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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주식 1주도 없이
기업을 지배하는 방법

by한겨레

재벌 상속의 민낯 ‘편법’

한겨레

한진그룹의 경영권을 자녀인 조현아, 조원태, 조현민 삼 남매가 가지려면 조양호 전 회장의 지분 확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 2.3%의 지분을 갖고 있는 삼 남매가 아버지 한진칼 지분 17.84%를 상속받아야 하는데, 65%(3천억원)에 달하는 상속세가 부담이다. 연합뉴스

2019년 4월8일 아침 8시, 갑작스레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1969년 항공기 8대로 출범한 대한항공을 전세계 43개국 111개 도시에 취항하는 글로벌 항공사로 키운 입지전적 최고경영자(CEO)다. 조양호 회장 죽음을 애도하는 행렬이 경제계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고 조양호 회장 애도가 한창이던 이때 증시에서는 한진칼, 대한항공 등 한진그룹 기업 주가가 급등했다.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주가는 최고 93.7%, 대한항공 주가는 최고 30%까지 올랐다. 가장 주가 변동폭이 컸던 한진칼 우선주는 400.37% 급등했다. 그사이 한진그룹 기업가치가 변한 것은 없었다. 굳이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총수 죽음뿐이었다. 매정한 주식시장이다.

한진그룹 주가 급등 배경

한진그룹 계열사 주가를 끌어올린 동력은 ‘상속세’다. 한진그룹 정점에 있는 한진칼 최대주주는 조양호 회장으로 17.84% 지분을 가졌다. 자녀인 조현아, 조원태, 조현민 삼 남매는 각각 2.3%를 갖고 있다. 아버지 지분을 상속받으려면 3천억원 가까운 상속세를 내야 한다. 시장은 세금 납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배당을 확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했고, 주가 급등을 부채질했다.


세금 낼 돈이 없어 선대로부터 이어온 기업 지배력을 잃어버리는 일은 재벌가에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사태다. 상속세율이 높은 국가에서 상속은 3대를 넘기기 힘들다. 기업을 상장시키면 지분 절반이 시장에 매각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면 그 절반이 또 절반이 된다. 소유와 경영을 함께 하던 창업 지배구조는 2세, 3세로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무너진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기업인은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작업’을 해왔다. 흔히 써온 방법은 일감 몰아주기(Tunneling)였다. 사업하다보면 다른 사업 기회를 만들기 용이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작은 피자집 하나를 하더라도 피자치즈를 파는 업체에는 소중한 매출처가 된다. 큰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충분한 일감이다. 볼펜 한 자루를 사도 직원이 많으니 엄청난 매출이다. 전산, 물류, 건물관리, 심지어 화장실 청소도 엄청난 일감이다. 재벌가는 이런 일감을 주로 자녀에게 줘서 자산을 축적하게 하는 기회로 삼았다.


한화그룹 전산 업무는 김승연 회장의 김동관·김동원·김동선 세 아들이 100% 지분을 가진 한화S&C가 독차지했다. 한화S&C는 계열사 일감을 통해 성장한 것은 물론 똑똑한 자회사를 둔 덕에 김 회장 세 아들에게 막대한 규모의 이익을 가져다줬다.

한겨레

기업들은 2, 3세에게 회사를 넘겨주기 위해 ‘일감 몰아주기’라는 편법을 주로 써 왔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정의선(오른쪽) 수석부회장의 지분율이 높은 현대글로비스가 운송을 독점해 성장했고, 이를 통해 상속세 재원을 쌓았다. 연합뉴스

현대자동차가 자동차를 만들면 운송은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지분율이 높은 현대글로비스가 독점했다. 미미했던 재벌가 2·3세 자녀들 회사는 수많은 계열사에서 일감을 받아 성장했고, 상속세 재원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이런 방식은 대기업, 중견기업을 가리지 않았다.


경제개혁연대는 2016년 ‘회사 기회 유용과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지배주주 일가의 부 증식 6차 보고서’에서 10대 기업만 추려보니 일감 몰아주기로 총수 일가 65명이 얻은 자산 증식액은 26조2128억원이라고 밝혔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5512%에 이르렀다. 개인별로 보면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7조3천억원을 일감 몰아주기로 벌었다. 같은 방법으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4조원,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3조6천억원을 벌었다.


기업이 누구와 거래하는지는 자체적으로 판단할 문제다. 하지만 총수 일가 재산 증식을 위해 기업의 사업 기회가 유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감 몰아주기로 재벌가 2, 3세가 재산을 증식해 상속세를 마련하는 문제를 두고 비판이 이어졌다. 2018년 8월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정거래법 전면 개정안을 통해 규제 대상이 되는 회사의 총수 일가 지분 기준을 현행 상장사 30%, 비상장사 20%에서 상장·비상장 관계없이 모두 20%로 일원화했다.

지주사 전환과 자사주 매입 등 편법 상속

상속을 위한 또 다른 방식은 지주사 전환과 자사주 마법이었다. 기업 돈으로 자사주를 사고 지주사로 분리하면 대주주 지분율이 높아지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지분 100이 있는 회사를 지주사 30, 사업회사 70으로 나누면 대주주는 지주사 30만 소유하더라도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 여기에 회삿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면 자기 돈을 쓰지 않고도 지배력을 높일 수 있다. 지주사 전환은 순환출자로 왜곡된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세금을 이연하는 특례를 적용해줌으로써 활발하게 이뤄졌다.


