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라, 본디 그대로… 해남 달마고도 여행

[여행]by 한겨레

신비로운 단절 꿈꾸며 떠난 땅끝 해남

달마산 산등 17.74㎞ ‘달마고도’ 여행

수백미터 너덜겅 지나면 뭣이 나올까

최소한의 꾸밈과 최대한의 어울림

스님들, 한 수 배우고 갑니다

한겨레

지난 10일, 전남 해남 ‘달마고도’ 4코스에 있는 너덜겅을 걷는 여행객. 김선식 기자

얼마간 환상을 품은 길이 있다. 2017년 11월 개통한 전남 해남 ‘달마고도’다. ‘천년의 세월을 품은 태고의 땅으로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이라는 수식만큼이나 긴 길이다. 달마산(489m) 산등성이를 타고 봉우리 너덧개를 기다랗게 두르는 길은 총 4개 코스, 17.74㎞다. 천년고찰 미황사가 들머리인 원점회귀 코스다. 상상력을 자극한 건 두 가지였다.


첫째, 달마산은 석가모니 불법 28대 계승자이자, 중국 선종 초조인 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조선 중기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한 일화가 있다. 중국 남송 고관이 달마산 동쪽에 배를 정박하고 주민들에게 ‘우리는 이름만 듣고 멀리서 공경하기만 했는데….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라며 달마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둘째, 달마고도가 품은 절과 암자 풍경이 범상치 않았다. 미황사는 맹수 앞니처럼 솟은 기암 봉우리를 지척에 병풍 삼고, 도솔암은 아예 절벽 위에 자리를 틀었다. ‘신비로운 단절’을 꿈꾸며 떠나기 좋은 여행길이라고 여긴 이유다. 지난 10일, 미황사 일주문을 지나 달마고도로 들어섰다.

한겨레

‘가만있자,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거지?’ 미리 말해두지만 달마고도에서 이런 생각은 부질없다. 들머리 안내판엔 2~4코스 기점 큰바람재, 노지랑골, 몰고리재 등 지명들이 빼곡하나 정작 길엔 지명 설명이 거의 없다. 대리석과 나무 기둥으로 방향과 남은 거리만 일러줄 뿐이다. ‘샘터가 나왔으니 좀 전 2코스를 지났구나.’, ‘도솔암 300m 표지판이 나왔으니 3코스도 거의 다 걸었구나.’ 옛사람처럼 대강 가늠하며 걸어야 한다. 일터에서건 길에서건 좌표에 익숙한 도시인으로선 낯선 경험이었다. 처음엔 불친절하다고 투덜댔지만 이내 조바심을 내려놓았다. 나중엔 방향과 거리만 알려줘도 감지덕지라고 여겼다. 여기가 어디든 내가 누구든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그저 길을 만끽하면 될 일 아닌가.

한겨레

달마고도 2코스 숲길.

나뭇가지 무성한 숲은 그 흔한 데크(목제 길)도 없다. 밧줄과 난간도 없다. 서너칸가량 돌을 쌓아 경계석을 쌓았을 뿐이다. 그조차 산비탈 낭떠러지 쪽으로만 경계를 표시했다. 구멍 많은 너덜겅(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엔 물수제비 뜨기 좋을 얇은 돌을 깔았다. 판판하고 좁은 길이 생겼다. 달마고도는 약 1200년 전 스님들이 다니던 옛길(1, 4코스)을 연장한 달마산 산등성이 둘레길이다.

