로…해외 무용단 오디션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춤출 곳을 찾기가 힘들어지자, 최근엔 해외 진출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유럽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공연장을 기반으로 한 중소규모 발레단이 꽤 많다. 한국과 달리 무용 등 예술적 가치에 대한 선호가 높기 때문에 고정 레퍼토리를 가지고 1년 내내 주기적으로 무대에 작품을 올리고, 한국과 비교해도 꽤 높은 월급을 단원들에게 지급한다.

누군가에겐 춤 이들에게는 전쟁

지난해 8월엔 국내에서 처음으로 무용수들의 해외발레단 취업을 돕기 위한 ‘아시아 댄스 오디션 프로젝트’가 열렸다. 일종의 오디션 매니지먼트 회사인 댄스플래너가 캐나다 위니펙 로열 발레단, 폴란드 브로츠와프 발레단, 스페인 카탈루냐 국립발레단, 독일 하겐 발레단,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국립발레단, 체코 올로모우츠 발레단 등 해외 무용단 7곳 관계자를 한국으로 직접 불러 오디션을 진행했다. 댄스플래너 박수정 이사는 “애초 ‘1명 이상의 단원을 무조건 선발한다’는 계약 조건을 내걸고 해외 무용단을 섭외했으며, 총 60명이 지원해 이 가운데 15명의 무용수(한국인 13명, 러시아·일본인 각 1명)가 취업에 성공했다. 앙상블이나 인턴뿐 아니라 솔리스트·드미 솔리스트 등 주역급으로 선발된 경우도 5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올해도 7월12~13일 ‘제2회 아시아 댄스 오디션 프로젝트’가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에서 열린다. 독일 도르트문트 무용단, 독일 브레머하펜 무용단, 미국 오클라호마 발레단, 우루과이 국립발레단, 크로아티아 리예카 국립발레단(이상 확정), 핀란드 국립발레단, 에스토니아 국립발레단, 독일 라이프치히 발레단(이상 예정) 등 7곳이 참여할 예정이다.


체코 DJKT발레단에서 3년 동안 무용수로 활동한 댄스플래너 김동욱 대표는 “김기민(마린스키), 서희(아메리칸발레시어터), 강효정(슈투트가르트) 등 한국 무용수들이 세계적인 무용단에서 활약하면서 한국 무용수에 대한 선호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각종 콩쿠르에서 수상하는 등 실력을 갖추고도 방법을 몰라 해외발레단에 입단할 기회를 잡기 힘든 것이 한국 무용수들의 현실이다. ‘아시아 댄스 오디션 프로젝트’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무용수들의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해 기획된 행사”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한국은 무용 전공자 수에 견줘 무용단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고 상황도 열악하기 때문에 앞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는 도전자들이 훨씬 더 늘어날 것으로 본다”며 “한국 무용수의 세계 진출은 결국 발레 한류의 밑돌을 놓는 일이기에 앞으로 이러한 프로그램이 더 많이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2019.05.0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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