지주사 전환 특례가 소멸하기 전 막차를 탄 현대중공업그룹의 경우, 지주사로 전환하기 전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지분율이 10.15%였다. 지주사로 전환한 뒤 지분율은 25.8%로 높아졌고, 지분이 전혀 없던 아들 정기선 부사장은 5.01% 지분이 생겼다. 막차를 타기 위한 기업들 발걸음은 분주했다. 2010년 96개였던 지주사는 2016년 162개로 늘었다. 2018년 종료하기로 한 지주사 전환 특례는 3년 연장됐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 때문인지 지주사 전환과 자사주 마법을 시행하는 기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에서 총수 일가는 자금 마련에 몰두했다. 그들이 욕심이 너무 많아 그런 것이 아니다. 선대가 창립한 기업의 지배력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라 해도 엄청난 돈이 든다. 한국에서 돈이 가장 많은 삼성그룹 총수도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재판받고 있을 정도다. 평범한 직장인이 정상적으로 급여를 받거나 투자해서 가질 수 있는 부의 수준이 아니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에서 불법으로 규정되지 않으려면 권력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정권과 유착은 양날의 검이다. 가까운 권력에게 우호적인 승계 환경을 ‘허락’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권력 부침에 따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2016년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일어나고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현대자동차, 한진, 롯데, 삼성, SK, 한화, LG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집단 총수가 모두 증인으로 청문회에 참석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총수 7명 입에서 나온 ‘권력이 달라고 해서 줬을 뿐’이라는 답변은 너무나 초라했다. 이날 참석한 총수 7명 중 3명은 이미 수감 경력이 있고 두 사람은 청문회 이후 수감 생활을 했으며 두 사람은 이후 세상을 떠났다. 기업 경영으로 애국한다고 자부하던 이들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승계’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승계해야만 하는가, 아니 그렇게 한다고 승계가 되는가.

소유와 경영 분리… 변화하는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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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 회장이 지난해 6월 20일 서울 강남구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시카코 포럼(The Chicago Forum)' 기조연설에서 “앞으로 변화를 위해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도 핵심성과지표(KPI)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대부분 선진 국가에서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됐다. 물론 한국보다 기업 역사가 오래된 선진국에서도 창립자 일가가 대대로 기업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경우도 있다. ABB, 에릭손, 사브 등 스웨덴 대표 기업을 계열사로 거느린 발렌베리그룹의 최정점에는 발렌베리재단이 있다. 공익재단은 개인 재산이 아니여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사장 지위를 물려준다고 해도 상속세를 내지 않는다.


미국 포드, 덴마크 레고, 독일 보슈도 재단을 정점으로 한 기업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재단을 통해 상징적으로 기업을 대표할 뿐 직접 경영에 개입하지 않는다. 경영상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구원투수로 창업주 일가가 등판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주주와 이사회가 요구할 때이지 본인이 하고 싶을 때가 아니다.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 여전히 재벌 가문들은 소유와 경영을 함께 하고 있지만 점차 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을 오가거나, 승계 문제가 빌미가 되어 교도소 담장을 거니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직간접으로 경험해 알고 있다. 제도가 정비되고 사회적 감시도 강화되면서 편법 승계가 매우 어려워졌다.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사회 의장 자리를 내놓고, 경영보다는 기업의 사회적 가치에 더 집중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SK그룹의 경영 판단은 총수 개인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으로 구성된 최고 의사결정기구 수펙스(SUPER Excellent) 추구협의회에서 이뤄진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이사회에 외국인 등 전문성 있는 사외이사를 영입해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인사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전문적인 경영 판단에 도움이 된다”며 “이사회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은 불편하겠지만 총수 한 명이 모든 의사결정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측면에서는 유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화그룹은 일감 몰아주기 회사로 비판받았던 한화S&C의 지배 구조를 정리했다. LG그룹은 지주사 밖에서 총수 일가가 따로 갖고 있던 판토스, LG상사 등의 지분을 정리했다. 롯데는 75만 개에 이르던 순환출자를 모두 없앴다. CJ, GS 등 나머지 대기업 집단도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비판받던 계열사들을 정리했다.


그들이 진심으로 상속을 포기하고 사익 편취를 멈춘 것인지, 정권 눈치를 보느라 숨죽이는 것인지 여전히 완전하게 신뢰할 수는 없다. 분명한 점은, 한국 사회가 더는 탈·편법으로 기업을 2세, 3세에게 상속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버지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방법은 주주에게 경영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인이 되는 것뿐이다.


그렇게 되면 최대주주가 아니라 지분 한 주가 없더라도 주주와 사회는 그들에게 기업 경영을 기꺼이 맡아달라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기업이 가업을 잇기 위한 방안으로 지분 확대를 꾀하기보다 먼저 2·3세의 경영 능력을 키우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권순우 <머니투데이방송> 기자 soonwoo@mt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