한겨레

달마고도 3코스. 김선식 기자

달마고도를 처음 제안한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은 “달마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험해 그동안 종종 추락사고가 발생했다”며 “산을 정복하기보단 산과 함께하며 바다, 섬, 마을을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는 길을 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 공사 기간 250일 동안 하루 40명가량 인력이 중장비 없이 삽, 호미, 지게, 지렛대로 길을 냈다. 공사하고 남은 돌과 흙, 나무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손수 주먹만 한 돌을 촘촘히 박아 다진 황톳길에선 길 만든 이들의 노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노동이야말로 ‘구도’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한겨레

달마고도 3코스 길. 김선식 기자

달마고도는 최소한의 꾸밈으로 최대한의 어울림(효과)을 이뤘다. ‘미니멀리즘’의 모범이다. 최소한만 손을 댔기에 자연과의 어울림을 극대화한 길은 하나의 건축 예술처럼 보였다. 금강 스님은 “산에 보이는 시설물은 눈에 거슬리기 쉬워 최소한의 방향과 거리 표시만 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걷는 이는 숲과 숨, 길과 걷기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걷다 보면 달마고도 전체가 숲속 거대한 사찰처럼 보인다. 대리석 기둥 표지석에 새긴 거북 문양을 보면 미황사 대웅보전 초석 거북 조각이, 길 위로 비스듬히 뻗은 나뭇가지 아래선 처마 서까래가, 허리 굵기 나무줄기 앞에선 배흘림기둥이 떠오른다. 잿빛 너덜겅과 황톳길은 스님 법복, 산새 지저귀는 고요한 오솔길은 산사의 정원이다. 달마고도를 걷는 6시간여 동안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은 여섯명(네팀)뿐, 그조차 스쳐 지나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적막한 숲은 종종 뾰족한 긴장을 유발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 반복조차 불자의 수행처럼 느껴졌다.

한겨레

달마고도 4코스. 김선식 기자

오색찬란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때가 있다. 늦겨울 달마고도에 핀 동백꽃은 시들었거나 이미 바닥에 쓰러졌다. 여기선 잿빛 너덜겅이 빛난다. 1~4코스 모두 너덜겅이 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메마른 ‘채석장’인데 가까이 가면 햇볕 좋은 쉼터다. 파란 하늘과 바다, 마을이 가깝게 보인다. 백미는 2코스 중간 즈음 약 100m 폭으로 수백미터 아래로 쏟아져 내린 너덜겅이다. 386 컴퓨터 모니터보다 큰 각진 돌덩이들이 봉우리에서 무더기로 쏟아진 광경이다. 물론 돌덩이들은 흐르다 멈춰 있다. 그 너덜겅에 납작한 돌을 놓아 낸 길을 사람이 지나가면 왠지 모를 감격스러운 풍경이 연출된다. 척박하고 기운 땅을 걸어 죽음의 세계(너덜겅)에서 생명의 세계(숲)로 나가는 듯 여행객 발걸음이 활기차다.

한겨레

도솔암에 오르는 여행객. 김선식 기자

다음엔 뭐가 나올까. 궁금하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멈춘다. 일상도 그러하다. ‘도솔암 300m’ 표지판을 보고 달마고도를 이탈했다. 호기심은 때로 궤도를 벗어나게 한다. 어차피 애초에 ‘신비로운 단절’을 꿈꾸며 떠난 길이 아닌가. 도솔암은 달마고도에서 샛길로 빠져 올라야 만난다. 마치 합성 사진처럼 세상과 단절된 요새 같은 절벽에 자리한 암자다. 가는 길은 좁은 급경사 오르막이다. 길에 멍석이 깔렸고 고작 300m라지만 오르막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헉헉거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오르는 길 지척에 헐벗은 기암 봉우리들이 지천이다. 턱밑까지 숨이 차올라 한숨을 토하곤 풍광에 놀라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겨레

지난 11일 전남 완도에서 온 김종배(61)씨가 도솔암 담장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김선식 기자

도솔암을 에워싼 절벽 바위엔 늦겨울에도 수풀이 자랐다. 돌을 쌓아 만든 계단과 담장, 부스러진 흙과 빛바랜 암자 나무 벽은 자연 그대로의 결이 살아 있다. 도솔암은 통일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도량이다. 조선 시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뒤 여러 스님이 복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 도솔암 주지 법조스님이 2002년 6월, 법당을 32일 만에 복원했다. 도반과 방문객들이 목자재와 흙 기와 1800장을 나르길 거든 덕이다. 당시 복원을 도운 김종배(61)씨는 전남 완도 사람이다. 복원한 뒤로 매해 도솔암을 찾고 있다고 한다. 김씨는 “도솔암에 올 때마다 자연 그대로의 거친 흙과 함께 숨 쉬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한다. 늘 다시 오고 싶단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겨레

지난 11일 달마고도 들머리 천년고찰 미황사 대웅보전. 김선식 기자

땅끝 하늘끝 도솔암은 고고하다. 관직을 포기하고 해남에 낙향한 조선시대 화가 공재 윤두서의 글귀가 떠오른다. ‘두어라, 알아보는 이 있을지니.’ 도솔암 담장 너머 맞은편에선 웅장한 기암절벽이 굽어본다. 알아보는 이 없는 그 절벽 앞에선 도솔암도 하나의 소박한 암자일 뿐이다. 달마고도로 내려와 다시 일상의 궤도로 돌아가는 길, 소박함의 뜻을 곱씹어 본다. ‘꾸밈이나 거짓 없이 제 격에 어울림.’

달마고도 여행 수첩

  1. 교통
    1. 기차(KTX)를 타고 나주역에 내려 공영주차장에서 쏘카를 빌려 이동했다. 서울역~나주역 기차(KTX) 이동시간은 2시간~2시간10분, 나주역에서 미황사까지 자동차 이동시간은 1시간30분가량 걸린다. 해남종합터미널에서 미황사로 가는 군내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오전 8시10분 남창, 영천 방향 버스를 타고 월송 정류장에서 오전 9시에 환승하면 미황사 들머리(미황사까지 도보 7~8분 거리)에 내릴 수 있다.
    2. 해남종합터미널에서 오전 11시10분, 오후 2시5분, 오후 5시에 미황사에 정차하는 군내 버스를 운영한다. 미황사~해남종합터미널 군내 버스는 오전 10시, 오후 2시, 오후 5시40분, 저녁 6시40분에 출발한다.
    3. 단, 눈이 도로에 쌓인 날엔 버스가 미황사 들머리까지 진입할 수 없다.(문의 해남교통 061-533-8826) 미황사에서 마봉리 쪽 도로를 타고 도솔암 주차장에 내려서 15~30분 걸어 도솔암으로 바로 가는 길도 있다.
  2. 갈림길 : 미황사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1코스 기점을 알리는 나무기둥 표지가 있다. 1코스에선 임도(차가 다니는 산길)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올라야 한다. 2코스 들머리 샘터 직전 내리막길은 미황사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샘터를 가로질러 가야 한다. 2코스 중간 즈음 ‘문바위’와 ‘미황사’, ‘도솔암’ 갈림길에선 ‘도솔암’ 쪽이 달마고도 방향이다. 3코스 중후반 자주색 ‘도솔암 300m’ 표지판을 따라가면 도솔암으로 가는 길이다. 달마고도는 원래 진행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3. 주변 관광지 : 해남에는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작품을 볼 수 있는 고산 유물전시관, 해남 윤씨 종가 고택인 녹우당 등 고산 윤선도 유적지와, 두륜산 자락에 있는 천년고찰 대흥사와 일지암, 해남 공룡박물관, 우수영 관광지 등이 있다.
  4. 숙소 : 미황사 인근엔 숙박업소가 드물다. 해남에 있는 한국관광공사 품질인증 숙박업소는 ‘설아다원’(북일면 삼성길 153-21/061-533-3083), ‘해마루 힐링숲’(북평면 동해길 108-35/010-2332-6303), ‘거목장 민박’(삼산면 민박촌길 63/061-535-1456) 등이 있다.
  5. 식당 : 진일관은 해남에서 유명한 남도 한정식집이다.(061-532-9932/해남읍 명량로 3009/한정식 2인분 6만원) 갈두항 근처 ‘전라도 가정식 백반’은 음식이 대체로 정갈하고 담백하다.(송지면 땅끝마을길 43/061-535-5008/삼치구이 1인분 1만2000원, 산낙지 연포탕 2인분 3만5000원)

해남(전남)/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2020.02.24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